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는 역사발전이라는 관점에서 고대 신정일치 왕정으로부터 현대의 민주주의로 이어지기 까지 사회의 리더가 신경써야 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갈수록 요구되는 정치분야에서의 능력치 또한 비례해서 높아져감을 얘기했었다. 가장 고도화된 민주주의 정치체제에 대해 좀더 살펴볼 내용이 있어 이글에서 언급하고자 한다. 이글 역시 이전글과 마찬가지로 이글을 읽을 독자들에게 역사발전에 있어서 정방향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판단자료를 제공하고자 하는 목적을 담고 있다.

민주주의가 처음 등장한 나라는 BC 508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로 알려져 있다[1].  넓은 범주에서 볼때 민주주의라 볼수 있는 몇가지 사례가 고대 그리스 이전에 부족단위로 시행된 적도 있었다는 주장도 있긴 하지만 민주주의 Democracy라는 단어가 그리스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상징하듯 서양역사상에 현대 민주주의체제의 원형이되는 결정적인 정치체제를 만들어낸것 만큼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공으로 돌려야 할 듯하다. 

민주주의 Democracy란 단어는 두개의 그리스 단어 demos + kratos의 합성어이다. Demos는 도시국가의 성인남성 원주민을 의미하고, Cratia는 힘이라는 뜻을 가지며 이 둘을 합해서 대중들의 힘이라고 해석할수 있다. [2]. 다시말해서 국가 대사의 결정에 관련해서 대중들이 참여하는 정치 체제를 의미한다. 여기에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전설적인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체제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기해 한번 음미해볼만 하다.

"...
우리의 정치체제는 이웃의 관례에 따르지 않고, 남의 것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들의 규범이 되고 있습니다.  그 명칭도, 정치 책임이 소수자에게 있지 않고 다수자 사이에 골고루 나뉘어 있기 때문에 democracy 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분규와 관련해서는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며, 이와 동시에 개인의 가치에 따라, 즉 각자가 얻은 성망에 기초하여 계급에 의논하지 않고 능력 본위로 공직자를 선출합니다.  그리고 국가에 뭔가 기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가난 때문에 이름도 없이 헛되이 죽는 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공직에 종사하고, 서로 일상생활에 힘씁니다.  서로 질투에 찬 감시를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이웃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든 무례해 보이는 손해행위를 하든, 심지어 명백한 형벌 없이 위해를 가하든 우리는 분노하지 않으면서 그대로 방치해두지도 않습니다.  악의를 갖고 개인의 일에 간섭치 않고, 두려움을 품고 마땅히 공적인 일에서 법을 어기지 않으며, 언제나 법과 판사를 존중하고, 특히 학대받는 사람을 지키는 법과 모두에게 수치를 가르치는 불문율에 유념하고 있습니다.
...
" [3]

고대 아테네에서 개화했던 민주주의의 정도만큼 민주주의를 할수 있었던 나라는 근대이전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를 찾기 어렵다. 동양에서는 오로지 왕만이 자신의 주인이었고 국민들은 왕의 소유물에 지나지 않는 지위에 있었다. 국가 대사는 오직 왕의 의지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 아테네서만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가 나타날수 있었던 것일까? 고대 그리스가 민주정으로 나아가게 되는 과정을 잘 소개해놓은 사이트를 참고하면 좀더 배경을 잘 이해할수 있을 것이다. [4] 

이글 첫부분에서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정치력이 요구된다고 언급했었는데 그렇다면 고대 아테네의 정치가들의 정치력이 월등했었다는 얘기로 연결될수 있게 되는데 이글을 읽는 독자들은 이러한 추론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짧게 결론을 얘기하면 필자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가들이 고도의 정치력을 갖춘 인물이었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능력을 갖출수 있었던 원인으로 다양한 원인을 들수 있을 것이지만 (참조[4]) 개인적으로 볼 때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가 있으니 클레이스테네스가 개혁활동을 통해 귀족들의 기반을 말소시킴으로써 가능해진 민주주의 초기 단계가 곧바로 시들지 않고 생명력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고대 그리스에서 번성했던 철학과 수학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민주주의 발전과 함께하는 철학과 수학 발전

