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항쟁은 시작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에 끝이 났다. 어느 날 소대장이 초소의 대원들을 내무반에 불러놓고 “광주에서 사태가 마무리됐다”고 공식적으로 알렸다. 항쟁의 종료가 구체적으로 어떤 경과를 거쳤는지에 관한 정보는 전혀 말해주지 않았다. 당시 소대장도 구체적인 정보는 알지 못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다만 당시 소대장의 발언 가운데 기억나는 것 하나는 “정부는 앞으로 이번 사태에 관한 어떤 언급도 금지한다. 정부도 이번 사태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겠지만 사람들이 이번 일에 언급하는 것도 모두 금지한다. 공식적으로 이번 사태는 우리 역사에서 없었던 일이다. ‘광주’라는 단어 자체를 아예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부 방침이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표현까지 세세하게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당시 소대장의 발언은 저런 취지였다고 기억한다.

 

초소 생활은 광주항쟁 이전으로 돌아갔지만 얼마 뒤에 나는 3박4일이던가 특별휴가를 받았다. 정확한 시점은 기억나지 않지만 광주항쟁이 마무리된 후 한 달쯤 지난 시점이 아닌가 싶다. 아직 무더위는 오지 않았던 것 같다. 특별휴가를 알려주는 소대장을 통해서 이번 휴가는 광주 출신 전체(호남 출신인지 기억이 분명치 않다) 군경 장병들에게 주어진 것이며, 그 목적은 항쟁을 거친 광주 지역의 민심을 다독거리는 것이라고 들었다. 즉, 광주 출신 군인과 전투경찰들이 광주에 가서 건전한 군인 정신과 사기 충만한 태도로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라는 취지로 이해했다.

 

내가 광주 대인동 소재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겪은 일이 기억난다. 나름 부푼 마음으로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잡으려 하는데 도무지 택시를 잡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손님이 없는 빈 택시인데도 기사들은 나를 본체만체하고 씽씽 지나쳤다. 걸어가기에는 좀 먼 거리인데다 첫 휴가의 부푼 마음으로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날아가고 싶었지만 결국 나는 시내버스를 타고 터덜터덜 집으로 가야 했다.

 

가족들과 반가운 저녁 식사를 하면서 내가 항쟁 당시의 궁금했던 이야기를 꺼내면서 “폭도들이...” 어쩌구 하자 갑자기 밥상머리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두 살 터울의 형님과는 많이 다투기도 했지만 형님이 그때처럼 싸늘하고 마치 낯선 타인처럼 느껴지는 표정을 지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너, 광주에서 폭도 어쩌구 하는 말 썼다가는 맞아죽을 수도 있다.”

 

긴 말 하지 않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 역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두 번 다시 그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나중에 형님으로부터 항쟁 당시의 이야기들을 토막토막 얻어들을 수는 있었지만, 역시 아주 자세한 이야기는 없었다. 뭐랄까, 경험과 표현 사이의 엄청난 괴리와 거리 그런 것이 막연하게나마 느껴졌다. 표현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도무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자신도 알 수 없어 답답해하는 느낌이랄까? 딱 한번 “마지막 날 저녁에 어떤 여자가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하고 방송하고 다니던 그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네. 그때 나는 방에서 솜이불 뒤집어쓰고 그냥 울기만 했네.”라고 고백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을 뿐이다.

 

내가 직접 아는 친구 가운데 항쟁 기간 동안 희생당한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중학교 동창 가운데 한 명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얼굴과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구두닦이와 목욕탕 때밀이 등 광주에 주민등록조차 두지 않고 지내던 청소년들이 많이 희생당했다는 얘기를 그때 전해들었다.

 

목욕을 좋아하던 자형은 5월 18일 충장로의 목욕탕에서 목욕을 마치고 나와서 탈의실에서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창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고, 길거리를 내다보던 목욕탕 손님 몇 사람이 공수부대원들을 향해 욕을 하는 것을 보고 자형은 옷을 다시 벗어서 옷장에 넣고 탕 안에 들어갔다고 했다. 곤봉을 들고 설치는 공수부대원들의 모습 등 밖의 풍경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자형이 욕탕 안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공수부대원 몇 명이 목욕탕 안으로 워커발로 뛰어들어왔다. 이들은 옷도 제대로 입지 않은 손님들을 곤봉으로 두들겨패고 끌고갔다. 공수부대원들이 욕탕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아 자형은 피 흘리며 끌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몰래 지켜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한 지옥도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항쟁 당시 광주 시내 여러 곳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것으로 들었다.

 

하지만 항쟁 당시의 처절한 투쟁을 가장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집 창고에 수북하게 쌓여있던 총알들을 봤을 때였다. 얼핏 봐도 천 여 발 가량 되어 보이는 M1, 카빈 실탄이 상자나 보자기도 아닌, 창고 서랍에 그냥 쌓여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에게 여쭤보니 항쟁 당시 시민군들과 함께 찝차를 타고다니던 형님이 가져다가 쌓아놓은 것이라고 했다. 나중에 형님에게 “저걸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물었더니 아무 대답이 없었다.

