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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폴은 지정학적으로 축복받은 나라입니다. 싱가폴이 자리잡은 말라카 해협은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유일한 해상 교통로입니다. 저기가 막히면 석유 등 핵심 물자의 이동이 막히고 전세계 경제에 어마어마한 타격을 주게 됩니다.
워낙 저 지역의 중요성이 크고, 저기가 막힐 경우의 위험성이 크고, 또 지정학적 유리함을 무기로 누군가 협박을 할 가능성 등도 고려해서 대안을 만들 생각도 했었나 봅니다. 유일한 대안이라면 그보다 북쪽의 안다만해와 타일랜드만을 운하로 연결하는 방안인데, 적어도 20세기 안에는 실현 불가능하다는 시뮬레이션 결과가 나와서 포기했다는 얘기도 있더군요.
항구로서의 입지 조건도 세계 최고입니다. 싱가폴 해안은 거의 수직에 가까운 각도를 갖고 있어서 몇십만톤 급 화물선이 별도의 접안시설 없이도 바로 항구에 배를 대고 하역작업을 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뿐이 아닙니다. 바람의 영향이 적어서 다른 항구들에 비해 컨테이너를 2~3층 정도 더 쌓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항구로서는 어마어마한 차별성이자 경쟁 요소입니다.
지정학적 조건에다 항구로서의 입지 조건도 최상이니 전세계 무역상이나 글로벌 기업들이 싱가폴을 외면하기는 어렵습니다.
리콴유 수상의 리더십이 탁월한 것은 사실이지만 저런 요소들을 배제하고 현재 싱가폴의 성공을 설명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한국과 비교했을 때 싱가폴은 기본 점수 50점 정도 따고 들어간 반면 한국은 10점도 갖지 못한 상태 실은 마이너스 상태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과연 싱가폴의 현재 시스템이 지속 가능한지 저는 좀 의문입니다. 일차적으로 리콴유 수상이라는 거목이 사라진 상태에서도 계속 저 시스템이 안정성을 갖고 유지될 수 있을지...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지하는 시스템은 결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리콴유의 진정한 리더십은 본인의 영향력이 사라진 상태에서도 지속성을 갖는 시스템을 만들었는지의 여부에 따라 최종적으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일보 등이 연일 리콴유를 치켜올리는 기사를 내보내는 것도 좀 웃기더군요. 이런 식으로 단순화하기는 어렵지만, 굳이 구분하자면 리콴유는 미국/서양식 시스템이 아니라 중국/동양식 시스템의 유효성을 강조하고 그걸 현실에서 입증하기 위해 평생을 노력해온 인물입니다.
키신저 등 서양의 정치인 지식인들이 리콴유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그가 내세우는 가치에 동의해서가 아닙니다.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입니다. 서양에서 보기 어려운 특이한 가치관이나 사례에 대한 존경 그리고 그러한 가치관이 현실에서 의미있는 업적을 남겼기에 일종의 케이스스터디로서 존중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미국/서양식 가치관의 가장 열렬한 옹호자로서 기능해온 조선일보가 리콴유를 저렇게 높게 평가하는 것은... 글쎄요, 저로서는 좀 어이없더라는 ㅎㅎㅎㅎ
하기야 조선일보가 가장 존중하는 것은 가치가 아니라 힘이지요. 유일한 철학이라면 대세리즘이랄까 ㅎㅎㅎ 힘센 놈에게 붙는다는.
2015.03.26 04:28:48
조선일보가 리콴유를 칭송하는 지는 몰랐는데, 칭송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박정희 때문 아닌가요? 리콴유가 예전에 박정희를 존경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저도 들은 말이라 정확한 워딩이 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좋아한다라고는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박정희 빨아주기위해서 리콴유도 같이 빨아주는 것쯤이야 당연하겠죠.
2015.03.26 06:22:15
리콴유가 정말로 박정희를 존경했을까요? 외국 기자가 와서 인터뷰하니까 듣고 싶어하는 말 해준 뿐인지도 모르죠.
아래 기사를 보니 북한 김일성에 대해서도 비슷한 대응을 한 모양입니다...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3/24/2015032400967.html
2015.03.26 07:55:28
제가 위 포스팅에서 얘기했습니다만, 과연 싱가폴의 기존 시스템이 리콴유 사후에도 지속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리콴유 모델도, 박정희 모델도 한 사회가 반드시 지불해야 할 비용의 지불을 유예한다는 전제 위에서 성립한 겁니다. 그 비용이란 결국 자유의 확대를 말한다고 봅니다. 사회적 기회의 공정성도 포함하구요.
우리나라는 그런 자유나 기회의 공정성이라는 문제를 싱가폴보다 먼저 맞닥뜨렸습니다. 그 진통이 80년대의 민주화 열풍으로 나타난 것이구요. 그 문제를 얼마나 지혜롭게, 합리적으로 해결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평가가 끝나지 않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적어도 싱가폴보다 먼저 그 문제에 직면하고 고민하기 시작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싱가폴은 이제 시작이라고 봅니다. 그동안 지불해야 할 비용을 지불하지 않은 덕분에 매우 효율적(?)인 시스템이라고 평가(또는 오해)를 받았지요. 가령 내야할 세금 안내고 배째라며 음식점 몇십년 하면 다른 식당보다 훨씬 빠르게 매출 키울 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못먹어도 고~ 할 수 있나요? 그렇게는 안 되죠.
이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공짜는 없다. 이것이야말로 이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확실한 원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불하지 않은 비용은 나중에 이자까지 얹어서 훨씬 더 큰 계산서로 다가옵니다. 이건 분명합니다.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이 고착된 이유도 사실 여전히 사회 주류가 지불해야 할 비용의 지불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불해야 할 비용 빨리 지불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게 그리 어려운 겁니다.
싱가폴도 이제 그동안 지불하지 않았던 비용의 계산서를 받게 될 텐데, 어떻게 해결해갈지 궁금하군요.
http://www.hankookilbo.com/v/0311f1cc76ba4d70b615c54e14dac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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