고대 그리스에서 유명한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피타고라스는 생애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진 않지만 대개 기원전 580년 경부터 기원전 490년 경까지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에서 민주주의가 탄생한 연도와 비교하면 피타고라스의 활동이 먼저였다는 점을 알수 있다. 피타고라스의 성과물로 알려진 것들이 거의 대부분 그의 사후 오랜세월이 지난후 글로 남겨져서 종종 그 사실 여부가 의심되기는 하나 피타고라스 학파로 알려지는 집단이 이룩한 수학과 철학분야의 결과물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르러 서양철학의 시원을 갖추게 되었다는 점에서 피타고라스가 후세에 미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피타고라스가 관심을 가졌던 수학분야에서의 성과물은 민주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철학의 생성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이 숫자로 이루어졌다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더 나아가 숫자라고 하는 절대적인 기준에 의해 세상을 이해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음악에서 커다란 발견을 해 냈는데 현악기에서의 만들어 낼수 있는 음정들 사이에 정수비를 발견해내었고 세상에 숨겨져 있던 규칙을 수치개념으로 찾아 내었다. 이러한 수와 비례의 관계를 통해서 세상을 숫자로 파악하려는 관점을 갖게 되었는데 이러한 철학은 모든 이들에게 분명한 방식으로 이해될수 있었고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줄수 있게 된다. 바로 여기서  민주주의 체제를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철학 다시말해서 모두에게 동의를 구할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는 시도가 가능함을 엿볼수 있었던 것이다. 

 국가의 다수인 대중에 의한 결정이 가능하다고 보는 민주주의에서는 보다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야 중대 대사의 결정이 가능한 정치체제가 된다. 이해관계자들 중 어느 한편에 편협되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적인 가치 판단기준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절대적인 판단기준을 가지로 추론해서 문제점을 판별해 내고 대책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고도의 정치력이 요구되는데 그러한 정치적인 내공을 가능하게 해주는 지식적인 수양이 바로 수학과 철학으로 부터의 탄탄한 논리로 부터 얻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볼때, 민주주의 체제를 오래토록 유지할수 있게 만드는 근본 요인이 수학과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피타고라스와 같이 절대적인 가치 판단 기준을 찾으려 한 철학자들의 노력은 이 철학을 받아들인 페리클레스와 같은 정치가들에 의해 실제 정치에 이식되었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져 대중들에게 전파되었다.


정리하면 민주주의는 다수의 이해관계자들의 갈등을 조율할수 있어야만 유지될수 있는 고도화된 정치체제이다. 이러한 고도의 정치체제를 유지할수 있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가치판단을 제공해줄수 있는 철학의 발전이 담보되어야 한다. 다시말해서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논리를 끊임없이 개발해 내야 결정이 이루어지는 고도의 정치력이 리더에게 요구된다고 할수 있다. 

한국은 20세기초까지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왕정으로 수십세기를 어어져 오다가 해방후 미국에 의해 민주주의가 강제 이식되었다. 따라서 국가구성원중 누구도 민주주의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었고 지금도 진정한 민주주의를 해나가는데 걸림돌이 많이 남아있다. 필자의 이전글에서 역사발전의 순방향은 국가 대사 결정과 관련에 이해관련자들의 수가 많아지는 방향임을 보였다. 한국은 직접민주주의보다 간접민주주의를 채택했기에 대사 결정에 모두가 참여하지는 않고 있다 하더라도 권한을 위임받은 정치인들이 적어도 보다 많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도록 국가체제가 만들어져 있다. 과거 왕정보다는 보다는 정치인들이 고도화된 정치력을 요구받고 있다. 이들 정치인들에게 있어서 보다 많은 이들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키기 위해 한층 힘든 정치력이 요구되고 그런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공정하고 편협되지 않는 논리로 무장하고 있어야 한다.

어느 누구에게 편협하지 않는 공정한 논리를 긍정한다면 요즘 정치인들 또는 이해당사자들 사이에서 흔히 보이는 이중잣대는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논리가 된다. 이중잣대는 어느 한쪽에게 편협되게 유리하고 다른 편에게는 불리하게 논리를 적용하기에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을 막고 결국 갈등을 키우게 만들며 불신과 분열을 끊임없이 조장하게 만든다. 바로 논리가 그 자체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편협한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위해 인위적으로 조작될수 있는 하위개념으로 전락시키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잣대는 현실의 한국에서 부당한 이득을 보고 있는 경상도 인들에게서 흔히 보여지는 것들이다. 호남에게 배타적인 경상친노들이 표를 호남에서 구걸할때 적용하는 논리가 바로 이중잣대이다. 박정희가 개발독재를 통해 경상도를 살찌우고 호남을 빈곤하게 만든 것을 경제발전의 공이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 이중잣대이다. 국가의 상당한 자원을 경상도에 퍼부으면서도 대한민국을 내세우며 힘을 합쳐야 한다고 할때 우리는 역겨운 이중잣대를 발견하곤 한다.  이익은 사유화 피해는 사회화라는 말이 있는데 전형적인 이중잣대로 이러한 것들이 하나 둘씩 쌓일 때마다 국가는 분열하고 불신은 커져 갈수 밖에 없다. 다시 한번 묻지 않을 수 없다. 경상도는 민주주의를 할건가 말건가? 


[1] :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democracy
[2]: http://web.stanford.edu/group/dispersed_author/docs/OriginalMeaningDemocracy_Ober.pdf
[3]: http://sunnymean.blogspot.kr/2011/12/blog-post.html
[4]: 클레이스테네스, 시민개념을 바꾸어버리다. http://historia.tistory.com/6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