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구 교수 생각만 하면 얼굴이 화끈거리죠. ㅠ.ㅠ;;;

왜냐하면, 제가 이준구 교수를 미시경제학자라고 했다가 비행소년님께서(그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무슨 국보급 뻘소리'라고 지적을 하셨기 때문이죠. 아마.. 지적을 하신 비행소년님은 '내가 그랬나?'라고 기억조차 희미하실겁니다만 지적 당한 저는 아직도 상처가....


제가 착각을 일으킨 이유는 제가 제 블로그에 미시경제학 관점에서 풀어쓴 포스팅을 몇 개 했었죠. 경제학 관점에서 한국 산업의 전망에 대한 분석의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포스팅에 '이준구 교수에게 강의를 듣는다는 네티즌'이 저에게 '이준구 교수님이 주장하는 내용과 같다'라고 해서 '이준구 교수=미시경제학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겁니다.


그런데 이준구 교수가 피케티 이론을 쉽게 설명했네요. 쭉 읽어보면서 필요한 부분만 인용합니다. 인용 순서는 전문의 순서와 같지 않으며 인용문 안의 번호는 주석 번호이며 제가 붙인 것입니다.


며칠 전 한국은행 총재가 "소득분배 불평등의 해소는 유효수요를 높인다. 성장잠재력 확보를 위해 내수기반을 확충하려면 불평등의 정도를 줄여야 한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1]보수적 정권하의 중앙은행 총재로서는 무척 과감하다고 할 수 있는 발언인데,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우리 정부의 고위직 입에서 이런 발언이 나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책담당자든 지식인이든 "무엇보다 우선 성장을 해서 파이를 키워야만 가난한 사람에게 가는 몫도 커진다."라는 케케묵은 말만 앵무새처럼 되뇌고 다녔으니 말이다. 어떤 사람의 입에서 '공평한 분배'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그는 '좌빨'이 되어 버리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었다.

언제 어느 때를 불문하고 공평한 분배는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핵심 요건이다. 그러나 [2]인간의 삶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경제학자들은 언제부터인가 공평한 분배라는 말을 잊어버린 채 살아 왔다. 바로 이와 같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경제학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갈 것을 촉구한 피케티에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다. [3]피케티현상은 분배문제에 관한 발상의 대 전환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발상의 대전환을 목이 타게 고대해온 나로서는 피케티현상의 확산이 너무나도 반가울 수밖에 없다.

[1] 이준구 교수가 이 글을 쓴 일자가 2014년 8월 30일(업데이트 시간) 그리고 인용 부분의 한국총재의 발언은 비슷한 시기. 즉, 박근혜 정권때의 발언.

역대 한국은행총재의 반골기질(?)을 감안하더라도 한국은행 총재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이므로 통수권자의 눈치를 안볼 수 없는데 이런 '파격적인 발언'을 한 것은 시대의 요구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 대선에서 '경제민주화'는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 공히 중요한 공약이었고 그 이후 여론조사는 대세가 바뀌고 있다.

당장 이명박 정권 시절의 여론조사만 봐도 국민의 인식 변화를 알 수 있다.

분배 여론조사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사실, 이 여론조사 결과의 역전현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명박 정권 때 국민들은 '성장피로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성장우선정책'에 의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역대 대통령 선호도에서 박정희가 처음으로 40% 이하로 조사된 적도 있었으니까.(시사타임즈 여론조사 결과이고 내가 아크로에서도 글을 쓴 기억이 나는데 검색은 셀프~)


[2] '살인은 더 이상 비도덕적이지 않다'

시카고 학파들의 '기업에게 사회적 책무를 강요하지 말라'는 주장을 근간으로 책이 출판되었고 그 책을 전 서울대 총장 정운찬씨가 번역을 해서 출간하면서 쓴 서평을 보고 내가 썼던 글이다.(신자유주의자 반대파인 정운찬씨는 이 책을 비판적으로 번역한 것임)

'기업에게 사회적 책무를 강요하지 말라'는 것은 '개인이 살인을 하는 경우에 법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있으나 도덕적 책무를 강요하지 말라'는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가 나의 주장의 요지이다.


