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지하는 바와 같이 결정론에서 개인의 행동을 결정하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환경과 유전인자이다. 그런데 환경은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의 주변에 주어진 것이다. 유전인자 또한 태어나면서 그냥 주어진 것이다. 그러니 개인의 행동은, 비록 그것이 그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실은 자신도 어찌할 바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어떤 힘에 의해 이미 사전적으로 결정된 것이라는 얘기다. 착한 행동이든, 흉악한 행동이든, 그것은 이미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질 수 밖에 없도록 각 개개인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2.

이렇게 설명을 하면, 꼭 이런 질문을 하는 학생이 나온다. “그러면 결정론에서는 흉악범들의 잘못된 행동이 그들도 어찌할 수 없는 어떠한 힘에 의해 나온다는 것인데, 그러한 이론에 따르면, 누구의 잘잘못도 따질 수 없으니 결정론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 이에 대해 결정론자들은 어떠한 논리로 설명하고 있느냐.”

 

3.

대답은 엿이나 처먹으라는거다. 철학은 윤리가 아니다. 결정론자들은 당연히 그리 되어 있으니 그리 되어 있다고 설명하는 거다. 그로 인한 사회적 영향? 그런 것은 철학자가 대답할 문제가 아니다. 철학의 문제를 논의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떠한 철학사상이 있는 그대로의 것을 엄밀한 논증에 의해 설명하고 있느냐의 문제이지, 논증의 결과에 따른 책임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꼭 븅닭같은 질문을 하는 학생들이 한 둘씩은 있다. 영리한 학생이라면 어째선 환경과 유전인자가 개인의 행동을 결정짓는 전체적 요인이 아닌지 찾아 나설 것이다.

 

4.

가령 영화 국제시장이 있다. 이 작품을 놓고 잘 만들어진 영화다, 아니다 하는 논쟁이 시작된다. 물론 이것은 영화적 관점에서다. 영화의 구성과, 배경, 음악, 스토리의 전달, 공감의 도출, 주로 이런 것들이 영화적 관점에서의 평가일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얘기는 다른 곳으로 튕기쳐나간다. 그 영화는 적어도 4.19 혁명과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의 내용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거다. 해당 시대를 살면서 좋은 영화라면 이런 부분을 누락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좋지 않은 영화라는 것이다. 논점은 이탈하고, 좀 더 심한 븅닭들은 4.19 혁명이 옳으니 옳지 않으니 하는 문제까지 썰전을 벌인다.

 

5.

은희경의 작품에 대해 얘기했을 때, 은희경이 실존철학이 어떠한지, 혹은 바람직한 형태의 것인지 아닌지는 논외의 문제이다. 그녀의 작품이 좋다고 말하는 것은, 현대인이 느끼는 실존적 위기의 문제를, 문학이라는 형태로 잘 소화내냈다는 것이다. 즉 잘 묘사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심정적 동조를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내 개인에게는 그녀의 작품이 뛰어난 작품이라는 거다. ‘일상에 갇힌 현대인의 소외라는 테마에 관한 그녀의 생각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처음부터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는 거다.

 

6.

갑자기 실존이니 본질이니 하는 얘기가 터져 나온다. 논의의 초점과는 관계없는 얘기로 선회한다. 한발 더 나아가 서구적 실존주의 사고에 대한 비판, 심지어는 카프카의 작품에 나타난 실존적 사고에 대한 한계까지 규명하자고 든다. 카프카가 현대인의 소외를 그런 관점에서 보았다는 것이고, 또 여기에 나름 많은 사람들의 공감하고, 더우기 이를 공감시키는데 있어서 그 묘사의 방법이 훌륭하여 좋은 작품이라는 것인데, 그의 작품에 나타난 실존적 한계에 대해 논의하자고 하면, 그런 것은 철학교실로 가져가라는 거다.

 

7.

은희경이 어떠한 철학적 사고를 담아내고 담아내지 못하고 따라 그의 작품이 좋아지거나 나빠진다면, 그것은 이미 문학적 영역의 논의가 아니다. 좋은 영화는 사실 소재거리와 일정한 거리만큼 떨어져 있다. 국제시장이 보수적인 관점의 영화이기는 하지만, 많은 진보주의자들에게도 칭찬을 받고 공감을 이끌어 냈다. 이 점에서 국제시장은 좋은 영화라는거다. 국제시장이 보수적인 사고를 담고 있어서 나쁜 영화이고, 진보적인 사고를 담고 있어서 좋은 영화라면, 그것은 이미 영화의 영역을 일정영역 벗어난 논의라는 거다.

 

8.

은희경의 작품에 대한 이번 논의는 여기까지이다. 그녀의 작품이 별로라는 많은 분들의 의견을 존중한다. 사실 그녀를 극찬할 때부터 그것은 상당부분 내 개인의 주관적인 부분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아내의 상자가 변신의 변주는 아니라는 미뉴에님의 의견 역시 존중한다. 베끼기라는 말 또한 지극히 주관적이다. 적어도 은희경에게 그런 말을 했다가는 아마 본전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문학적 논의가 무엇을 하는 곳인가? 자기의 주관적 평가를 말하는 곳이 아니었던가? 당연, “당신의 의견에 나는 동의하지 않소, 내 생각은 이러하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당신의 그런 생각은 잘못된 것이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9.

우연치 않게 만난 은희경의 아내의 상자는 반가운 존재였다. 덕분에 잠시 글질이라는 일탈을 할 수 있었다. 일탈은 즐거웠고, 이제 나는 다시 내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전처럼 나는 여전히 눈팅을 할 것이다. 지금처럼 가끔씩 일탈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행운이 자주 돌아올리 없다. 잠시 소소한 재미를 주신 그림자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