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누에 님의 올렸던! 글의 취지에는 얼추 동감합니다. (여기서 글은 미누에 님의 글)

!그 글을 읽고 난! 내 생각은 인터넷 친구한테 전해 들은 기사 한 꼭지랑 비슷해서 겸사겸사 올립니다.

내가 읽은 글에서 다음 문장이 핵이 되겠네요,

///그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행위를 비난한다고 해서 그게 그들(주간지 만화가들)의 이데올로기를 용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니까///


묘한 게, 미누에 님이 '테러에도 도가 있다'는 표현을 썼는데 나는 이 기사 번역하면서 파일 제목을 '과유불급'으로 달았더랬습니다.


Unmournable bodies

By Teju Cole

 

http://www.newyorker.com/culture/cultural-comment/unmournable-bodies

 

애도 받지 못하는 주검들

테쥬 콜

 

A northern-Italian miller in the sixteenth century, known as Menocchio, literate but not a member of the literary élite, held a number of unconventional theological beliefs. He believed that the soul died with the body, that the world was created out of a chaotic substance, not ex nihilo, and that it was more important to love one’s neighbor than to love God. He found eccentric justification for these beliefs in the few books he read, among them the Decameron, the Bible, the Koran, and “The Travels of Sir John Mandeville,” all in translation. For his pains, Menocchio was dragged before the Inquisition several times, tortured, and, in 1599, burned at the stake. He was one of thousands who met such a fate.

 

16세기 이탈리아 북부에서 방앗간을 하던 메노키오는 식자층까진 아니지만 글은 깨우친 사람이었는데 파격적인 종교적 신념을 많이 지니고 있었다. 그는 몸이 죽으면 영혼도 죽는 것이고 세상은 무가 아닌 혼돈 상태의 물질에서 생겨났으며 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게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이러한 믿음을 두고서 데카메론, 기독교 경전, 이슬람 경전, 그리고 존 맨데빌 경의 여행등 자신이 읽은 번역본 서적 몇 권에서 기발한 정당화 논거를 찾아냈는데, 그 고심의 대가로 종교재판에 몇 차례 끌려가 고문을 받았으며 1599년 화형 당해 죽었다. 그와 같은 운명을 맞이한 이들이 수천 명이었다.

 

Western societies are not, even now, the paradise of skepticism and rationalism that they believe themselves to be. The West is a variegated space, in which both freedom of thought and tightly regulated speech exist, and in which disavowals of deadly violence happen at the same time as clandestine torture. But, at moments when Western societies consider themselves under attack, the discourse is quickly dominated by an ahistorical fantasy of long-suffering serenity and fortitude in the face of provocation. Yet European and American history are so strongly marked by efforts to control speech that the persecution of rebellious thought must be considered among the foundational buttresses of these societies. Witch burnings, heresy trials, and the untiring work of the Inquisition shaped Europe, and these ideas extended into American history as well and took on American modes, from the breaking of slaves to the censuring of critics of Operation Iraqi Freedom.

 

지금에 와서도 서구 사회는 자신들이 그렇다고 믿고 있는 회의주의와 합리주의의 천국은 아니다. 서구는 다채로운 공간이다.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엄격한 규제가 공존하며 치명적인 폭력에 대한 부정과 은밀한 고문이 함께 한다. 그러나 서구 사회가 공격을 받고 있다고 보는 시점에는 그 도발에 맞서 끈질긴 침착함과 의연함이 재빨리 담론을 주도한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 역사를 보면 표현을 통제하려는 노력이 무척 뚜렷하여 이들 사회의 기본 버팀목 중 하나로서 반체제 사상에 대한 처벌을 고려해야 한다. 마녀 화형, 여론 재판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종교재판이 유럽을 만들어냈고 이들 아이디어는 미국 역사로도 확장되어 노예 조련에서 이라크 자유 작전 비판에 대한 검열 등등 미국식 색채를 띠게 되었다.

