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에버레디 플랜', 그러니까 미군의 해군정보국에 의하여 '이승만을 암살하려는 계획'이 있었고 그 계획 중에 박정희가 미군부 요원으로 참가하고 있었다는 설명을 한 적이 있다. (이 부분을 서두로 뽑는 것은 당시 이 포스팅에 대하여 떡밥님의 지적이 있었고 내가 간신히(?) 근거를 찾기는 했는데 내가 알고 있었던 것과는 꽤 많이 달랐지만, 이승만을 암살하려는 '에버레디 플랜'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박정희가 그 플랜의 가담자라는 것도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글을 쓰기 위한 것이다)


 

"박정희는 왜 이승만을 암살하려 했을까?"


 

박정희가 우리 역사에 긍정적 의미이건 부정적 의미이건 또는 두가지의 의미가 복합적이건 박정희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진영논리의 희생자이다. 내가 누누히, '박정희 기계적 죽이기와 박정희 무조건 찬양이라는 참 한심한 두 집단'이라는 비야냥을 하고는 했는데 이 두 집단, 그러니까 보수/우파는 박정희가 결코 좌익이어서는 안되는 것이고 또한 진보/좌파는 박정희가 친일파이며 또한 좌익 경력을 속인 변절자라는 이미지를 뒤집아 씌워야만 하는 '진영논리의 도마 위'에 찬란히 올라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진영논리에서 박정희의 개인적인 아픔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그의 형 '박상희'는 그가 좌익이라는 이유 때문에 보수/우파에서는 역사 속에서 부활하는 것을 막고 진부/좌파에서는 역시 박정희를 기계적으로 죽이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역사 속에 묻어버렸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


 

내가 자유게시판에 썼던 '조선의 모스코바로 불리웠던 대구', 그리고 이 땅의 순수한 좌파 시위였던 대구 10.1 의거를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 두 역사적 사실의 중심에 바로 박정희의 형 박상희가 있다.


 

 

박상희.


 

항일좌익운동가 박상희와 박정희 일가

 

(상략)그런데 이 궤도에서 박근혜나 김종필은 좀처럼 규명되지 않는다. 박근혜의 아버지는 남로당 군책이었다가 적발, 세포들의 이름을 털어놓으면서 전향했다. 하기야 전향의 뒤에 이어진 박정희의 행보는 그를 좌익전력인사로 올리는 것을 겸연쩍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박근혜의 막내 백부이자, 김종필의 장인으로, 좌익활동을 벌이다 죽음을 당한 박상희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박상희를 존경했던 동생 박정희도 살아생전에 별 언급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누구일까. 10월 6일, 기일에 맞춰 질문해본다.

(출처는 여기를 클릭)



 

박정희의 형 박상희가 '항일좌익운동가'였다는 것은 보수/우파에게 딜레머를 던져준다. 바로 조갑제의 '친일은 용서해도 친북은 용서가 안된다'라는 보수/우파의 정서를 대번하는 것에 의하면 '박정희의 친일 행각'이 그의 형 박상희로 인하여 충분히 희석되고도 남지만 하필이면 용서가 안되는 '좌파'였다는 것이다. 이 것이 보수/우익에 의하여 박상희가 역사 속에서 부활되는 것을 용납치 않는다.


 

 

구미에서 태어난 박정희와는 달리 박정희의 형 박상희는 지역차별발언으로 도마 위에 올랐던 칠곡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의 해방전후의 행적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1927년에는 신간회에 참여해 활동했다. 1931년 신간회 해소 이후 박상희는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입사, 이듬해 1935년에는 동아일보의 구미지국장 겸 주재기자로 활동하였다. 일제말기에는 여운형이 조직한 비밀결사단체인 조선건국동맹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경찰에 체포된 상태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구미에서 그의 정치적 인기는 대단했다. 좌 우를 가리지 않고 인망이 높아서 구미지역에서 좌우익을 막론하고 지식인,독립운동가 그룹의 리더였다. 건국준비위원회 구미 지부를 창설하고 건준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이듬해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군지부 사무국장을 맡았으며, 후에는 조선공산당 구미 총책이 되었다.

(출처는 여기를 클릭)


 

물론, 김구나 조만식과 같은 전국구는 아니었지만 일제 시대 때  망명하지 않고 이 땅의 민중과 같이 호흡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박상희는 역시 진보/좌파에 의하여 역사 속으로 매장이 되어버렸다.


 

최근 친일청산 흐름을 타고, 일제 초기에 민족적 인사였다가 후기에 전쟁동조자로 변신한 인물들에 대한 냉정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몽양 여운형 같은 지도자들에게조차 일제부역혐의를 발견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후자는 억측일 가능성이 높지만, 박상희가 일제부역에 참여했을 가능성, 혹은 굴복은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타협을 하고 잠시 후퇴했을 가능성에 관해 분석하고 사유해볼 필요는 있을 듯하다. 더구나, 언론학자 정진석 교수가 소장한 자료에 의하면, 1939년도 매일신보 선신지국 구미분국장이 박상희였다. 알다시피 매일신보는 조선, 동아일보 이상의 친일신문이었다. 
 
 
일제부역 여부를 떠나, 강점이든 약점이든, 전국적, 아니 국제적 지도자인 몽양 여운형과 경북 시골의 박상희 간에는 인간적 공통점이 눈에 띄는 셈이다. 박상희는 박정희가 지닌 협소하고 강퍅한 이미지와는 상반된, 씩씩하고 후덕한 인상을 주었다고 전해지고, 사교성이 있고 인맥이 폭넓은 전형적인 ‘마당발’이었다. 이러한 유형의 사람은 자신과 대적하는 입장의 사람일지라도 우선 ‘내재적으로 접근’하고, 비판에 앞서서 이해를 하려는 경향이 있다. 박정희의 1940년 만주행도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출처는 상동)


 

상기 인용구의 파란색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박정희와 형 박상희의 관계를 알 필요가 있다.

