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의 기억 (3)]

나중에 그곳을 떠날 때가 되어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내가 배치받아 간 초소는 무척 아름다운 마을에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봄과 가을에 그 지역 일대의 풍경은 나에게 완전히 상반된 심리적 충격을 던지곤 했다.

흔히 신작로길이라고 불리는, 포장이 되지 않아 차량의 바퀴가 지나간 곳을 뺀 길 한가운데와 양쪽 가장자리에 자갈들이 수북하게 올라와있는 길을 걸어서 초소를 향해 가면 왼쪽으로는 짙푸른 파도가 사시사철 아니 일년 삼백육십오일 24시간 항상 다른 표정을 지어보인다.

서해의 뿌옇고 탁한 바다도 아니고 동해의 그 등골이 시릴 것 같은 짙은 청색도 아니다. 내가 기억하는 그 바다의 첫 모습은 나를 위협할 수 없을만큼 한참 떨어진 곳에서 하지만 내 귀에는 충분히 들릴 만큼의 성량으로 수많은 파도가 아우성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퍼런 아우성, 수없이 잘게 쪼개지면서 수평선 저 멀리서부터 밀려오며 달려오는 그런 아우성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내 머리 위로 해석하기 어려운 암호를 던지며 갈라지는 그 바람결.

가을이면 언덕구비마다 쌓아올린 밭의 돌무더기 사이로 늙은 호박이 황금처럼 빛나고, 시들어가는 찔레덩굴 속으로 미처 풀지 못한 여름의 비밀이 숨어있는 것 같다. 내가 배치받은 초소로 들어가는 마을 초입에는 오래된 우물이 있고 그 옆에 고목나무가 서 있었다. 마을이라고 하지만 기껏해야 스무 가구가 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곳이 가장 빛나는 계절은 4월과 5월 무렵 아니었나 싶다. 파도처럼 구비구비 펼쳐진 언덕 사이로 난 신작로 길을 걸어가면 길 양쪽으로 파란 마늘잎과 보리,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밝은 노란색으로 빛나는 유채꽃이 어우러져 '현실에 이런 풍경이 존재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운' 정도의 모습이 연출되곤 했다.

내가 배치받은 초소는 이른바 소초라고 불리는 곳으로 직업경찰인 경사가 소대장을 맡아 주재하는 곳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직업경찰인 소대장이 함께 생활하기 때문에 전설로만 들었던 초소 생활의 낭만 따위는 애초에 기대할 수 없었다. FM에 가깝게 생활할 수밖에 없었고, 정말 FM에 충실하게 한다면 해안초소는 상상 이상으로 괴로운 곳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해안초소의 시간표는 낮보다 밤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 계절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겨울철을 제외한 봄, 여름, 가을에는 대개 저녁 6시 또는 7시부터 그 다음날 아침까지 12시간 가운데 2시간 정도를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모두 순찰, 경계 근무 등으로 채워진다.

근무를 서지 않는 2시간은 취침 시간이지만 현실적으로 앞뒤 근무 준비 등을 고려하면 실제로 잠을 자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경계 근무의 특성상 군화도 벗지 못하고, 탄띠도 풀어놓지 못한다. 누워도 그건 자는 게 아니다.

이렇게 FM대로 근무를 서면 아침 식사를 한 후 경계근무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대원들은 내무반에서 불을 끄고 커튼까지 치고 오전 취침을 한다. 이게 원칙이다. 하지만 내가 초소에서 근무하는 동안 오전 취침이란 것을 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중대나 대대본부에서 이런저런 작업 지시가 내려오기 때문이다. 그 작업을 해내려면 오후 시간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결국 오전 시간의 취침을 포기해야 한다.

대개 소대장이 함께 근무하지 않는 분초 즉 분대장만 있는 초소의 경우 야간 근무도 요령을 피우고 작업 지시도 대충대충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야간에 서치라이트 담당 1명과 내무반 경계근무자 1명 정도만 남기고 순찰 등은 모조리 생략한 채 취침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들었다. 심지어는 서치라이트 담당이 경계근무까지 겸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배치받아 간 초소는 소초인데다 소대장이 좀 까다로운 성격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979년 10.26 이후 정권 교체기 또는 전환기라서 그런지 근무에 대한 관리감독이 훨씬 강화됐다고 들었다. 근무는 근무대로, 작업은 작업대로 다 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어느 초소나 그렇지만 별도 취사병이 있는 게 아니고 가장 나중에 들어온 졸병이 식사당번을 맡게 된다. 나 역시 초소에 가자마자 식사당번을 맡게 됐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라면조차 제대로 끓여보지 못한 내가 느닷없이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들려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어떻게 음식을 만들어야 하는지 경험이나 요령도 없고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다.

내가 가기 전까지 식사당번을 하던 고참이 있었지만 나에게 요리에 대해서는 거의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것도 못하느냐?"는 핀잔 뿐이었다. 묘한 것은 이 고참이 식사당번을 할 때는 음식을 잘한다고 다른 고참들에게 엄청 칭찬을 받았다는 점이었다. 그런데도 본인의 노하우는 전해주지 않고, 기껏 한다는 소리가 "음식은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는 얘기였다.

얼마 전까지 맛있게 먹었던 음식과 내가 조리한 형편없는 음식을 대조하는 고참들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초소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식사당번의 솜씨이다. 일단 음식을 맛있게 먹어야 소대장과 다른 고참들의 기분이 좋아진다. 이게 되지 않으면 다른 것들이 별 의미가 없다. 그러니 내가 받게 되는 압박과 중압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식사당번을 한다고 해서 다른 근무나 작업에서 빠지는 것도 아니었다. 새벽 5시까지 근무하고 취사장으로 달려가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든다. 그런데 맛이 없다고 타박을 한다. 죄를 지은 심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작업을 하러 출발한다.

내게 유일한 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야간 근무를 나갈 때 잠시 짬을 내서 마을에 들르는 일이었다. 너무 늦어지면 그것도 불가능하지만, 밤 10시나 11시까지 마을에 들르면 구멍가게에 가서 전화를 이용할 수 있었다. 그 때 동행한 고참의 양해를 얻어 광주의 집에 전화를 하는 것이 당시 내 생활에서 유일한 낙이자, 희망이자 빛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인지 전화 통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일시적인 고장인가 싶었는데,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전화는 계속 불통이었다. 광주로 거는 시외전화가 막혔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저런 불길한 소문이 전투경찰 초소에까지 들려오기 시작했다.

"광주에 난리가 났다"는 것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