 

광주의 경찰서와 행정관청 등에서는 항쟁 이후 해마다 ‘각 가정에 숨겨두고 있는 불법 무기와 탄약들을 회수한다’는 공고가 붙곤 했다. 그냥 반납하기만 하면 입수 경위를 불문에 붙이고 일체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단서가 붙었다. 그런 공고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붙었다는 것은 우리 형님처럼 집안에 항쟁 당시 입수한 무기류와 총탄 등을 숨겨둔 광주 시민들이 적지 않았다는 반증일 것이다.

 

도대체 그 무기와 총탄들을 어디에 쓰려고 했을까? 아마 항쟁 당시의 그 분노와 억울함을 해소하고 진실이 백일하에 드러날 때를 준비해야 한다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도청에서 마지막 날 산화해간 사람들에 대한 부채의식이 우리 형님을 비롯한 시민들에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언젠가는 우리도 당신들을 따라갈 그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자신에 대한 다짐 또는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약속 같은 것 아니었을까?

 

물론 그 무기와 총탄을 사용할 날은 다시 오지 않았고 나는 그런 날이 앞으로도 영원히 오지 않기를 바란다. 집안에 있던 총탄은 몇 년 뒤 어머님이 형님 몰래 집 근처 파출소에 신고해 회수해가도록 한 것으로 들었다.

 

광주항쟁 당시 현장에 대한 보다 생생한 증언은 경찰과 동료 전투경찰들을 통해서 들을 수 있었다. 우선 나와 동기(전경 67기)였던 L. 그는 전북 출신으로 대학교 재학 중 전투경찰로 입대했던 친구였다. 다음은 그의 증언을 재구성한 것이다.

 

[전경 67기 L의 증언]

 

80년 5월 18일에 나는 금남로에서 시위대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며칠째 이어지는 시위에 대처하느라 엄청 피곤했지만 그날은 시위가 좀더 격렬해진 상태였다. 간신히 시위를 막고 있는데, 갑자기 유동삼거리(금남로의 전남도청 반대편 끝 지점) 쪽에서 엄청나게 큰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무슨 굉음이었는지 지금도 잘 모른다. 그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공수부대원들이 열을 지어서 행진해왔다.

 

그들은 소총을 등 뒤에 가로질러 매고, 손에는 커다란 곤봉을 들고 있었다. 전경들도 시위 진압용 곤봉을 사용하지만 공수부대원들이 그때 가진 곤봉은 완전히 달랐다. 훨씬 크고 길었다. 그렇게 행진해온 공수부대원들이 우리 전경대원들과 시민들이 대치한 곳까지 다가오더니 멈춰섰다. 그리고 지휘자가 핸드마이크를 들고 경고했다.

 

“폭도들은 지금 당장 해산하고 귀가하라. 세 번 경고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으면 엄중한 조치를 취하겠다.”

 

주위의 시민들은 모두 그 경고를 비웃었다. 욕을 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공수부대 지휘관은 정말 딱 세 번 동일한 경고를 내뱉었다. 그리고 세 번의 경고가 끝나자 소리쳤다.

 

“돌격!”

 

그러자 정말 공수부대원들은 곤봉을 휘두르며 길가의 시민들에게 돌진했다. 내 바로 눈앞에서 어떤 백발의 할아버지가 서 있다가 공수부대원이 휘두른 곤봉에 머리를 맞고 마치 영혼이 없는 인형처럼 고꾸라지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것은 야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말 ‘풀 스윙’이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주위의 시민들이 고꾸라지고 도망치며 거리는 아수라장이 됐다. 공수부대원들은 정말 인정사정이 없었다.

 

당시 내 심정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내 눈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말 액면 그대로 나는 내 눈에 보이는 그 풍경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백주대낮에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현실감이 사라진 상황에서 내가 그날 어떻게 그 자리를 빠져나와 부대로 돌아갔는지 나는 지금도 몽롱하다.

 

[전경 49기 K의 증언]

 

K는 나보다 한 살 나이가 많은 고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수도 정확치는 않고 다만 40번대 기수였던 것은 확실하다. 전경대원 중에는 대학 재학 중 입대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는 고졸이었고 고향은 전남이었다. 다음은 K의 증언을 재구성한 것이다.

 

나는 해안초소에서 근무하다 5.18 얼마 전부터 전남도경으로 파견을 나갔다. 광주의 시위가 격화되면서 야간에 금남로의 시위군중들을 서치라이트로 비추는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공수부대원들이 광주에 들어오면서부터 나의 활동 범위는 철저하게 전남도청 건물 안으로 제한됐다. 시민들이 도청을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낮에는 자고 주로 밤에 근무했기 때문에 대낮에 금남로나 광주 일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자세히 살펴볼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도청 안에 주둔한 공수부대원들이 갈수록 거칠어지고 언행이 살벌해지는 것은 뚜렷이 알 수 있었다.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두려울 정도였다.

