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의 기억 (2)]

중대장은 필요 이상으로 사람들 특히 아랫사람들의 약점을 찾아서 조지는 것을 좋아하는 스타일이었고 필요 이상으로 악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즐기는 성격이었다. 그런 탓인지 중대본부 분위기가 그리 밝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막 자대에 배치받은 신병인 내가 신경쓸 문제는 그런 게 아니었다. 이것저것 시키는 일을 따라하는 데만도 정신이 없었다.

군대에 늦게 간 편이었기 때문에 전역을 앞둔 고참들도 나와 동갑이거나 어린 경우가 꽤 많았고 1년 정도 고참들은 대부분 나보다 한두 살 또는 그보다 더 어린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중대본부 취사를 책임졌던 고참은 입대는 나보다 1년 반 정도 앞섰고 나이는 두 살 가량 어렸는데, 그랬는데도 나를 꽤 귀여워(?)해줬다. 그 고참이 나를 어떻게 봤는지 계속해서 나를 취사반에 남기려고 설득하곤 했다.

사실 중대본부에 있으면서 나도 동기 한 명과 함께 취사반 일을 했다. 반찬 만드는 것이야 고참들이 알아서 했지만 커다란 가마솥에다 불을 때고 적당한 때 불을 끄고 뜸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밥을 푸고 그런 다음 누룽지를 챙기고 또 숭늉을 만드는 일까지는 해봤다. 창고에 가서 땔감으로 쓸 나무를 짊어지고 오는 것도 졸병들이 하는 일이었다.

사실 그 취사반장의 권유대로 내가 중대본부에 남았다면 그 뒤에 겪은 여러 가지 복잡한 사건들도 없었을 것이고 나는 중대장 눈치보느라 고달프긴 했겠지만 그래도 비교적 평탄한 군대 생활을 보냈을 것 같다. 하지만 취사반 고참들을 위해서라면 내가 중대본부에 남지 않은 게 더 나았을 것 같다. 나는 정말 밥하고 음식 만드는 데 거의 백치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중대본부에서 밤에 불침번을 서는데 제대를 몇 개월 남겨둔 고참이 내게 라면을 끓이라고 그런 적이 있었다. 대충 냄비에 물을 넣고 내무반 난로에 얹는 것까지는 했는데, 물이 끓기도 전에 면을 남비 속에 집어넣고 말았다. 고참은 경악했다.

"야, 이 자식 집에서 라면 한번도 안 끓여봤나 보네?"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어서 "죄송합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지만 고참은 그다지 심하게 나무라지 않고 그냥 자기 손으로 라면을 끓여서 내게도 나눠주었다. 한참 졸병인데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다그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 아닌가 싶다.

우여곡절을 거쳐서 나는 해남 화원반도에 있는 해안초소로 나가게 됐다. 내가 결국 해안초소로 나가기로 했다고 말하자 실망하던 취사반장의 얼굴이 지금도 떠오르고 새삼 죄송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원칙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전투경찰 대원들에게는 나름 희망 부서를 고려해서 최종 배치를 결정했던 것 아닌가 싶다. 내가 취사반장의 권유를 뿌리치고 초소를 선택했던 기억이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중대본부에 남으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해안초소를 선택했던 것에는 전투경찰 대원들 사이에 남아있던 해안초소의 전설 때문이었다. 사실 그 전설은 전투경찰에 자원했던 당시 청년들 거의 대부분을 사로잡고 있던 전설이기도 했다. 해안초소에 가면 고생도 안하고 훈련도 없으며 시간이 많아 책도 읽고 공부도 할 수 있다던.

중대 본부에 있던 고참들은 그 전설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그런 초소도 있지만, 고생하는 초소도 많다"고 알려주곤 했다. 하지만 그런 충고는 원래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내가 해안초소로 출발한 날짜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4월 말이나 5월 초였던 것 같다. 기억나는 것은 내가 중대본부에서 한참 가마솥에 불을 때서 밥을 하고 있을 때 선동열의 광주일고가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하는 중계방송을 라디오를 통해서 들었다는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우리 학교 야구팀이 광주 지역에서 광주일고와 숙적 관계였기 때문에 광주일고에 대해서는 감정도 많았지만 그래도 동향 팀이 전국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에 다들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선동열이라는 스타의 이름을 기억했던 것도 그때의 우승이 계기였던 것 같고.

나의 초소 생활과 1980년 5월 그 운명의 사건이 만나는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