 

More than a dozen people were killed by terrorists in Paris this week. The victims of these crimes are being mourned worldwide: they were human beings, beloved by their families and precious to their friends. On Wednesday, twelve of them were targeted by gunmen for their affiliation with the satirical French magazine Charlie Hebdo. Charlie has often been aimed at Muslims, and it’s taken particular joy in flouting the Islamic ban on depictions of the Prophet Muhammad. It’s done more than that, including taking on political targets, as well as Christian and Jewish ones. The magazine depicted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Ghost in a sexual threesome. Illustrations such as this have been cited as evidence of Charlie Hebdo’s willingness to offend everyone. But in recent years the magazine has gone specifically for racist and Islamophobic provocations, and its numerous anti-Islam images have been inventively perverse, featuring hook-nosed Arabs, bullet-ridden Korans, variations on the theme of sodomy, and mockery of the victims of a massacre. It is not always easy to see the difference between a certain witty dissent from religion and a bullyingly racist agenda, but it is necessary to try. Even Voltaire, a hero to many who extol free speech, got it wrong. His sparkling and courageous anti-clericalism can be a joy to read, but he was also a committed anti-Semite, whose criticisms of Judaism were accompanied by calumnies about the innate character of Jews.

 

이번 주에 파리에서 테러리스트들 손에 열 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세계 각지에서 이 범죄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있다. 그들은 인간이었다. 가족에게서 사랑받고 친구들에게는 소중한. 이번 주 수요일, 이들 열두 명은 프랑스 풍자 잡지 샤를리 엡도 소속이라는 이유로 총잡이들의 과녁이 되었다. 샤를리는 이슬람교를 자주 대상으로 삼았으며 이슬람교에서 선지자 모하메드를 그림으로 그리는 일을 금지하는 모습을 비꼬면서 특히 재미를 맛보았다. 샤를리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기독교와 유대교 뿐 아니라 정치적 목표물 따위 더 많은 것들을 다루었다. 이 잡지에서는 기독교 성부, 성자, 성신을 쓰리섬 성행위로 묘사하였다. 이와 같은 삽화는 샤를리 엡도가 누구든 모욕하려는 의사를 지녔다는 근거로서 사람들 입에 올랐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들어 이 잡지는 구체적으로 인종주의자와 이슬람 혐오주의자들을 자극하는 길을 택하였고 거기 실린 수많은 반이슬람 이미지들은 머리를 굴려 삐딱하게 그려낸 것으로서 매부리코 아랍인, 총탄 투성이 코란, 비역질을 주제로 한 변형물들 그리고 학살 희생자들에 대한 조롱이 등장하였다. 종교를 두고서 어떤 재치 있는 반론을 펴는 것과 약자를 괴롭히는 인종주의 의제, 양자를 구분해내는 일이 언제고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런 노력을 기울일 필요는 있다. 표현의 자유를 극찬하여 많은 이들에게 영웅이 된 볼테르마저도 그 점에서는 잘못이 있었다. 성직자 세력을 겨냥하여 볼테르가 쓴 번뜩이고 대담한 글들은 읽는 기쁨을 줄 수 있지만 볼테르는 동시에 반유대주의자였으며 유대교를 비판할 때면 유대인의 타고난 특성에 대한 비방이 들어 있었다.

This week’s events took place against the backdrop of France’s ugly colonial history, its sizable Muslim population, and the suppression, in the name of secularism, of some Islamic cultural expressions, such as the hijab. Blacks have hardly had it easier in Charlie Hebdo: one of the magazine’s cartoons depicts the Minister of Justice Christiane Taubira, who is of Guianese origin, as a monkey (naturally, the defense is that a violently racist image was being used to satirize racism); another portrays Obama with the black-Sambo imagery familiar from Jim Crow-era illustrations.

 

이번 주에 벌어진 사건은 프랑스의 추악한 식민주의 역사, 꽤 많은 이슬람 인구 그리고 세속주의란 이름으로 히잡 등 이슬람 문화 양식을 억누르는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흑인들이라고 해서 샤를리 엡도에서 결코 나은 대접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잡지에 실린 만화 한 편을 보면 기아남 출신 법무장관 크리스티앙 토비라를 원숭이로 묘사하고 있다(자연히 그 변명은 인종주의를 풍자하는 차원에서 폭력적인 인종주의자 이미지를 쓰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만화에서는 오바마를 짐 크로 시대의 삽화에서 가져온 익숙한 흑인 삼보 풍으로 그려내고 있다.