 

박정희에게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큰형으로 사실상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해방직후 구미지역에서 함께 활동하던 황태성은 이후 월북해서 북한에서 무역부 부상(한국으로 치면 외교통상부 차관)이라는 고위직까지 오른다. 이 황태성은 남한에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김일성이 비밀특사로 남쪽에 파견했으나, 박정희와 김종필에 의해서 간첩으로 처형당했다. 다만 이 '황태성 밀사 사건'은 지금도 정확한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고, 여러가지 이설이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김종필이 이 사건에 관해선 반세기가 넘도록 일언반구 이야기를 안하고 있다.

(출처는 상동)


 

아버지와 같은 형.... 그리고 아들과 같은 동생. 비록 항일투사였지만 아들같은 동생의 만주행을 형은 말리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참조로, 황태성 사건은 김종필이 지금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면서 '회고록은 쓰지 않겠다'라고 했는데 이 황태성 사건의 전모 정도는 밝히는 것이 역사 앞의 예의 아닐까? 최규하처럼 비열한 침묵의 죽음 말고 말이다.


 

 

어쨌든 박상희는 우익의 상징인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9월, 조선공산당 신전술의 일환으로 전국 총파업이 개시된다. 인텔리들은 선동의 와중에서도 폭력사태를 진정시키려는 노력을 하지만 노동자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결국 10월 1일 경찰의 발포로 한명이 사망함으로써, 사태는 경상북도 전역으로 확산된다. 10월 3일, 박상희는 2000여명의 군중의 선두에 서서 오전 9시에 구미경찰서를 공격, 경찰관과 우익인사들을 감금해버린다. 이어 구미면사무소와 선산군청을 타격하여 식량 130여 가마니를 탈취하고, 관청 서류를 전량소각한다. 이때 박상희는 여느 좌익인텔리들이 그 시절 항쟁국면에서 그랬듯, 군중의 분노를 진정시키고 경찰관들이 다치지 않게 노력했다. 
 
그러나 4일, 대구항쟁이 진압됐고, 이 소식을 들은 박상희는 경찰과 협상에 나선다. 박상희의 평화적 중재 노력을 인정한 경찰서장은 흔쾌히 타협에 응하고, 6일 구미사태는 막을 내린다. 허나 박상희는 귀가하다가 경찰에 사살당하는데, 여동생 박재희는 경찰의 오인사격이었다고 증언한다. 박상희의 죽음은 집안과 지역사회에 큰 파문을 던졌고, 딸인 박영옥(김종필의 부인)은 구미보통학교에서 교편을 놓고 전출발령을 겪어야 했다.

(출처는 상동)



 

아버지와 같은 형 박상익의 죽음 소식을 들은 박정희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비록 변절한 좌파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오인사살이라고 하더라도 아버지같은 형을 죽인 경찰. 그 사망이 제주4.3사태부터 이어지는 학살 사건들의 연장선이었으며 그 정점에 이승만이 있었으며 따라서 이승만이야말로 '아버지같은 형을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로 인지되지 않았을까? 성격 상 '항문고착형'이라서 '나 아니면 안되'라는 성격의 박정희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내가 인용한 출처들에서는 박상희가 역사 속에서 숨은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다.

 

박상희의 죽음은 군내의 좌익확산과 일본군경력 무마 등의 이유와 맞물려 박정희를 남로당으로 내몬다. 박상희의 친구와 동지들이 박상희 사후에 남로당의 주요분자들로 움직이고 있었기도 했다. 박정희는 여순사태 이후 급격하고도 깔끔하게 전향을 하지만, 형의 독립운동과 자신의 남로당 경력을 철저히 숨기면서 살아간다. 그도 그럴 것이 국가원수로 군림하려던 박정희에게 이는 최악의 콤플렉스였다. 오늘날 박정희의 후예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색깔공세는 기실 윤보선이 박정희에게 가한 것이었다. 이것은 1960년대 초반의 이념지형이 현재의 시선으로 가늠하고 궤뚫기가 힘들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리영희 선생의 구술대담집 <대화>에서도, 5.16 쿠데타 이후 투옥된 혁신계 인사들이 면회 온 가족들에게 ‘박정희를 찍으라’고 했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리영희 선생이 간명하게 요약했듯, 5대 대통령 선거는 ‘민주를 가장한 수구’와 ‘좌익에서 전향한 극우’의 대결이었던 것이다(이와 관련해, ‘대구의 모스크바’라 불리울 정도로 혁신계의 본거지였던 대구가 박정희 정권을 거치며 어떻게 수구냉전의 본산, 지역패권주의의 중심이 되는지도 앞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다).


 

 

그런데 이게 다일까?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존재만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보수/우익의 사상지평에는 쓰나미가 오는 셈인데? 그럼 왜 진보/좌파 진영에서는 박상희의 존재를 밝히지 않을까? 바로 이 박상희가 밝혀져서 진보/좌파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상희가 역사에 등장하는 날, 한국의 정치/사상적 스탠스는 '하르마게돈'의 시작이므로.


 

박상희의 역사 속에서의 함몰은 '박정희 기계적으로 죽이고 싶은 진영과 또는 박정희를 영웅으로 칭송하기를 원하는 진영의 야합의 부산물'이다. 그가 역사 속에서 부활하는 날, 그 날이 한국 현대사를 제대로 쓰기 시작하는 바로 그 시점이다.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