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차단기동이 문제인가?

먼저 차단기동이라는 것을 적 함정 앞에다 배를 대고 가로막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1차 서해교전때는 남북 어선이 뒤 섞인 가운데 사격이 어려워 몸싸움을 하듯이 하다가 우리 함정이 북한 함정을 들이받아 올라타는 상황속에서 다른 참수리 고속적이 북한함정을 충돌하자 빠지면서 북한 함정이 기울면서 사격을 하자 전투가 개시된 것입니다.

 

통상 차단 기동은 2-3키로 사이 거리를 두고 적 함정의 진로를 방해하거나 30노트의 우리함정의 빠른 속력을 이용하여 20노트에 불과한 북한 함정의 꼬리를 물면서 위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단 기동 자체가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거리가 멀어서 수동인 북한 함정으로서는 우리 함정을 맞출 수가 없고 함미에 붙었을 때는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차단기동이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잘못된 차단기동이 문제인 것입니다.

 

4. 현장 전투나 지휘는 적절했는가?

 

당시 편대장이 탄 358정이 선두에 서고 그 뒤를 357정이 따르다가 북한 684함에게 옆구리를 노출하자 684함이 357 정의 조타실을 정조준하여 사격하는 것으로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우리 고속정과 북한 함정의 거리는 150미터 속도는 6노트였습니다.

연평해전의 문제는 바로 150미터까지 접근을 하고 그것도 시속 6노트의 저속으로 기동하는 것이 누구의 명령이냐는 것입니다.

현장 편대장의 임의 행동인지 2함대나 해작사 합참의 명령인지를 파악해야 하는데 아무도 여기에 대하여 말하는자가 없습니다.

 

군사 전문가 김종대씨가 당사자를 면담한 내용에 따르면

당시 해군 작전사령관이었던 문정일 전 해군참모총장은 "도대체 왜 그런 기동이 있었는가?"라는 나의 질문에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고 증언했다. 그에 따르면 어떠한 작전 교리, 지침, 예규, 교전수칙에도 접적수역에서 최저 속도로 적 함정에 근접기동하라는 이야기는 없었다.

 

더 황당한 일은 지금은 작고한 정병칠 당시 2함대 사령관이 나에게 증언하기를 자신은 "적 함정과 3km 거리를 유지하라"고 지시했다는 거다. 그런데 어떻게 불과 150m 앞이라는 섬뜩한 거리까지, 그것도 최저 속도로 기동했는지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합참 지휘부 역시 자신들은 그러한 명령을 내린적도 없고 점심 먹으로 밖으로 갈 정도였다고 여러증언등을 살펴보면 당시 2함대 사령관은 잠시 지통실을 비우고 사령관실에 가 있었는데 이때 교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상황이 전투를 예상할 만큼 급박하거나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는 것인데 해군에서는 그러한 명령을 내린적이 없다면 결국 합참에서 육군의 전선 방어 개념에 입각하여 배로 밀어내라는 근접차단 명령을 내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합참의 지시가 아니라면 당시 편대장이 그러한 기동을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당시 교전시 현장에는 우리 고속정 8척이나 있었고 적함 근처에 두척이 있었는데 제대로 응사를 못합니다.

358정은 전투가 개시되자 응사를 하려 했으나 357함에게 가려서 응사를 제대로 못했다고 하지만 전투개시 순간은 그렇지만 바로 전속으로 방향을 틀면 10분이 넘게 지속된 전투상황 속에서 바로 357정을 지원하지 못했다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으며 근처에 있었던 다른 고속정 역시 응급 지원이 안되었는지 아무런 자료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초계함이 12키로 후방에 있었는데 북한의 실크웜의 움직임이 포착되어 전진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애초부터 고속정을 지원 할 수 없을 만큼 원거리에 있었던 것이 문제입니다.

1차 교전 당시에는 초계함이 인근에서 바로 전투에 가담을 했는데 이번에는 왜 그렇게 백업할 수 없는 거리에 있었는지도 밝혀진바가 없습니다.

추가

 백보를 양보해서 김대중의 햇볕정책 때문에 대응이 무디어졌고 군인들의 기강이 해이해 졌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런 주장을 하시는 분들은 화해 정책을 폐기하고 대북 강경노선을 고집한 이명박 정권은 왜 천안함 침몰을 당했고 휴전후 최초로 우리 영토에 포탄이 떨어져도 보복공격 하나 못하고 당했는지

노크 귀순할때까지 군기강은 안잡고 뭐하고 있었는지  총기난사는 왜 일어났는지  대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5. 희생자에 대한 예우는 적절했는가?

