지인의 부탁이 계기가 되어 번역해 본 아도르노의 짧은 에세이 입니다. 반 정도 번역된 분량이고, 반 정도가 더 남아 있네요. 나머지 분량도 시간 날 때 틈틈히 번역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 Suhrkampf Adorno Gesamte Werke Bd. 11: Noten zur Literatur S. 41- S.48

 

현대 소설에서의 이야기꾼의 현주소 / 테오도르 아도르노.


[1]


주어진 몇 분의 시간 안에 <형식>으로서의 소설의 현재 상태에 관해 억지로 요약을 해 보라는 것은 (그 안에서) 하나의 계기를 끄집어 낼 것을그것이 비록 폭력적으로 보일지라도 - 사실상 강제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 자리에서 끄집어 내고 싶은) 이 하나의 계기는 바로 이야기꾼(Erzähler)의 위치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야기꾼의 위치는 하나의 파라독스로서 특징 지워질 수 있습니다. 즉 하나의 형식으로서의 소설은 이야기를 계속 요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이야기 꾼은)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소설이라는 것은 시민 사회가 가진 하나의 특수한 문학적 형식이었지요. 현대 소설의 시초에는 <돈키호테> 안에 있는, 탈마법화된 세계의 경험이 놓여 있었고, (그러한 탈마법적 요소) , 순전히 있는 그대로의 상태 (bloßes Dasein) 를 예술적으로 성취 (Bewältigung) 하는 것이 소설의 요소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현실주의 (Realismus) 는 소설 안에 내재화되어 있었지요. 심지어는 소재 자체가 환타지적인 소설들마져도 그 내용이 현실에 대한 암시로 보여지도록 기획되었습니다. (그런데)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소설 안에 내재된)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 믿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즉 주관주의 (Subjektivismus)을 통해 규정되는 이야기꾼의 관점 속에서 계속 의문에 부쳐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관주의라 함은 변형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인 소재를 용인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통해 (다시 말해, 소재의 변형을 통해)  <대상성 Gegenständigkeit > 이라는 (전통적인) 서사의 요구를 함몰 시키려는 지적 시도들을 말합니다. 오늘날 만약 어떤 이야기꾼이 (여전히) 대상성에로 침전하려고 하고예를 들어 슈티프터 처럼겸허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직관들의 충만성과 조형성(Plastik) 에서 어떤 효과들을 이끌어 내려고 한다면 그는 단순히 상업 예술적인 (kunstgewerblich) 모방을 한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사랑으로 충만한 세계에 자신을 내맡긴다는 거짓말, 즉 세계는 의미로 가득차 있다는 거짓말로부터 윤리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게 되겠지요. 이러한 거짓말은 (아마도) 참을 수 없는 키치라는 망치, 즉 고향 예술(Heimatkunst) 이라는 망치를 맞고서야 급기야 종말을 고하게 되겠지요. 회화가 사진술을 통해 그 고유한 과제를 박탈당했듯이, 소설 역시 리포타주와 문화 산업이라는 매체, 특히 영화를 통해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소설은 이제 스스로 보고서를 통해서는 박탈당하지 못하는 그 무엇에 집중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소설은 회화의 경우와 달리 언어를 통해 그 대상으로부터의 해방에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 언어라는 것이 (그 자체로) 보고서라는 픽션을 강요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이스는 일관성을 위해 현실주의에 대한 소설 자체의 반발을 대화적인 언어 (diskursive Sprache)에 대한 반발과 함께 묶어 버렸던 것입니다.   

