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신경숙 표절 사건이 터진 뒤 언론을 통해 여러 진단 및 처방들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 곧잘 보이는 주장들 중 하나가 아래와 같은 것.   


 이번 표절사건은 그간 한국문학계가 가지고 있던 <구조적 문제>가 표출된 것. 

  90년대 중후반 이후 지금까지 한국문학계는 창비-문지-문학동네, 이 세 메이저 출판사 외의 문예지들은 모두 몰락해온 가운데 창비-문지-문학동네 3대 메이저가 마피아적 패밀리주의를 방불케하는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런 구조로 인해 3대 메이저는 자연스레 독점적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고 (구조가 낳은 문제1), 이는 문예지들간의 상호견제기능의 소멸 혹은 약화라는 현상을 가져왔으며 (구조가 낳은 문제2) 또한 문단 내에선 이 세 출판사를 거치지 못하면 제대로 된 작가, 비평가로 인정되지 못하는 풍토가 형성되고 말았다 (구조가 낳은 문제 3). 마지막으로 이렇게 비평가/작가가 3대 메이저 문예지와 - 마치 악어와 악어새처럼 - 핵심이해관계를 같이하게 되다보니 권성우같은 예외적 비평가들 한 둘을 제외하면 어느 작가, 지평가도 이들 3대 메이저에 대항해 비판하지 않는 폐단이 생기고 말았다 (구조가 낳은 문제 4). 

 결국 신경숙을 포함한 유명한국작가들의 표절문제가 오랫동안 표면화되지 못하고 유야무야 넘어가게 된 것도 이런 구조가 낳은 폐단의 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여기까진 좋습니다. 필시 맞는 말일 거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또한 어떻게든 대책을 요하는 문제라는 점에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3대 문예지 메이저의 과/독점적 영향력의 근원을 문예지들의 '상업성' 추구에서 찾는 주장입니다. 예로 하나 인용하죠. 
 

 80년대를 지배하던 거대 이념이 쇠퇴하고 문예지마다 추구하던 선명한 이념도 사라지면서 이윤 추구가 그 공백을 메웠다. 90년대 초반 대중문학을 지향하며 등장한 문학동네(문동)가 문단 재편의 기폭제가 됐다. 이념적 색채가 짙은 창비도, 지적 엘리트주의를 내세웠던 문학과지성사(문지)도 출판상업주의의 길로 급선회했다. 출판상업주의가 문단 작동의 메커니즘이 되면서 문학 질서는 세 출판사를 중심으로 고착화돼 갔다.

 
http://media.daum.net/culture/others/newsview?newsid=20150625015955476
 

 
 제 의문은 이겁니다. 만약 이런 주장대로 정말 출판상업주의가 이들 3대 메이저의 생산/마케팅 방침을 결정짓는 주요 요인이라면, 한국문학이 고질병처럼 겪고 있는 상업적 부진은 어떻게 설명한 건가 하는 겁니다. 출판인 한기호의 말대로 이들 3대 메이저 문예지들이 밀고 있는 한국문단의 빅5작가 - 신경숙, 공지영, 황석영, 김훈, 박완선(작고) - 들이 새 작품들을 활발히 내놓고 또 이들 작품이 시장에서 <상업적 성공>을 화려하게 거두고 있는가? 그게 아니잖아요. 그게 아니면 참신한 신인들이 등장해서 신작들을 활발하게 쏟아내고 이 작품들이 시장에서 독자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는가? 그것도 아니거든요. 

 이를 감안하면 답은 아마도 둘 중 하나일 겁니다. (1) 한국의 3대 문예지들은 상업성을 추구하지 않거나, (2) 그게 아니라면 상업성을 추구하긴 하지만 경영감각이나 수완이 너무나 근시안적이고 무능하다보니 <문학적 성공>은 커녕, 상업적 성공조차 거두지 못하고 실패만 거듭하고 있다. 

 한국순문학의 <상업적 현실>이 얼마나 처참한 상황인지는 아래 한기호의 다음 글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나마 팔리는 소설은 지금까지 자신이 축적해놓은 ‘권위’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작가들의 작품이다. 이른바 ‘OOO표’ 소설들일 뿐이다. 그러다 보니 유명 문학출판사들마저 팔리는 작가들의 꽁무니를 쫓기에 바쁘다. 그들은 자기 회사만의 개성을 가진 작가들을 확보하지 못한 채 ‘잘 나가는’ 작가들의 책만 경쟁적으로 펴내다 보니 천편일률적으로 비슷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런 획일화된 기획은 결국 획일화된 독자만 양산한다. 독자들도 급격하게 소설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따라서 지금 잘 나가는 작가들의 권위도 급속하게 무너져가고 있다. 이런 식으로 앞으로 몇 년만 지나가면 아마 ‘팔리는 소설’은 모두 사라지고 없을 지도 모를 일이다.
 
 http://blog.naver.com/khhan21/220394640680


 
 이런  전 한국 문예지들의 상업성 추구를 비판하기 이전에, 왜 이들 3대 순문학 문예지들이 상업성 추구에서조차 지리멸렬한 실패만을 거두고 있는가부터 따져보는 것이 논의의 순서라고 봅니다.

 박철화 문학평론가가 이번 신경숙 사태를 두고 “사회적 대세에 질문하고 저항하는 게 문학의 가치인데 창비나 문지가 너무나 쉽게 문학의 상업성과 대중문학에 투항했다”고 말했다는데, 이 대목 읽는 순간 헛웃음이 나오더군요. 

 이런 하나 쓸데없는 공자왈/맹자왈 말씀이나 늘어놓는 이 문학평론가의 감각이야말로 구리고 시대에 한참 뒤떨어져 있어요. 구시대의 유물입니다. 

 한기호의 블로그 기사에서도 나오는 말이지만, 근대에 들어 서사예술의 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던 소설은 사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해 하위문화의 하나로 출발했습니다. 외국의 사례를 찾기 이전에 한국의 예만 봐도 김만중의 <구운몽>이 그러하고 허균의 <홍길동전>이 그렇습니다. 구운몽 읽어보신 분들은 다들 아실텐데 이 소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판타지-미소녀-하렘물입니다. 창작동기부터 그렇죠. 중국에서 수입되어 유통된 저런 서버컬쳐물 좋아하는 모친을 위해 김만중이 효도할 겸 쓴 소설이죠. 근대소설문학의 맡고 있는 그 본령의 기능, 사회적 대세에 질문하고 저항하는 것, 지적-윤리적 문제를 제시하는 것, 이런 기능이 잘 이뤄지려면 우선 그 토대인 소설의 <상업성>이 튼실하게 확립되어야 합니다. 이게 안되는 이상 뿌리가 부실한 나무와 다름없는 것. 

 해서 우선 물어야할 질문은 왜 한국의 상업적 장르문학은 일본산 상업장르문학에 점령되어버렸는가?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 토대부터가 허술한데 무슨 수로 <사회적 대세에 저항하는> 본격문학이 잘 굴러갈 수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