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 노무현 대통령의 '모택동을 존경한다'는 발언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난받는 언행들 중 하나는 바로 '모택동을 존경한다'라는 발언이다. 그런데 그 비난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첫번째는 조걉제류로 '한국인의 운명에 영향을 끼친 점을 중심으로 기술하면서' '한국동란에서 김일성을 지원한 모택동을 어떻게 존경할 수 있는가?'라는 내용의 비난이며(관련 글은 여기를 클릭) 또 다른 하나는 '히틀러보다 네배는 더 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모택동을 어떻게 존경할 수 있는가?'라는 내용의 비난이다.


 

여기서 두가지의 의문이 떠올려진다. '발언의 내용'과 '발언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왜 노무현은 모택동을 존경했을까?'하는 의문이다. 그리고 이런 의문과 함께 떠올려지는 '역사적 사실'이 하나 있다. 모택동이 삼국지의 조조를 상찬하면서 제갈량과 손권을 같이 언급했지만 막상 삼국지의 주인공인 유비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 말이다.



이 의문들의 핵심 단어는 바로 실용주의이다. 그리고 그 실용주의에 얽힌 역사의 굴레를 살펴보면서 모택동이 단지 '히틀러보다 네배는 더 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잔학무도한 정치인에 불과한가?'라는 탐구의 흔적을 글로 남기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2. 노무현의 문제가 되는 발언


방중 사흘째 노무현 대통령은 중국 방문 사흘째인 9일 베이징 칭화대학 연설을 통해 동북아시아평화번영 구상을 역설했으며, 만리장성과 현대자동차 베이징 공장을 시찰한 뒤상하이로 이동했다. (중략) 그는 존경하는 중국 지도자를 꼽아달라는 질문에 “마오쩌뚱과 덩샤오핑”이라며 "두 분은 시대를 나누어서 중국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왔다. 아마 한분이 다하기 벅차서 두 분이 나눠 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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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발언의 진심 여부에 대하여는 나는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중국을 방문한 2003년 7월 두달 전인 5월에 노무현은 미국을 방문했으며 미국에서 '미국이 없으면 나는 수용소 생활을 했을 것'이라는 발언을 넘어 이미 미국의 부시와 '이라크 파병을 합의해놓고는' 귀국하여 합의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야당 및 재야 원로는 물론 종교지도자들까지 청와대에 불러 '이라크 파병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는 척 하는 쇼라는 작태를 벌린 것이 노무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언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보면 절묘한 발언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만일 노무현이 모택동만을 언급했거나 또는 등소평만을 언급했다면 중국 내에 반발을 야기시킬 수 있으며 나아가 중국의 국가의 결정 사항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반기를 든 결과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81년 6월 27일,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건국이래의 몇가지 역사적 문제에 대한 당의 결의(중국어 간체: 建国以来党的若干历史问题的决议, 정체: 建國以來黨的若幹歷史問題的決議)》 를 발표하여 건국 이후 발생한 여러 사건에 대한 당의 공식 입장을 보여주었다. 이 문건은 "문혁의 좌편향의 과오, 그리고 이러한 과오가 거대한 규모로 장기간 지속된 것에 대한 책임은 마오쩌둥 동지에게 있다"고 명시하였다.


또한 "문화 대혁명은 마오쩌둥의 잘못된 지도하에서 행해졌으며, 이것은 다시 린뱌오 및 장칭 등의 반동세력 등에게 포섭되어 당과 인민에 수많은 재난과 혼란을 범했다"고 밝혔다. 이 문건은 현재 중국 역사 해석의 주된 뼈대가 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후에도 계속 중국공산당에서 발표되는 문건에서는 문화대혁명은 부정적 의미로 쓰이고 있다. (중략)


최근에는 중국공산당 내에서 문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신좌파(新左派)" 또는 영문으로는 "뉴레프트(New Left)"라고 불리는 일파가 생겨났다. 이들은 문혁 기간동안 산업이 급속도로 성장하였고, 이것이 이후 고도성장을 가능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후의 역사적 노정을 볼때 마오가 문혁기간동안 자본주의 지향적인 특권관료제의 폐해를 우려한 것은 옳았다고도 주장한다. 마오쩌둥은 이들과 싸우기 위해 문화 대혁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또한 문혁 기간동안에 보장되었던 "언론과 결사의 자유"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또한 개방 정책으로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지자 중국의 많은 빈농과 노동자는 문화 대혁명과 마오시대에 대해 좀 더 긍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가오모보와 같은 빈농 출신 작가는 문화 대혁명이 농촌에 미친 긍정적 영향을 작품에 서술하기도 하였다. 또한 마보 등의 어떤 작가들은 문혁이 기억할만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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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노무현에 대한 혐오감이야 이미 널리 알려져 있어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런 정치적인 발언에서 그 것도 같이 언급한 '등소평'은 쏙 빼놓고 모택동만 언급하여 비난해대는 우파들의 조아한 인식은 노무현에 대한 혐오감 이상의 혐오감을 느낀다. 특히, 그들이 극찬했던 정상회담의 성과에 대한 보도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반면에 생뚱맞은 박근혜의 패션쇼나 보도하고 찬양했던 우파들의 한심한 작태를 쳐다보고 있노라면 한숨도 나오지 않는다.



