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의 기억 (1)]

나는 1980년 2월 10일 논산훈련소에 입소했다. 전투경찰 67기로, 전/후반기 각 4주씩 8주 교육 예정이었다. 내무부가 국방부에 의뢰한 일종의 위탁교육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전반기는 제식훈련과 총검술, 사격, 유격 등 대한민국 육군이라면 누구나 받게 되는 교육과정이었고, 후반기는 전투경찰에 특화된 일종의 특기 교육이었던 것으로 아는데 구체적으로 전후반기 교육 내용의 차이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기억이 분명치 않다.

나름 전투경찰로서의 정체성을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은 교육내용보다 당시 훈련병들이 [브라보전경]이라는 제목으로 훈련 중 즐겨불렀던 군가였다. 전해 듣기로는 우리보다 몇 기수 앞서 논산훈련소에서 훈련 받았던 사람 중에 대학가요제 입상자가 있었는데 이 선배 기수가 "전투경찰들이 스스로를 상징하는 노래가 없다"는 소리를 듣고 직접 작곡해서 그 뒤부터 전투경찰 훈련병들이 모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 전언의 사실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브라보 전경]

전 투 경 찰 전투 경찰 전투경찰 

눈보라 몰아치는 해안선에서 

검푸른 파도를 바라보면서 

별빛보다 빛나고 태양보다 뜨겁다 

우리의 함성속에 내일이 있고 

우리의 끓는 피에 조국이 있다 

인 의 예 지 신 인의예 지신 인의예 지 신 

우리는 대한의 브라보 전경 

저 가사에서 한 글자씩 뗀 부분은 실제 노래도 그렇게 한 글자씩 딱딱 떼어서 부르는 곡조였다. 얼마나 잘 만든 노래인지 나로서는 판단할 능력이 없지만, 그래도 훈련소에서는 꽤 많이 불렀고 나름 마음에 드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별빛보다 빛나고 태양보다 뜨겁다'는 구절이 어쩐지 말이 안된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런 이성적 분별보다 그냥 별빛, 태양, 뜨겁다 운운하는 감성적 호소력이 더 와 닿았던 것 같다. 고달픈 훈련병 시절에야 누구나 그러지 않았을까.

전반기 교육 기간에는 당연히 한겨울이었기 때문에 고생을 좀 했다. 워낙 게으른 습성에다 동기들이 벌떼처럼 몰려가는 세면장에서 아귀다툼을 하는 게 싫어서 손발 씻는 걸 게을리 했더니 나중에는 손가락 피부가 여기저기 갈라져서 불침번을 설 때나 아침 기상 때 양말을 신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새롭다. 흙의 화학 성분이 사람 피부에 그런 작용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배웠던 경험이었다.

후반기 교육 때는 날씨가 많이 풀렸지만 좀 기이한 현상이 있었다. 원래 훈련소에서 주말은 훈련병들이 축구 등 운동도 하고 나름 휴식도 취하는 그런 꿀같은 시간이어야 하는데, 내가 훈련받던 1980년 3월에는 묘하게도 주말마다 궂은 비가 내려서 훈련병들의 그런 기대를 잔인하게 짓밟곤 했던 것이다. 휴식은 커녕 다들 내무반에서 거의 부동자세 비슷하게 도열해 앉아서 암기과목을 붙잡고 있어야 했던 것이다. 조교들도 "이런 날씨는 처음이다"고 했고 그때는 다들 그 비를 '주말비'라고 부르곤 했다.

전/후반기 교육을 다 마치고 나는 전남 경찰로 배치를 받았다. 묘하게도 그때 기차를 타고 이동했는지 트럭을 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광주에서는 잠깐 가족들 얼굴만 보고 나는 영암 월출산 아래에 자리잡은 대대본부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며칠 머무를 때는 날씨가 너무 좋았다. 좋은 날씨가 빌미가 됐는지 모르지만 나와 동기들은 대대본부에 있는 며칠 동안 하루종일 월출산에 야전주(군용 전신주)를 짊어지고 올라가 삽과 곡괭이만을 도구로 땅을 파고 야전주를 세워야 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월출산은 흙이라고는 거의 없는 돌산이다. 삽을 내리찍으면 단 10센티도 들어가지 않고 삽날이 돌에 부딪힌다. 그냥 돌이려니 하고 파들어가다보면 내가 상대를 만만하게 봤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내 몸뚱아리보다 더 큰 바위를 만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우리가 한 고생이야 그런다 치고, 그런 식으로 세운 야전주가 제대로 버티고 서서 제 역할을 했을지 가끔 어울리지 않는 걱정을 했을 정도였다.

대대본부에서는 1주일 가량 있었나? 기억이 분명치 않지만 나는 다시 거기에서 해남의 107전경대(중대)로 배치받았다. 중대본부는 해남의 옥매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었다. 옥매산(玉埋山) 말 그대로 옥이 묻혀있는 산이란 뜻이다.

실제로 그 산은 옥돌의 산지로 유명했고 산기슭에는 옥돌을 가공해 그릇이나 여러 가지 공예품을 만드는 소규모 가내 수공업 공장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내가 그 산에서 본 돌들의 모양과 무늬는 정말 기이하고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운 돌들을 예술감각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운 어설픈 그릇 등으로 만드는 것보다 그냥 돌 그 자체로 남겨두는 것이 훨씬 더 가치가 살아날 것 같다는 생각조차 했다.

하지만 중대본부로 배치받을 당시 우리의 관심사는 그런 지정학적인 요소들이 아니었다. 우리를 받아들일 중대장이 인근의 전경대원들 사이에서 '호랑이'로 소문난 간부였던 것이다. 육군 소령으로 예편해서 경감을 단 지 얼마 되지 않은(당시에는 박정희정권이 도입했던, 예비역군인의 경찰/공무원 특채 제도가 살아있었다) 분이어서 그런지 아주 악랄하다는 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껏해야 40도 되지 않은 나이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실제로 마주 대한 중대장의 인상은 '일그러짐'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오르는 분위기였다. 마치 고약하게 늙은 할아버지 같은 인상이랄까?

중대장과의 만남으로 내 자대 생활은 시작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