 

On Thursday morning, the day after the massacre, I happened to be in Paris. The headline of Le Figaro was “LA LIBERTÉ ASSASSINÉE.” Le Parisien and L’Humanité also used the word liberté in their headlines. Liberty was indeed under attackas a writer, I cherish the right to offend, and I support that right in other writersbut what was being excluded in this framing? A tone of genuine puzzlement always seems to accompany terrorist attacks in the centers of Western power. Why have they visited violent horror on our peaceful societies? Why do they kill when we don’t? A widely shared illustration, by Lucille Clerc, of a broken pencil regenerating itself as two sharpened pencils, was typical. The message was clear, as it was with the #jesuischarlie hashtag: that what is at stake is not merely the right of people to draw what they wish but that, in the wake of the murders, what they drew should be celebrated and disseminated. Accordingly, not only have many of Charlie Hebdo’s images been published and shared, but the magazine itself has received large sums of money in the wake of the attacksa hundred thousand pounds from the Guardian Media Group and three hundred thousand dollars from Google.

 

 

학살 다음 날인 목요일 아침, 나는 어쩌다 보니 파리에 있었다. 르 피가로(Le Figaro)의 머리기사는 암살당한 자유(LA LIBERTÉ ASSASSINÉE)”였다. 르 빠리지앵(Le Parisien)과 엘 휴매니띠(L’Humanité) 또한 머리기사에 liberté라는 어휘를 썼다. 자유는 실제로 공격을 받았지만 작가로서 나는 공격할 권리를 소중히 여기며 다른 작가들에게도 그 권리를 옹호한다이 틀 짓기에서 무엇이 빠졌던 것일까? 테러리스트가 서구 패권의 심장부를 공격할 경우 언제나 정말 어리둥절하다는 태도가 따르는 것 같다. 그들은 왜 평화로운 우리 사회에 끔찍한 공포를 선사했던 것일까? 우린 그렇지 않는데 왜 그들은 사람을 죽이는 것일까? 루실 클레르크가 그려 많이들 알고 있는 삽화인, 끝이 뾰족한 연필 두 자루로 재탄생하는 부러진 연필이 전형적인 예였다. #je suis Charlie(나는 찰리입니다)라는 해시태그(: 소셜 미디어에서 해당 단어에 대한 글임을 알리는 기호)와 마찬가지로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분명했다: 비단 사람들이 그리고자 하는 것을 그릴 권리가 위험에 처했다는 것 뿐 아니라 살인극이 벌어진 이후 희생자들이 그렸던 것을 기념하고 전파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샤를리 엡도의 이미지 다수가 공개되어 사람들이 보게 되었을 뿐 아니라 공격 이후 이 잡지사 또한 많은 돈을 받았다 -가디언 미디어 그룹에서 십 만 파운드 그리고 구글에서 삼십 만 파운드.

 

But it is possible to defend the right to obscene and racist speech without promoting or sponsoring the content of that speech. It is possible to approve of sacrilege without endorsing racism. And it is possible to consider Islamophobia immoral without wishing it illegal. Moments of grief neither rob us of our complexity nor absolve us of the responsibility of making distinctions. The A.C.L.U. got it right in defending a neo-Nazi group that, in 1978, sought to march through Skokie, Illinois. The extreme offensiveness of the marchers, absent a particular threat of violence, was not and should not be illegal. But no sensible person takes a defense of those First Amendment rights as a defense of Nazi beliefs. The Charlie Hebdo cartoonists were not mere gadflies, not simple martyrs to the right to offend: they were ideologues. Just because one condemns their brutal murders doesn’t mean one must condone their ideology.

 

하지만 그 표현 내용을 장려하거나 검열하지 않고서 음란 표현 및 인종주의 표현을 할 권리를 옹호할 수 있다. 인종주의를 승인하지 않고서 신성모독을 승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슬람혐오주의가 불법이길 원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슬람 혐오주의를 윤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애도하는 시간을 보낸다 하여 우리네 복잡함이 가시는 것도, 우리가 구분을 지어야 할 책임을 벗는 것도 아니다. 그런 면에서 A.C.L.U19878년에 미국 일리노이즈 주 소코키에서 행진을 벌이려 했던 신나찌 집단을 제대로 옹호한 것이었다. 구체적인 폭력 위험은 논외로 하고, 행진하는 이들의 극단적인 모욕행위(offensiveness)는 불법이 아니었고 불법이 아니라야 했다. 하지만 양식 있는 이라면 미국 수정헌법 제1조를 나찌 신념의 변호책으로 들고 나오지는 않는다. 샤를리 엡도 만화가들은 그저 잔소리꾼도, 그저 모욕할 권리를 추구한 순교자도 아니었다. 그들은 공론가(ideologue)였다. 그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행위를 비난한다고 해서 그게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용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니까.