희생자에 대한 예우로 국민 정서를 건드리는데 이건 아주 상대적인 것입니다.

몇 명이 죽은 경우 어떤 상황인 경우에 대통령이 참석해야 할까요?

그리고 예우라는 것은 어느정도가 되어야 만족할 수 있을까요?

한상국 중사의 유족이 당시 정부에 대하여 아주 서운한 이야기를 하고 보수측에서 그것을 이용하는데 당시 한중사 부인은 단기 비자로 나갔었고 서운한 것이야 개인의 주관적인 것이니 남편을 잃은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마는 객관적으로 예우가 부족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북한과 교전등으로 인한 전사자의 영결식은 군 의전 관례상 주관자보다 높은 상관이 참석하지 않는 것이었기에 그렇습니다.

수천명이 사망한 월남전 참전 용사 역시 마찬가지이고 강릉 무장공비 침투로 전사한 사람들 역시 육군장이었기에 국방장관등도 참석하지 않았고 연평해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상황을 볼 때 그것은 합당한 것입니다.

앞으로 3명이 죽어도 대통령이 참석할 것인지 한명이 죽으면 또는 매년 다섯 여섯 번의 분쟁이 있으면 그때마다 참석해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군인은 나라를 지키다 전투가 발생하면 싸우다 죽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 경우 정해진 규정에 따라 장례를 치르면 되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더 많은 군인이 전사해도 아무런 말이 없다가 왜 김대중때 새삼 그것으로 시비를 거는지 더욱 소위 보수층에서 대통령 할 때는 참석도 안하던 사람들이 말입니다.

이런 행태가 바로 소모적인 정쟁의 대표적인 것입니다.

 

또 월드컵 보러 갔다고 하는데 설마 김대중이 축구 광이라서 월드컵 경기보고 폐막식에 참석을 했을까요?

공동 주최국으로 개막식은 한국에서 폐막식은 일본에서하고 겸하여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김대중은 아침에 일선의 우발적인 사건이라는 북한의 유감표명을 사과로 받아들이고 비서실장을 보내어 영결식에 참석시키고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병원에 가서 부상 장병들을 위로하고 나중에 희생자 가족들을 청와대로 불러서 오찬을 함께하며 위로하였습니다.

 

더 이상 무엇을 하라는 말인가요

추가

천안함 희생자에게 무공훈장을 주었는데 그 전사자의 자녀나 조카들이 아버지나 삼촌은 어떻게 하다 무공훈장을 받았나요

얼마나 용맹하게 싸우셨나요? 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티브 보다 칫솔질하다 전화하고 있는데 북한 잠수함의 공격으로 돌아가셨다라고 대답을 해야 한다면 이게 오히려 수치 아닌가요?

또 웃기는 것이 이제와서 승전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김대중 정권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보수층에서 난리인지

진 싸움이 새로 밝혀진 것도 없는데 나중에 이겼다고해서 승전이 되는건지

저런식으로 상황에 따라 정치적으로 움직이는 장군들 때문에 387정이 희생된 것이라고 봐야지요

 

6. 보상이 적었는가?

나쁜 인간들은 3천만원만 보상했다고 하면서 심지어 조선일보등은 우회적으로 그런식의 이미지를 덧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보상액은 애초에 미국으로부터 사망자에 대한 보상금까지 받았으면서도 월남전으로 인하여 거액의 보상금을 주어야 하는 상황에서 주지 않으려고 박정희가 군인 보상법을 순직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법적 근거가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법으로 불가능하기에 민간 모금을 통하여 1인당 4억원을 지급하였는데 천안함 희생자들이 5억을 받은 것을 생각한다면 화폐가치를 따진다면 당시 상황에서 4억의 보상과 매달 한중사의 경우 250만원의 보훈 연금을 받는 것은 희생자에 대한 예우가 나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강릉 무장공비 사건당시 희생자들은 국민성금도 없이 3천만원 받고 끝났고 부상자나 참여자등은 문책받고 예편하였습니다.

2함대 사령관은 당시 패배로 인식되었기에 예편되거나 좌천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1차 해전당시 박정성 2함대 사령관 역시 북한 눈치봐서 예편되었다고 하는데 해군의 중장 대장 자리가 몇 개인지를 생각한다면 다른 요인도 봐야 하는 것입니다.

  seo.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