 

서치라이트 근무를 서지 않고 낮에 깨어있을 때에는 공수부대원들을 도와 이런저런 심부름을 하기도 했다. 필요한 물품을 날라주곤 했던 기억이 난다. 공수부대가 도청에서 철수하기 전 날에는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척 많았다. 나를 포함한 전경대원들에게 손수레로 도청 안에 쌓아두었던 시민들의 시체를 나르라는 지시가 내려왔던 것이다.

 

그것은 긴 자루에 담긴 시체들이었다. 하루종일 손수레에 시체들을 몇 구씩 싣고 도청 뒤편으로 실어날랐다. 헬기가 계속 날아와서 그 자루들을 싣고 어디론가 날아갔다. 그 시체가 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모른다. 시체가 몇 구나 되는지 세어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때 같이 시체를 날랐던 전경대원들과 손수레 숫자를 생각해보면 최소한 몇 백 구는 넘었을 것 같다.

 

[기타 여러 증언들]

 

이밖에도 시민군들에게 쫓기던 공수부대 장교가 경찰서에 도망쳐 들어와 눈물콧물로 범벅이 된 채 무릎을 꿇고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이번에만 살려주시면 절대 죄를 짓지 않고 살겠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주님, 살려주십시오.”이렇게 통곡하며 기도하더라던 경찰 간부의 증언을 듣기도 했다.

 

다른 증언들은 항쟁 당시의 그것도 있지만 일종의 후일담 비슷한 것들이기도 하다. 지금도 잘 해석이 되지 않는 증언 가운데 하나는 내 누님이 들려주신 것이다.

 

광주항쟁의 표면적인 흔적이 사라져가던 1980년 늦여름 어느날 오후 날이 저물어갈 무렵 누님은 아파트 베란다에 나갔다. 그때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에 거대한 십자가가 떠 있었다. 분명 구름은 아니고 하얀 십자가 모양이 하늘에 떠서 서서히 해가 저물어가는 저쪽 지평선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누님은 아무 생각 없이 멍한 상태로 30분 이상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이 증언을 신뢰하는 이유는 누님이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기독교 신앙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분이 어떻게 해서 그런 기이한 현상을 보게 됐는지, 그리고 그런 체험을 하고도 어떻게 전혀 기독교 신앙과 무관한 생활을 할 수 있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누님의 그 증언이 꾸며낸 것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히 믿을 수 있었다.

 

1985년 2월 나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단독 가두시위를 조직했다가 경찰서 유치장에 25일 가량 구류된 적이 있었다. 그때 유치장에서 만난 청년들 중에는 나보다 대여섯 살 가량 어린 청년이 있었다. 중국집에서 배달을 하던 이 청년은 1980년 당시 화순에서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고 했다. 그 청년은 “화순에 군용 트럭을 타고 왔던 공수부대원 중 하나가 대검에 사람 머리를 꽂고 다녔다”고 증언했다.

 

내가 직접 들은 광주항쟁 증언 가운데 가장 나중의 것은 유치장 생활 몇 달 뒤 우연한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의 것이었다. 사실 그 증언은 들었다기보다 그냥 ‘접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그다지 심각한 사고는 아니었기에 나는 채 일 주일 못 되는 기간 동안 병원에 입원했을 뿐이다. 내가 입원했던 6인실에는 어떤 40대 아저씨가 나보다 먼저 역시 교통사고로 입원해 있었다. 내가 그 아저씨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질 일이 없었지만 그 아저씨는 내가 말하는 것을 몇 번 듣더니 어느날 밤 다른 사람들이 잠들 무렵 내게 말을 걸어왔다.

 

“학생, 고향이 어디야?”

 

“네, 전남 광주입니다.”

 

“그래? 광주? 허허허 그래 광주...”

 

나는 그 아저씨가 왜 내 고향을 물었는지, 왜 광주가 고향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기이한 반응을 보였는지 잘 몰랐다. 다만 하루쯤 지난 뒤에 이 아저씨의 얘기를 듣고 저간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실은 1980년 광주사태 때 맨처음 진압에 투입된 부대였어.”

 

아저씨는 더 이상 자세한 얘기를 하지 않았고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만, 그 아저씨가 직업군인으로서 하사관으로 월남전에도 참전했다는 얘기는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 병실에 함께 있는 동안 이 아저씨가 밤에 기이할 정도로 악몽에 시달리며 계속 잠꼬대를 하는 광경만 목격했을 뿐이다. 내가 1980년 광주에서 공수부대원의 잔인한 폭력진압과 월남전 경험과의 연관성을 생각해보게 된 것도 병원에서 그 아저씨와의 만남이 계기가 됐다.

 

내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1980년 광주항쟁의 기억은 이 정도다. 이보다 더 많은 얘기들이 있지만 나보다 훨씬 더 생생한 경험을 하신 분들의 증언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보다 생생하고 가치 있는 증언이 계속 쏟아져 나와 1980년 5월 광주의 경험이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과 사회적 성숙을 위한 밑거름으로 작용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