3.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노무현의 발언과 '등소평의 발언은 우파의 복권운동'이라고 했던 모택동의 발언의 공통점


노무현은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었다. '제정신을 가지고는 할 수 없는 발언'이지만 노무현이 '모택동과 등소평을 존경했다'는 발언과 연결시켜 놓고 해석해 보자면 중국 문혁 시절 4인방의 위력 앞에서 풍전등화와 같았던 등소평을 위한 모택동의 안배를 한 이유와 역사적 맥을 같이 한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중국 공산당의 공식적인 입장은, 등소평의 '정신은 계승하고 과오는 수정한다'는 주장을 적극 받아들여 '민족지도자로서의 모택동'과 '정치인으로서의 모택동'을 분리하여 평가하고 있지만 과연 난도질 수준의 평가는 적당한 것일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나의 판단은, 물론, 노무현의 진중하지 못한 언행은 아무리 비판받아도 부족한 것처럼 모택동이 문혁 내내 정치에 개입하여 문혁의 상태를 유지하려 했던 것은 비난받아야 마땅하겠지만, 프랑스의 샤르트르의 적극적인 옹호를 생각한다면, 그리고 뉴레프트 운동이 생기고 있다는 것을 판단한다면, 모택동은 정말 실패만을 한 정치인일까?하는 생각이 들며 이런 생각의 끝에 노무현에 대한 평가와 맞물려진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노무현의 발언과 '등소평의 발언은 우파의 복권운동'이라는 모택동의 발언은 이 글의 주제인 '실용주의'에서 맞물린다. 당연히 부언하자면, 대통령이라는 벼락감투를 쓴 노무현의 조야한 철학 세계와 20세기 초반에 장개석과 중국의 미래를 놓고 '한판 승부를 벌여야 했던' 모택동의 철학세계는 감히 비교의 대상이 되지 못하겠지만, 결과로 평가받는 세상사 이치에서 특히 더욱더 결과를 중요시하는 정치판에서 노무현은 이명박이라는 존재 때문에 그리고 모택동은 등소평이라는 존재 때문에 그 평가의 출발점이 달라진다.



4. 실용주의자로서의 모택동


사실, 모택동을 실용주의자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계보학상 어처구니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분명히, 모택동의 사상은 마오쩌뚱주의라고 해서 마르크스-레닌주의가 그 근본에 자리매김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중국의 과거 주나라의 대동사상이 모택동 사상의 근본 중 하나이고 그 대동사상이 평등주의라는 것에 판단한다면, 또한 실용주의가 '철학이 아니라 상식'이라는 판단에 근거한다면, 그리고 실용주의의 정의가 '다수에 의한 다수의 행복'이라는 것에 의한다면 모택동의 사상과 행적은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주장해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특히, 모택동이 생전에 조조를 상찬하고 지도자의 덕목으로서 손권과 제갈량은 언급하면서 유비는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마오쩌둥주의가 반지주, 반지식인의 태도를 '충분히 표출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실용주의로서의 일면을 드러내는 것이다.



조조와 유비는 단지 삼국지연의에서의 '소일거리'로 읽는 인물이 아니다. 중국의 위대한 황제 세 명 중 한명으로 꼽히는 당태종 이시민이, 고구려를 침략할 때 '승전을 위하여 조조에게 제사를 지낸 역사적 사실'이나 중국 역사 상 최초의 '민중시인'이라는 두보가 '조조는 상찬하면서' 유비는 언급조차 하지 않은 사실들은 중국의 역사를 관통하는 '실용주의'와 '관념주의'의 대결구도에서 모택동을 실용주의자로서 자리매김해도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비록, '저 새 참 나쁜 새'라는 잘못된 손가락질 하나 때문에 수천만명의 아사자를 내는 비극을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그리고 그 결과가 직간접적으로 문화혁명을 야기시키는 했지만 그런 '과오'가 모택동의 실용주의자로서의 위치를 바꾸지는 못한다. 



그리고 아마도... 노무현은 실용주의 정치인이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었을까? 열린우리당 시절 '정동영'과 '김근태'의 실용주의 노선 싸움에서 정동영의 승리가 그 증거 아니었을까? 비록 모택동과 같이 노무현 역시 '철저하게' 정치적 실패를 한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계속됩니다.)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