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국회에서 열린 ‘천정배의 11주 연속 금요토론회’에 갔다. 사회복지 정책의 철학적 토대라는 주제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4.29 재‧보궐선거 이후 천정배 의원이 품고 있는 정치적 구상을 듣고 싶다는 기대도 있었다. 발제 내용을 듣고 분위기를 느끼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웬만하면 발언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진보 성향 토론 발표자의 멘트를 지나치기 어려웠다. 그 발언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천정배 의원이 호남정치 복원이라는 목표를 내거는 것을 보면서 걱정을 했는데, 이번에 이런 토론회를 여는 것을 보니 안심이 된다.”

질의응답 순서에 나는 다음과 같은 요지로 발언했다.

“토론 발표자의 발언은 호남정치를 ‘호남자민련’으로 폄하하려는 의도 같다. 호남정치는 대한민국이 선진화 정상화되는 출발점이다. 호남 문제 해결 없이는 대한민국도 정상화되지 않는다.”

천정배 의원에게도 질문을 던졌다.

“천정배 의원은 유권자들이 자신에게 무슨 얘기를 듣고 싶은 것인지 생각하면 좋겠다. 천 의원을 지지한 유권자들에게 호남정당을 만들어야 하는지, 만든다면 어떤 원칙과 방법론을 통해야 하는지, 내년 총선에서 유권자들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밝혀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 이런 토론회를 여는 걸 보니 무척 한가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질문을 한 이유는 토론회의 주제와 발표자들의 면면, 발언에서 어떤 데자뷰를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진보 지식인들은 지역차별 문제를 거론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이런 담론을 꺼내는 사람들을 지역주의자로 몰아붙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역차별 문제에 대한 그들의 해답은 거의 스테레오 타입이다.

“지역 문제가 아닌 계급 문제로 풀어야 한다.”

계급 문제가 해결되면 지역차별 문제도 저절로 해결된다는 얘기인데, 도대체 그 계급 문제는 언제쯤 해결될 것인지 속 시원한 대답을 들어본 적이 없다. 지역차별 문제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질색을 하면서 다문화가정, 성 소수자 심지어 애완동물의 권리에 대해서도 왜 그리 감성 충만한 공감을 드러내는지, 왜 그 문제는 계급 문제가 풀릴 때까지 기다리면 안 된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진보 지식인들의 이런 기만성이 이번 국회토론회의 데자뷰를 낳았을 것이다.

지역차별 문제를 공론화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얘기가 “그런 얘기는 호남 출신이 아닌 다른 지역 사람들이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런 얘기를 한 사람들이 대부분 호남 출신 진보 지식인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심각한 자기부정과 검열, 노예근성의 발로이다. 자기 문제조차 자기 입으로 말 못하고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야 한다면 그 상태는 사실 노예라고 불러주는 것조차 과분하다.

천정배 의원이 신당을 만들 경우 가장 우려하는 것이 ‘호남 자민련’이라는 손가락질일 것이다. 이런 우려는 근거가 있다. 상당수 호남 유권자들도 ‘새로운 정당이 호남 정당이라면 지지하지 않겠다’는 뜻을 드러낸다. ‘호남 차별 얘기는 호남이 아닌 다른 지역이 해줘야 한다’는 자기검열이 작용하는 것이다. 끔직한 고립의 경험이 낳은 트라우마지만 이걸 벗어나지 못하면 호남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친노세력의 횡포 역시 호남의 문제를 다른 지역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겠다는 생각이 출발점이다. 정치인이 유권자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유권자들이 정치세력의 눈치를 보는, 세계 정치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기현상이 생긴 것이다. 친노세력과 그를 둘러싼 진보 지식인들의 호남에 대한 협박은 현재진행형이다. 호남의 위기라느니, 호남 사람 호남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느니 하는 발언들이 그것이다. 협박이 협박처럼 보이지 않도록 호남의 명망가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수법도 여전하다.

정치인의 존재 이유는 지지자들의 요구를 정치적으로 대변하고 정책으로 구체화하여 현실을 바꿔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호남신당은 천정배가 자신을 지지해준 유권자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출발점이다. 이것이 정치지도자로서 천정배에게 주어진 소명이자 기회이다. ‘호남’에 적대적인 진보지식인이나 ‘호남’을 부끄러워하는 호남 유권자들의 눈치를 보며 좌고우면하다 보면 그 소명을 잊기 쉽다. 그 결과는 새정치연합 친노세력으로의 투항일 가능성이 높다.

천정배에게 거는 기대만큼 우려도 크다. 정치 지도자는 정확한 판단력과 함께 온갖 어려움과 비난을 무릅쓰고 그 판단을 실행으로 옮기는 용기도 가져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