 

Rather than posit that the Paris attacks are the moment of crisis in free speechas so many commentators have doneit is necessary to understand that free speech and other expressions of liberté are already in crisis in Western societies; the crisis was not precipitated by three deranged gunmen. The U.S., for example, has consolidated its traditional monopoly on extreme violence, and, in the era of big data, has also hoarded information about its deployment of that violence. There are harsh consequences for those who interrogate this monopoly. The only person in prison for the C.I.A.’s abominable torture regime is John Kiriakou, the whistle-blower. Edward Snowden is a hunted man for divulging information about mass surveillance. Chelsea Manning is serving a thirty-five-year sentence for her role in WikiLeaks. They, too, are blasphemers, but they have not been universally valorized, as have the cartoonists of Charlie Hebdo.

 

많은 논평가들처럼 이번 파리 습격을 언론 자유에 위기가 닥친 순간이라고 받아들이기보다는 서구 사회에서 언론의 자유 그리고 여타 자유의 표현은 이미 위기에 처해 있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정신이 나간 총잡이 세 명이 그 위기를 촉발한 게 아니니까. 예를 들어, 미국(정부)은 기존의 극단적 폭력 행사 독점권을 강화하였고 빅데이터 시대에 그 폭력의 배치를 다룬 정보도 비축하였다. 이 독점을 추궁하는 이들에겐 가혹한 대가가 따른다. C.I.A의 끔찍한 고문 통치 시절에 유일하게 투옥된 이는 내부고발자인 존 키리에쿠이다. 에드워드 스노우든은 대규모 원격감시 정보를 폭로한 이유로 수배 중이다. 첼시 매닝은 위키리크스에서 맡은 역할 때문에 35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이다. 그들 또한 불경죄를 저질렀지만 세계 각지에서 그들을 샤를리 엡도 만화가들처럼 대접하지는 않는다.

 

The killings in Paris were an appalling offense to human life and dignity. The enormity of these crimes will shock us all for a long time. But the suggestion that violence by self-proclaimed Jihadists is the only threat to liberty in Western societies ignores other, often more immediate and intimate, dangers. The U.S., the U.K., and France approach statecraft in different ways, but they are allies in a certain vision of the world, and one important thing they share is an expectation of proper respect for Western secular religion. Heresies against state power are monitored and punished. People have been arrested for making anti-military or anti-police comments on social media in the U.K. Mass surveillance has had a chilling effect on journalism and on the practice of the law in the U.S. Meanwhile, the armed forces and intelligence agencies in these countries demand, and generally receive, unwavering support from their citizens. When they commit torture or war crimes, no matter how illegal or depraved, there is little expectation of a full accounting or of the prosecution of the parties responsible.

 

파리에서 벌어진 살인은 인간의 생명과 존엄을 끔찍하게 침해한 일이다. 이 범죄의 심각성은 우리에게 오랫동안 충격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자칭 이슬람 성전 전사(Jihadist)들의 폭력이 서구사회의 자유에 대한 유일한 위협이라는 주장은 더 즉각적이고 은밀할 때가 적지 않은 다른 위험을 무시하는 것이다. 미국, 영국 그리고 프랑스는 국정운영 방식이 다르지만 세상을 두고서 어떤 전망을 공유하는 면에서 동맹국이며 그들이 공유하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서구 세속 종교를 걸맞게 존중하라는 기대이다. 공권력을 두고 소문을 퍼뜨리면 감시와 처벌을 받는다. 영국에서는 소셜 미디어에 군대나 경찰에 반하는 발언을 올린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미국의 경우 대규모 원격감시는 저널리즘과 법률 실무에서 오싹한 효과를 발휘해왔다. 한편, 이들 국가의 군대와 정보기관들은 그 시민들에게 확고한 지지를 요구하여 대개 그 지지를 받는다. 그들이 고문이나 전쟁 범죄를 저지를 경우 불법이나 부패 정도에 관계 없이 그 책임 당사자들이 제대로 해명을 하거나 이들이 처벌 받으리라는 기대는 별로 없다.

