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천년세월님의 변신 vs 아내의 상자를 읽고 댓글로 달려다가 이야기가 길어질거 같아 별도로 올립니다


천년세월님 뿐 아니라 '아내의 상자'에 대한 평론가들의 논평에서도 느끼는바가 있어

먼저 실존의 개념에 대해 한번 생각해봅니다


실존이란 좀 거칠더라도 간략하게 규정하자면

존재를 규정짓는 제반 환경이나 조건들로부터 자유로운, 

순전히 독립적인 자유의지에만 근거하는 존재정도 아닐까 싶은데요

실존은 따라서 본질에도 우선하며, 세상은 근본적으로 부조리하다는 인식, 불확실 할수밖에 없다는 인식등이

여러갈래의 실존주의자들의 공통분모 정도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실존주의자들의 인식은 서구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기독교적인

소명의식 같은것에 대한 반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해봅니다

실존주의의 효시라 할수있는 키에르케골부터 우선 의미있는 인생을 살기위해 치열하게 살다가

그만큼 큰 좌절을 겪어면서 자신이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했던것들이 

한 개인, 독립된 자아로서의 자신에게는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깨달음. 머 그런거..

사실 당시 기독교, 교회가 한 개인의 자유를 얼마나 심하게 억압/구속하였던가를 상상하면

그런 생각이 자연스레 듭니다.


그런데 저는 이 실존에 대해 반발비슷한 의문을 가집니다

한 인간의 존재를 규정짓는 본질에 우선하는 실존이 본질보다 더 중요한가하는 의문입니다.

여기 '갑순'이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갑순이는 1995년 5월 6일 서울에서 김씩씩 과 이예쁜 이란 부부의 세째딸로 태어 났어며

현재는 강남대학교 전산학과 2학년 입니다. 보통 누군가를 간략하게 소개할때 우리는 이런식으로합니다.

한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를 일일이 다설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므로 그 인간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정보들, 바꾸어 말하면 갑순이의 본질을 가장 크게 반영한다고도 하겠습니다.

실존주의자들은 이러한 본질을 구성하는 조건/환경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그 자아가 원하는 삶이야 말로 참된 삶이라는 것인데요

본질로 부터 자유로운 실존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 본질로 부터 자유로운 실존은 과연 어떤의미가 있을까요 ?

한번들 생각해 보시기바랍니다.

뒤에 변신과 아내의 상자에서 아마 다시 거론될 것이므로...


약간 옆갈래로 빠져서...

실존이라는 개념은 한 독립된 '나' 또는 '자아' 또는 '영혼'을 전제로합니다

그러나 현대 인지과학이나 심리학등에서는 '나' 라는, 한 인간을 총체적으로 통제하고 규정하는 어떤 독립적인 것은 없다고합니다.

뇌세포들간의 연산이 있을뿐이라는 것이고 인간의 뇌를 상대로 여러가지 실험을한결과 내린 결론이라고합니다.

연산은 뇌세포에 전달된 각종 정보에 근거해 이루어지고, 그 정보들은 그 인간이 처해진 환경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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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카프카의 변신에 대해..


키에르케골의 실존에 대한 생각이 그렇듯

'변신' 역시 카프카의 경험, 특히 아버지와의 관계가 큰 영향을 끼쳤다고합니다

아버지와의 관계뿐 아니라  카프카가 산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카프카가 이소설을 통해 무슨말을하고 싶었는지는

쉽게이해가 가고 상당히 극단적인 설정 덕분에 그 메시지는 매우 강렬하고도 명확하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를 사는 제시각으로 살펴보면 좋게 말해도 그 메세지는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느낌입니다.


가브리엘 마르셀의 표현에 따르면 '존재를 드러나게 해주는 관계'인 가족 마저도 그들의 이해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면

아무 의미도 없어진다는 것을 그레고리를 집안의 대들보에서 흉물스런 벌레로 변신시켜 보여주는데요.

이 변신이 우선 너무 극단적이라 메세지의 타당성에 의문을갖게합니다

인간으로서의 그레고리와 벌레로 변신한 이후의 그레고리가 동일한 존재인가하는 겁니다.

그레고리의 입장에서는, 실존적으로 동일한 자아라는 주장이지만 사실은 그런 주장은 터무니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실제 벌레로서의 그레고리는 존재할수 없어며 따라서 벌레와 그레고리는 다른존재라는 겁니다


교통 사고나 병에걸려 더이상 돈벌 능력도 없이 가족들에게는 짐만될 지언정 여전히 인간 그레고리로 존재할때에도

과연 가족들이 소설에서처럼 그를 져버렸을까요 ?  물론 카프카의 아버지같이 져버리는 인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특수한 예외이고 오늘날 그런 행위는 몹쓸 짓으로 지탄받는것이 상식입니다.


흉물스런 벌레같은 인간으로 되었더라도 실존적 존재는 바뀌지 않았으니 여전히 예전의 그레고리처럼 대해주기를 기대한다면...

그런 실존적 존재(?)를 사회는 격리시킬수 밖에 없지않을까요 ? 연쇄 살인범의 실존을 격리시킬수 밖에 없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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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내의 상자'


변신과 비교한 천년세월님의 분석은 흥미있고 일정부분 공감도 갑니다

그러나 작가가 의도한것이 카프카의 의도와  같은것인지는 의문이고 그랬다면 저는 더 실망스럽습니다


우선 그레고리와 가족간의 관계와 아내 와 남편의 관계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레고리는 가족에게 일방적으로 주는관계이지만

아내와 남편은 상호 보완적입니다.

그레고리는 벌레라는 현실적으론 전혀 불가능한 변신을하지만

아내의 변신은 흔히 있을수있는 외도입니다

가족들이 벌레가된 그레고리를 버리는건 전적으로 이해관계 때문이지만

남편이 아내를 요양원에 데려다주고 갈라선 것을 전적으로 남편의 이기심이라고 볼수는 없습니다

남편이 부부생활을 유지하면서 적극적인 배려를하면 나아질수도 있겠지만 요양원이 더 나을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차이들은 실존적 시각으로보면 다 무의미합니다

그러면 이런 차이들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아내의 실존은 무었일까요?

제가  '아내의 상자'라는 단편은

"영혼이 휘발돼버린 뒤까지 살아있을때의 모습을 붙들고있는 시간의 검은 그림자, 꽃의박제"라는 

한 구절에 함축되어있다는 감상평 비슷한 댓글을 달았듯이 이 구절이 아내의 실존에 대한 정직한 묘사라는 생각입니다.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를가능성이 있고 평론가들이나 천년세월님은 아내가 '실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리되었다고  해석하는듯 하지만 저는 그 반대입니다.

아내라는 인물이 결혼이전이든 이후에든 어떤 '실존'을 원했는지, 그 실존을 위해 어떤 노력을했는지는

남편뿐 아니라 작가인 은희경씨 까지 포함해서 아무도 모르고 알길도 없습니다

다만 아무런 설명도 전제도 없이 던져진 인용한 한 구절 만이 반짝 반짝, 무슨 신호를 보내듯 반짝이고 있습니다.

저는 은희경씨가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쓴글이라기 보다는 어느날 문득 떠오른 사념하나(인용한 구절)를 

한 작품으로 엮어내었다는 생각을 제 맘대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