[3] 그 발상의 전환은 정교한 수학적 공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방대한 역사 통계를 바탕으로 한다. 아마추어 역사학도인 나는 피케티의 저서가 '경제학책이 아니라 역사학 책이다'라고 주장하고 싶다. --> 물론, 한번 밖에 그 것도 쭈욱쭈욱 읽어봐서.... 몇번 더 읽어보아야 할듯....


이 책의 저자인 피케티(Thomas Piketty)는 바로 이와 같은 경제학의 한계를 용감하게 뛰어 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 여느 경제학자가 쓴 책과 다르게, [1]이 책에는 단 세 개의 수식만이 등장할 뿐이다. 그것도 아주 복잡한 수식이 아니고 α=r×β 혹은 β=s/g처럼 초등학교 수학책에나 등장할 정도로 단순한 수식들이다. 그 대신 풍부한 역사적 사례 심지 어는 오스틴(Jane Austen)이나 발자크(Honoré de Balzac)의 소설 같은 것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분배의 공평성 문제를 이해하는 올바른 틀은 수학적 모형이 아니라 역사, 정치, 철학적 관점을 적절히 가미한 경제적 논리라는 점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1] '음악은 산수이다'라는 바하의 발언과 같이 '피케티의 이론은 수학이 아니라 산수다'라고 발언한 이준구 교수에게 갈채를 보낸다. 단,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수학'이 아니라 '산수'이다. 사실, 간단한 수식이지만 이해 그리고 이해를 넘어서 실제 사례에 적용하려면 경제학적 기본 개념이 탑재되어야 한다.






[1]

예를 들어 r>g의 관계가 성립한다면, 즉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더 높다면 자본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더 커지게 된다.5) 그리고 이렇게 자본소득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소득분배는 더욱 불평등해지는 양상을 보일 것이다. 문제는 현실에서 관찰할 수 있는 r과 g의 값이 과연 어떤 크기일 것이냐에 있다. 피케티는 바로 이 대목에서 자본주의경제의 성장과정을 역사적 안목에서 관찰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즉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해온 긴 역사에서 과연 두 변수의 값이 어떤 추이를 보여 왔는지를 예의 주시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수익률의 장기추이는 어떤 양상을 보여 왔을까? 경제이론에 따르면 한계생산 체감의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에 자본이 축적됨에 따라 자본수익률은 낮은 수준으로 내려가게 된다. 마르크스는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체제의 기본적 운행원리 중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피케티가 수집한 장기 통계자료에 따르면 자본수익률은 거의 일정한 수준에서 유지되었고 이렇다할 하락 현상을 관찰할 수 없었다. 그는 평균적인 자본수익률이 대체로 4-5% 수준에 유지되어 왔고, 이것이 2-3% 수준으로 떨어진 사례는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이는 자본주의경제 발전의 역사에서 줄곧 r>g의 관계가 유지되어 왔으며, 이에 따라 불평등성은 점차 심화되어 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바로 거의 7백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논의를 통해 얻은 결론이다. 피케티에 따르면, 다만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인 우연이 개입된 나머지 1914년에서 194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평등화로의 일시적인 반전이 일어난 것일 뿐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자본은 세계대전으로 인한 타격을 충분히 회복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자본은 상당한 회복세를 보이고, 21세기에 들어옴에 따라 19세기 말 Belle Époque의 상태로 완전히 회복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1] 엑기스 중 엑기스. 그리고 이 부분에 내가 비행소년님이 제시한 그래프 중 '비행소년님의 주장에 반대되는 현상이 있는 기간(연도)이 있다'라는 의문제기에 대한 해답. 


전문은 아래를 클릭. 쭈욱 읽어도 될만큼 쉽게 썼다.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