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생각하는 양반은 많은 토지를 가지고 떵떵거리면서 소일하고 벼슬하는 사람이지만 실상은 조선시대 양반들도 살기가 참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다.

박지원의 양반전에서도 나오지만 양반으로서 지켜야 할 체통이나 위신 이런 품위유지를 하는 것도 어려웠고 평생 글을 읽고 배워야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양반은 과거에 급제를 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현달해야만 가문의 영광이요 양반 집안으로서 제대로 행세를 할 수 있었기에 

모든 양반들은 과거 급제가 필생의 과업이었다.

하지만 과거는 매년 있지도 않았지만 문과 급제자는 조선시대 804회의 과거시험중 15천명 정도가 문과에 급제하였고 무과는 이보다 많은 수가 급제를 하였지만 500년 동안의 급제자 수를 생각하면 3-4만명정도만이 급제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오늘날의 사법고시에 버금가는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 명문가로 일컬어지는 유명 가문들도  500년동안 급제자가 400-100명 사이를 왔다갔다 할 정도이며 웬만한 가문은 500년동안 수십명 내외의 사람만이 급제의 영광을 안을 수 있었다.


통상적으로 명문가로 대우를 받으려면 3대조 안에 문과 급제자가 나와야 인정을 받거나 중시조등이 재상의 벼슬을 해야만이 그래도 지체높은 가문으로 인정 받았었다.

그도 아니면 토지라도 많아야만 체통이 섰지만 재력으로 행세하는 양반은 급제자가 많은 집안과는 격을 같이 할 수가 없었다.


보통 양반집 자녀들이 과거시험 공부를 하다가 문과 급제가 어렵다고 생각하면 상대적으로 쉬운 무과로 진로를 바꾸어 급제를 하기도 하였는데 재력이 약한 양반들은 이과정에서 재산을 다 날려먹기가 일쑤였다.


과거 공부하는데도 돈이 들지만 그보다는 지방에서 한양까지 과거를 보거나 시험 정보를 얻으려고 채비를 하는데 노비나 친구와 동행하면서 드는 돈이 적지 않았고 한양에 당도 했어도 국가에 어떤 일이 생기면 과거가 한 두달씩 연기가 되면 한양에서 체류하는데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통상 과거 급제는 빨라야 20대 후반 아니면 30대 후반까지 가는데 30대 중반에 급제하는 것도 그다지 늦은편이 아니었으니 얼마나 시험이 어려웠는지 알만 하다.


그러나 10년 이상의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급제를 해도 바로 실직으로 발령이 나는 것이 아니었다.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급제를 하고서도 벼슬을 얻으려고 권문세가에 줄을 대거나 돈을 바치는 경우가 있었는데 우리나라도 몇달에서 몇년을 기다리는 경우가 보통이고 때로는 인턴을 하면서 기다려야만 하였다.


하지만 고대하던 벼슬을 한다해도 녹봉이 워낙 적어서 겨우 입에 풀칠 할 정도에 불과하고 자주 임지를 옮기기에 가족들을 데리고 다니기도 어려우니 두집 살림을 해야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비리나 투서 또는 탄핵 실수등으로 유배를 가거나 삭탈관직을 당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였고 이런 경우는 특히 집안이 한미한 경우는 재기 불능일 경우가 많았으며 한직만 돌다가 벼슬살이를 끝내는 경우도 많았다.


과거에 급제를 했어도 양반들은 자식들이 또 과거시험 준비를 해야하기에 자신의 경우처럼 많은 비용이 소요되고 같은 과정을 거쳤는데 

그저 밥술이나 먹을정도의 토지만 소유한 양반의 경우 2대를 내리 급제를 했다해도 토색질을 하거나 뇌물을 받지 않으면 있던 토지를 다 팔아먹고 빚만 남아 손자대에는 과거시험을 준비할 능력이 안되어 몰락 양반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러기에 조선조 명문 거족들 집안에서 급제자가 많이 나오는 것도 이러한 경제적 차이때문인 부분도 있으며 평민이나 중인등의 계층에서 과거 급제하기가 어려운 것이 신분의 제약이 아닌 경제적 문제인 경우가 대다수인 것이다.


벼슬을 하더라도 고관으로 승진을 하고 요직을 거쳐야 재물을 모을 수 있는 기회도 있고 임금으로부터 포상을 받아 재산을 늘리거나 인맥을 쌓아서 자녀들이 급제하고 승진하는데 덕을 볼 수 있는데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급제한 양반들은 그러한 혜택에서 소외되기 마련이어서 능력을 입증할 기회조차 가지기가 어려운 현실이었다.


그렇기에 국가 기강이 조금만 무너지면 탐관오리가 기승을 부릴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고을 수령으로 가면 자신이 과거 준비에 들인 돈을 벌충해야 할뿐 아니라 자기 자식들이 과거준비를 할 수 있는 비용에다 노후까지를 생각하면 백성을 수탈하거나 뇌물을 받거나 비리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기가 어려운 것이다.


조선시대 당상 선전관에다 종 3품 부산진 첨사까지 지내고 자식 역시 급제하였던 노상추가 쓴 60년 일기를 보면 부친으로부터 밭 아흔마지기를 물려받은 그가 말년에  빚독촉을 심하게 받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도 중견 벼슬자리를 하고 자식 역시 급제를 한 양반이 이런 정도이니 조선시대 양반 노릇도 쉬운 것은 아니었고 몰락한 양반 역시 수도 없이 많았으리라 짐작이 된다.


어느시대이고 돈이 없는 사람이 행세하고 인정받고 살기는 쉽지 않은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