 

*원문


Standort des Erzählers im zeitgenössischen Roman / Theodor Wiesengrund Adorno


Die Aufgabe, in wenige Minuten einiges über den gegenwärtigen Stand des Romans als Form zusammenzudrängen, zwingt dazu, sei's auch gewaltsam, ein Moment herauszugreifen. Das soll die Stellung des Erzählers sein. Sie wird heute bezeichnet durch eine Paradoxie; es läßt sich nicht mehr erzählen, während die Form des Romans Erzählung verlangt. Der Roman war die spezifische literarische Form des bürgerlichen Zeitalters. An seinem Beginn steht die Erfahrung von der entzauberten Welt im 'Don Quixote', und die künstlerische Bewältigung bloßen Da seins ist sein Element geblieben. Der Realismus war ihm immanent; selbst die dem Stoff nach phantastischen Romane haben getrachtet, ihren Inhalt so vorzutragen, daßdie Suggestion des Realen davon ausging. Diese Verhaltensweise ist, in einer bis ins neunzehnte Jahrhundert zurückreichenden, heute zum Extrem beschleunigten Entwicklung fragwürdig geworden. Vom Standpunkt des Erzählers her durch den Subjektivismus, der kein unverwandelt Stoffliches mehr duldet und eben damit das epische Gebot der Gegenständlichkeit unterhöhlt. Wer heute noch, wie Stifter etwa, ins Gegenständliche sich versenkte und Wir kung zöge aus der Fülle und Plastik des demütig hingenommenen Angeschauten, wäre gezwungen zum Gestus kunstgewerblicher Imitation. Er machte der Lüge sich schuldig, der Welt mit einer Liebe sich zu überlassen, die voraussetzt, daßdie Welt sinnvoll ist, und endete beim unerträglichen Kitsch vom Schlage der Heimatkunst. Nicht geringer sind die Schwierigkeiten von der Sache her. Wie der Malerei von ihren traditionellen Auf gaben vieles entzogen wurde durch die Photographie, so dem Roman durch die Reportage und die Medien der Kulturindustrie, zumal den Film. Der Roman müßte sich auf das konzentrieren, was nicht durch den Bericht abzugelten ist. Nur sind ihm im Gegensatz zur Malerei in der Emanzipation vom Gegenstand Grenzen gesetzt durch die Sprache, die ihn weithin zur Fiktion des Berichtes nötigt: konsequent hat Joyce die Rebellion des Romans gegen den Realismus mit einer gegen die diskursive Sprache verbunden.

 

[2]


조이스의 시도를 한 개인의 자의적인 일탈이라고 거부하는 것은 궁색한 변명일 뿐이다. (왜나햐면) 경험의 동일성, 즉 이야기꾼의 태도를 유일하게 가능하게 하는 내적인 삶의 유기적인 연속성이 파괴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는 참전 용사가 마치 자신이 예전에 겪었던 모험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참전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지를 머리 속에서 상상해 보기만 하면 된다. 이야기꾼이 스스로 지배하고 있는 경험인 것처럼 등장하는 그 이야기들은 (이제)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 독자들은 그 이야기들에 정당한 의구심을 표시하곤 한다.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상상, 즉 어떤 사람이 자리에 앉아서 <좋은 책 한 권 읽었네~!> 라는 상상은 이제는 시대에 뒤떨어진, 쾌쾌묵은 것이다. 이렇게 되는 까닭은 독자들이 주의를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전달된 것(즉 전달되는 경험) 그 자체와 소설의 형식 때문이다. () 어떤 것을 이야기로 풀어 낸다는 것은 어떤 특별하게 말할 꺼리가 있다는 뜻인데, (이제는) 바로 그것이 관리되는 세계, 즉 표준화되고 항상 일정하게 획일화되는 세계에 의해 가로 막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모든 진술들 앞에 이미 이야기꾼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요구가 놓여 있는데, , 세계의 진행 과정은 본질적으로 개인화 과정이고, 개인이 자신의 활력과 감정을 가지고 역경을 헤쳐 나가며, 개인의 내면이 직접적으로 해 낼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는 요구들이다. 곳곳에 도처에 퍼져 있는 당의정 같이 단숨에 삼킬 수 있는 전기 문학들이 바로 이러한 소설 형식의 해체 과정의 부산물로서 나타나는 것들이다.

