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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라고라 님의 광주항쟁 글을 읽고 가슴이 뛰어 광주에 관련된 나의 글을 써야겠다 싶었다.

80년 5월 31일 지금은 보수적인 교회의 목사가 되어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감리교의 김 목사를 만났더니 서강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인 김 의기라는 학생이 전날 기독교회관 6층에서 떨어져 그 자리에서 숨졌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김 군은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써서 그 전날 6층에 있는 NCC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밤새워 등사기로 밀어서 창문으로 뿌리고 자신도 뛰어내렸다. 
당시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히 모르고 온갖 소문만 횡횡했던 터라서 나는 소식을 듣고서 종로 5가 기독교 회관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종로 5가 주변거리는 계엄군에 의하여 완전히 봉쇄되어 있었다. 나처럼 입소문을 듣고 달려온 학생들이 있었지만 큰 길로는 못 나가고 골목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부르고 또 부르고 있었다. 이 골목에서 끝나면 저 골목에서 마치 메아리처럼 ... 
나는 그날 이후 그 멜로디를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늘 마음에 빚을 진 것같이 살다가 광주 망월동 묘지를 처음으로 찾은 것은 88년이었다. 그 때부터는 호주로 떠나기 전까지 매년 5 18 주간이면 부천에서 순례단을 조직하여 버스를 빌려서 단체로 망월동 묘역을 참배했었다.
 
80년 5월은 오랫동안 잊혀지고 금지된 시공간이었다. 80년 5월은 광주지역과 대학가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민주화의 상징이었다. 87년 이후 한국은 서서히 민주화가 되었지만 광주, 5.18은 여전히 불온시 되었다. 수많은 대학생, 노동자들이 5월이면 민주화의 성지 광주, 망월동 묘지를 찾아 몰려들었지만 공권력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길목을 차단하고 집회를 봉쇄했다. 5월에 광주에 간다는 것 자체가 불법인 시절이었다. 

어렵게 버스를 빌려 밤새워 광주로 가서 새벽에 망월동에 도착해서 참배를 하고 낮에 열리는 각종 집회에 참석을 했다. 그러나 언제나 집회를 봉쇄하려는 전투 경찰과 백골단의 쫒고 쫒기는 전투가 벌어졌다. 순례단을 대표하는 나로서는 ‘가두전투’도 해야 했지만 큰 피해 없이 돌아가야 할 책임이 있었다. 대부분이 청년 학생들인 순례단원들은 80 년 5.18 현장에 있지 못했던 부채의식 때문에 마치 실전을 치르듯 날아오는 최루탄에 돌과 화염병으로 맞서서 전투를 치르려고 했다. 순례단을 인솔해야 하는 나로서는 우리 편을 진정 시키기에 바빴다. 대열을 따라 이리 몰려다니고 저리 몰려다니면서 최루탄 연기 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 출발해서 밤늦게 파김치가 되어 부천으로 돌아오는 것이 해마다 반복되는 5.18의 일과였다. 

나중에 민주화가 되고 난후 망월동 묘소를 참배하면서 ‘어떤 사람은 광주항쟁에 참가했다가 국회의원이 되기도 하고 적지 않은 보상금을 타기도 했는데 정작 총에 맞아 죽어버린 이들의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목숨을 잃을 때까지 싸운 그들의 정신은 어떻게 되살아나는 것일까?’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들의 희생 덕분에 더 이상 노동법의 준수를 부르짖거나 독제권력에 대항하는 투쟁을 할 필요는 없다. 오늘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달라졌다. 나태함과 무사 안일함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심 이런 것들이 나의 투쟁의 대상이다. 

5. 18의 광주는 죽는 날까지 나를 깨어서 게으르지 못하도록 만든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민족의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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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해  망월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