 

The scale, intensity, and manner of the solidarity that we are seeing for the victims of the Paris killings, encouraging as it may be, indicates how easy it is in Western societies to focus on radical Islamism as the real, or the only, enemy. This focus is part of the consensus about mournable bodies, and it often keeps us from paying proper attention to other, ongoing, instances of horrific carnage around the world: abductions and killings in Mexico, hundreds of children (and more than a dozen journalists) killed in Gaza by Israel last year, internecine massacres in the Central African Republic, and so on. And even when we rightly condemn criminals who claim to act in the name of Islam, little of our grief is extended to the numerous Muslim victims of their attacks, whether in Yemen or Nigeriain both of which there were deadly massacres this weekor in Saudi Arabia, where, among many violations of human rights, the punishment for journalists who “insult Islam” is flogging. We may not be able to attend to each outrage in every corner of the world, but we should at least pause to consider how it is that mainstream opinion so quickly decides that certain violent deaths are more meaningful, and more worthy of commemoration, than others.

 

파리 살해사건 희생자들을 두고서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연대의 규모와 강도 그리고 방식을 보자면 -그게 힘이 되어줄 수도 있겠으나- 서구 사회에서 이슬람을 현실의 적, 아니면 유일한 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게 정말이지 손쉽다는 걸 알게 된다. 이 초점은 얼마간, 애도할만한 주검이라는 공감대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 때문에 우리가 지구촌에서 지속적으로 벌어지는 다른 끔찍한 대학살 사례에 온당한 관심을 보이지 못하는 일이 잦다. 멕시코에서 벌어진 유괴와 살인, 지난 해 이스라엘군이 가자에서 죽인 수 백 명의 어린이들(그리고 열 명이 넘는 언론인들),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내부의 대학살 등등. 또한 우리가 이슬람의 이름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범죄자들을 당연스레 비난할 때도, 예멘이든 나이제리아든 -두 국가에서 이번 주에 끔찍한 대학살이 있었다- 또는 많은 인권 침해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슬람을 모욕한 언론인들에게 태형을 가하는 사우디 아라비아에서든, 그 공격을 받은 무수한 이슬람인 희생자들에게까지 우리의 애도가 이어지는 일은 별로 없다. 우리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잔학 행위에 하나하나 관심을 보일 수는 없을지 모르나 적어도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 주된 여론이 끔찍한 어떤 죽음들이 다른 죽음들에 비해 더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그토록 신속히 결정하는 얼개는 무엇인지 숙고해 보아야 한다.

 

France is in sorrow today, and will be for many weeks to come. We mourn with France. We ought to. But it is also true that violence from “our” side continues unabated. By this time next month, in all likelihood, many more “young men of military age” and many others, neither young nor male, will have been killed by U.S. drone strikes in Pakistan and elsewhere. If past strikes are anything to go by, many of these people will be innocent of wrongdoing. Their deaths will be considered as natural and incontestable as deaths like Menocchio’s, under the Inquisition. Those of us who are writers will not consider our pencils broken by such killings. But that incontestability, that unmournability, just as much as the massacre in Paris, is the clear and present danger to our collective liberté.

 

지금 프랑스는 슬픔에 잠겨 있고 앞으로 여러 날을 그렇게 보낼 것이다. 우리는 프랑스와 함께 애도한다. 그래 마땅한 일. 하지만 다음 달 이맘 때가 되면, “징집 연령의 젊은이들”, 그리고 어리지도 않고 남자도 아닌 이들이 파키스탄 등지에서 미국 드론기의 공습으로 더 많이 죽어 나가고 있을 것이다. 과거의 공습에서 뭐라도 참고할 게 있다면 이들 중 다수는 범법행위를 저지르지 않을 터이다. 이들의 죽음은 종교재판에 회부된 메노키오의 죽음처럼 자연스럽고 반박의 여지가 없는 죽음으로 간주될 게다. 우리 글쟁이들은 그런 죽음 때문에 우리의 붓이 꺾일 것이라고 보지는 않을 테고. 하지만 우리네 집단 자유를 놓고 보자면 파리에서 벌어진 학살만큼이나 그 반박 불가능, 그 애도 불가능은 분명하고도 눈앞에 있는 위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