 

Die Abwehr seines Versuchs als abseitig individualistischer Willkür wäre armselig. Zerfallen ist die Identität der Erfahrung, das in sich kontinuierliche und artikulierte Leben, das die Haltung des Erzählers einzig gestattet. Man braucht nur die Unmöglichkeit sich zu vergegenwärtigen, daß irgendeiner, der am Krieg teilnahm, von ihm so erzählte, wie früher einer von seinen Abenteuern erzählen mochte. Mit Recht begegnet die Erzählung, die auftritt, als wäre der Erzähler solcher Erfahrung mächtig, der Ungeduld und Skepsis beim Empfangenden. Vorstellungen wie die, daß einer sich hinsetzt und »ein gutes Buch liest«, sind archaisch. Das liegt nicht bloß an der Dekonzentration der Leser sondern am Mitgeteilten selber und seiner Form. Etwas erzählen heißt ja: etwas  Besonderes zu sagen haben, und gerade das wird von der verwalteten Welt, von Standardisierung und Immergleichheit verhindert. Vor jeder inhaltlich ideologischen Aussage ist ideologisch schon der Anspruch des Erzählers, als wäre der Weltlauf wesentlich noch einer der Individuation, als reichte das Individuum mit seinen Regungen und Gefühlen ans Verhängnis noch heran, als vermöchte unmittelbar das Innere des Einzelnen noch etwas: die allverbreitete biographische Schundliteratur ist ein Zersetzungsprodukt der Romanform selber.


[3]


