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종교의 중요한 차이는 과학은 객관적 현상들의 관찰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려 하는데 반해, 종교는 주관적 진리를 정해놓고 객관적 현상들을 수집해 주관적 진리를 입증하려 한다는 점이다. 진영주의도 종교와 유사한 경로를 걷게 된다. 진영주의에 빠지면 상대진영은 척결해야할 대상이니 무조건 흠을 잡아야 하고 우리진영은 무조건 감싸줘야 한다는 맹목주의에 빠지게 된다.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고발하기 위해 현상금까지 걸고 자료를 수집하고 다니는 요즘 강용석의 짓이 요런 거다).


우리사회에서 진영은 늘 존재해왔다. 진보와 수구, 환경주의와 개발주의, 영남과 호남, 친노와 반노, 황빠와 황까, 마초와 페미니즘 등 대립이 있는 곳에는 늘 진영이 존재한다. 진영의 생성은 자연스런 현상이기에 문제가 아니지만 진영주의는 문제가 된다. 


연예인과 정치인의 우상화에 있어서도 이 현상은 적용된다. 예를 들면, 노무현을 숭배하기 때문에 노무현의 행보를 무조건 지지하는 노빠(종교적 친노)도 있고, 노무현의 잘잘못을 분별 있게 구별하지만 그럼에도 종합적으로 판단해 상대적으로 노무현을 지지하는 (합리적) 친노도 있다. 같은 맥락으로 반노에도 합리적 반노가 있고 종교적 반노도 있다. 분별 있게 비판하면 합리적 반노지만,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면 종교적 반노고, 비판을 넘어 단지 같은 반노라는 이유로 수구진영까지 지지하게 되면 수구적 반노가 돼버린다.   


단순한 선택의 문제에서 진영주의 전략을 쓴다면 그런대로 큰 문제는 없겠지만 사실과 공정함이 필수적인 가치판단의 문제, 예를 들면 법적 문제나 정책적인 문제에서 이 전략을 쓰면 오류에 빠지게 된다.


논쟁을 하는 논객이 진영주의에 경도돼 있다면 논쟁에 질 가능성 뿐 아니라 억지를 부릴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주장의 논거가 이미 공정하거나 객관적이지 못한 데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진영주의에 자유로운 사람들은 진영주의자들하고 논쟁하다보면 상대가 진영주의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쉽게 포착하게 되며 논리 면에서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더 나가 논쟁의 쌍방이 진영주의자라면 결말이 날 수가 없다. 소경들이 코끼리 만지며 코끼리에 대한 논쟁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논쟁을 중단하는 것도 현명한 선택 중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