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입니다.

조선을 건국한 주축 세력이 바로 사대부였습니다.

그러나 고려를 지키려고 한 사람들 역시 귀족들은 물론 사대부였습니다.

목은 이색이나 정몽주는 고려라는 왕조의 틀 안에서 개혁을 하려했던 사람들이고 정도전 남은 조준등은 새왕조를 통한 개혁을 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연산군 중종때로 가면 갑자기 훈구파와 사림파의 다툼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훈구파는 어떤 사람들이고 사림파는 어떤 사람들일까요?


훈구파는 말 그대로 조선 건국과 이방원의 쿠테타 세조의 쿠테타 과정에서 공신으로 책봉되어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훈구파 역시 대다수는 사대부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면 사림파는 어떤 사람들일까요?


통상 사람들은 조선을 건국한 사람들은 지방 향리출신 사대부로 주축이된 세력이라고 알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도전은 형부상서가 아버지였고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사대부 출신이거나 중앙 귀족출신들이 많습니다.

실질적으로 사대부라는 말 자체가 선비와 대부를 통틀어서 일컫는 말이고 고려시대 대부는 정5품관 이상에게 쓸 수 있는 칭호였습니다.


그러면 훈구파와 사림파는 어떻게 나누어졌을까요?

기본적으로 사림파들은 지방 촌락에 은거하여 학문을 수양하며 백성을 교화하던 세력으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서울의 문벌 귀족들이나 대지주가 많았으며 자신의 출신 지방에 근거지가 있으면서도 도성으로 왔다갔다하거나 도성에서 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그들의 물질적 토대는 훈구파와 다름없이 토지와 노비였으며 지방 중소지주가 아닌 대지주들이 주축을 이루었습니다.


결국 사림파와 훈구파의 다툼은 관직과 토지를 두고 다툰 신흥 세력과 기득권 세력 그리고 의리와 명분을 내세운 사림파들의 훈구파들의 쿠테타등으로 인한 출세와 관직의 독점등에 대한 공격이었습니다.


사림들이 부자였던 사실은 사림의 거두 김굉필 정여창 퇴계 이황 율곡 이이등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부관참시 당한 김종직은 밀양,선산,금산에 토지를 보유하였고 노비는 외거노비를 제외하고도 뜰에 가득할 정도로 많았습니다.

김종직의 후손들은 오늘날 고령 개실마을에 사는데 모두 기와집으로 지금은 팜스테이로 유명한 마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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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의 거두라고 할 수 있는 이황은 노비가 367명이었고 논과 밭을 각각 16만평씩 32만평이나 소유한 거부였습니다.

김일손은 자신의 스승 김종직의 삶을 家貧無僕隸 라고 하였는데 사실과 다른 말이고 자기 스승을 높이느라 한 것입니다.

그런데 김일손의 이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사림이 말하는 청빈이나 안빈낙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나물먹고 물마시는 생활이 아니라 노비와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가진자의 여유에서 나오는 자기위선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재산이 있었기에 얼마 안되는 관직의 녹봉은 하찮게 여기고 걸핏하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다고 떠들었던 것입니다.

물론 가난한 선비들도 있었고 중소지주도 있었지만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사림은  재산이 적은 지방의 선비들이 훈구파의 전횡과 재산증식을 막고 민생을 위해 나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훈구파와 싸움에서 이기지만 결국 훈구파중 대표적인 사람들만 몰락하고 나머지는 모두 사림으로 흡수됩니다.

애초에 그들 모두 사대부였고 중앙의 귀족이거나 지방에 막대한 전토를 소유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림파들의 물질적 토대가 이와 같았기 때문에 그들이 도학정치를 내세우면서도 백성을 위한 개혁이나 국가 지도층으로서 의무나 헌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대동법을 실시하는데 무려 백여년이 걸리고 균역법이나 기타 양반들의 국가에 대한 의무를 나누어지는 부분에서 사림파가 집권한 조선 중 후기가 오히려 더욱 불공평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노비에 대한 문제 여성차별등도 사림파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나선이후 더 악화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그들이 말로는 엄청나게 백성을 위하고 도학정치를 펴고 임금에게 성군이 되어라고 외쳤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조그만 기득권도 놓기를 거부했던 철저한 위선자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