문학적인 대상성의 위기에서 인간 심리라는 분야 - 즉 약간의 불운이 있긴 했지만 문학적 대상성이 자리잡고 있었던 바로 그 영역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심리 소설들에서도 그 대상은 (다른 것들에 의해) 탈취되었다: (이미) 사람들은 언론인들이 무던히도 도스또예프스키의 심리학적인 업적에 도취되어 있던 바로 그 시기에 과학, 특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이미 오래 전에 소설가들이 이뤄낸 업적 보다 훨씬 앞서 나가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그렇긴 해도 (그들이) 도스또예프스키에 대한 이러한 공허한 상찬을 통해 도스또예프스키를 제대로 파악한 것은 또 아니다. 도스또예프스키에게 심리학이라는 것이 도대체 있다면, 그것은 예지적인 성격이나 본질에 관한 심리학이지 경험적인 성격이나 현실 생활 속에서 활보하는 인간들의 심리학이 아닌데, 도스또예프스키는 바로 이 점에서 전진을 이뤄낸 것이다. (그런데) 모든 실증적인 것, 잡을 수 있는 것, 그리고 인간의 내면의 사실들이 정보와 과학에 의해서 전유되었다는 사실 뿐 아니라 사회적인 삶의 과정이 그 표면에서 조밀해지고 틈이 없어짐에 따라 그 표면이 하나의 장막으로서 더욱 더 (삶의) 본질을 밀폐하게 되었다는 바로 그 점이 소설이 그 (실증적인) 틀을 벗어나 (삶 자체의 예지적) 본질 혹은 비본질의 제시에 몰두하도록 사실상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소설이 그 현실주의적인 유산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 즉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말하고자 한다면 - 소설은 (어떤) 현실주의, 즉 현실의 외관만 재생산하면서 사회적 삶의 과정의 표피가 만들어 내는 기만 행위를 돕기만 하는 현실주의는 (반드시) 포기해야만 했다. 개개인들의 (혹은 개개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들의) 인간적인 속성을 기계류의 매끄러운 운행을 위한 윤활유로 전화시키는 모든 관계들의 사물화 과정, (개인들 간의) 보편적인 소외와 (개개인들 내부의) 자기 소외 과정은 스스로 말로서 호명되기를 요구받고 있는데, 그를 위해서는 소설은 다른 예술 형식들과 마찬가지로 (아직) 적합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했다. 예전부터, 확실히는 18세게 필딩의 토미 존스이래로 소설은 자신의 대상을 살아 있는 인간과 응고된 관계들의 긴장에서 찾았는데, 소외는 거기에서 바로 소설 미학의 수단이 되었다. 왜냐하면 인간들 스스로가, 혹은 개인과 집단이 서로에게 점점 낯설어 지면 질수록 동시에 그 관계들은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것들이 되며, (이런 상황에서는) 바로 (낯설어진) 인간의 외적인 삶의 수수께끼들을 해독하려는 시도들 이것이 바로 소설이 가진 고유한 충동인데 은 본질에 관한 추구, 즉 관습에 의해 정립되고 이미 익숙해진 낯설음에 그 자체로 소름끼쳐하는 이중적인 낯설음으로 나타나는, 바로 그러한 본질에 대한 추구로 이행해 갈 수 밖에 없다. 신소설의 반현실주의적인 계기, 그의 형이상학적인 차원은 바로 사회 안의 있는 소설의 (현실적인) 대상들, 즉 인간들이 그 안에 서로서로, 그리고 그 자신에게 찢겨져 나아간 그 사회적인 상황으로부터 야기된 것이다. (신소설들의 ) 미학적인 초월성 안에는 이렇게 세계의 탈마법화 (라는 요구) 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Von der Krisis der literarischen Gegenständlichkeit ist die Sphäre der Psychologie, in der gerade jene Produkte sich häuslich, wenngleich mit wenig Glück einrichten, nicht ausgenommen. Auch dem psychologischen Roman werden seine Gegenstände vor der Nase weggeschnappt: mit Recht hat man bemerkt, daß zu einer Zeit, da Journalisten ohne Unterlaß an den psychologischen Errungenschaften Dostojewskys sich berauschten, die Wissenschaft, zumal die Psychoanalyse Freuds, längst jene Funde des Romanciers hinter sich gelassen hatte. Übrigens hat man wohl mit solchem phrasenhaften Lob Dostojewsky verfehlt: soweit es bei ihm überhaupt Psychologie gibt, ist es eine des intelligiblen Charakters, des Wesens, und nicht des empirischen, der Menschen, so wie sie herumlaufen. Und gerade darin ist er fortgeschritten. Nicht nur, daßalles Positive, Greifbare, auch die Faktizität des Inwendigen von Informationen und Wissenschaft beschlagnahmt ist, nötigt den Roman, damit zu brechen und der Darstellung des Wesens oder Unwesens sich zu überantworten, sondern auch, daß, je dichter und lückenloser die Oberfläche des gesellschaftlichen Lebensprozesses sich fügt, um so hermetischer diese als Schleier das Wesen verhüllt.  Will der Roman seinem realistischen Erbe treu bleiben und sagen, wie es wirklich ist, so mußer auf einen Realismus verzichten, der, indem er die Fassade reproduziert, nur dieser bei ihrem Täuschungsgeschäfte hilft. Die Verdinglichung aller Beziehungen zwischen den Individuen, die ihre menschlichen Eigenschaften in Schmieröl für den glatten Ablauf der Maschinerie verwandelt, die universale Entfremdung und Selbstentfremdung,fordert beim Wort gerufen zu werden, und dazu ist der Roman qualifiziert wie wenig andere Kunstformen. Von jeher, sicherlich seit dem achtzehnten Jahrhundert, seit Fieldings 'Tom Jones', hatte er seinen wahren Gegenstand am Konflikt zwischen den lebendigen Menschen und den versteinerten Verhältnissen. Entfremdung selber wird ihm dabei zum ästhetischen Mittel. Denn je fremder die Menschen, die Einzelnen und die Kollektive, einander geworden sind, desto rätselhafter werden sie einander zugleich, und der Versuch, das Rätsel des äußeren Lebens zu dechiffrieren, der eigentliche Impuls des Romans, geht über in die Bemühung ums Wesen, das gerade in der von Konventionen gesetzten, vertrauten Fremdheit nun seinerseits bestürzend, doppelt fremd erscheint. Das antirealistische Moment des neuen Romans, seine metaphysische Dimension, wird selber gezeitigt von seinem realen Gegenstand, einer Gesellschaft, in der die Menschen voneinander und von sich selber gerissen sind. In der ästhetischen Transzendenz reflektiert sich die Entzauberung der Wel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