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공감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을 거절하는것은 그만큼, 그(녀)에게 있어 공감능력이 지배적이라는 뜻이다. 진화의 개념에 따르면 생존을 목적으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의존 및 의지' 가 최선이었을때 발달될 수밖에 없었을것이 공감능력이니 단지 공감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거절하는 그(녀)를 이해능력의 부족으로만 이해하는것 역시 에러다. 그(녀) 입장에서 공감되지 않는 타인은 제 생존의 목적에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에 불과할테니.

한편 진보의 개념에 따르면 생존에 소요되는 생산의 극대화를 목적으로 '인간의 도구에 대한 의존 및 의지' 가 최선이었을때 발달될 수밖에 없었을것이 이해능력이니 생산의 극대화가 목적이 아닌 사람에게 굳이, 이해능력을 요구할 필요까지는 없는것이다.

이때 목적이 다르면 그 목적에 부합하게 갖추어나아가게 되는것 또한, 다를수밖에 없다. 학문이 목적인 사람에게 상대주의는 경계의 대상이지만 정치가 목적인 사람에게 상대주의는 친화의 대상인 것이다.



얼마전 모든 사람들의 목적이 얼마나 천차만별인지 인식한 이후로 인간관계는 본질적으로, '목적간 동일성' 이 맺어주는 거라는걸 깨닫게되었다. 쉽게말해, 목적간 동일하지 않으면 그냥 '남남' 이다. 여기까진 기승전결의 기이다. 남은 승전결은 아래와 같다.

목적간 동일하지 않은 남남끼리 인간관계를 억지로 맺으려하니 또는, 맺을수밖에 없을때 정당화된 서열이 필요하고 정당화된 서열 유지코자 '정당한 권력' 이 등장한다. 목적간 동일하면 정당화된 서열이 불필요하니 '정당한 권력' 도 등장하지 않을텐데 말이다. 결과적으로, 동일하지 않은 최소 2이상의 목적간에 '우선순위' 가 부여되는것이 정당화된 서열의 증거요, 정당한 권력의 현상이다.

따라서 정당한 권력의 등장을 미연에 방지하여 그에 전제되는 정당화된 서열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목적간 동일하지 않은 남남끼리 인간관계를 억지로 맺으려하지 않음이 선행되면 될것이요, 억지로 맺을수밖에 없을때는 칼과총을 들어서라도 궐기봉기하게 되는것이다.



쌍도패권을 부정하고 그에 저항하는 전라도는 경상도 말마따나 21세기에도 여전히 깽깽대는 것이 아니라 그옛날에 벌써, 경상도의 목적이 제 전라도의 목적간 동일하지 않음을 인식한 것이다. 이걸 모르면 22세기에도 전라도만 씹어댈 수밖에 없다. 근데 이걸 알면 오늘 지금 당장에라도 전라도의 눈물을 공감할수 있으며 이해할수 있게되며 나아가, 전라도에게 충청도는 경상도 꼬봉, 강원도는 경상도 호구로 비춰질 수밖에 없음을 목격하게 되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