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래 쉬고 끌었다. 이번으로 적당히 마무리할 것이다. 마루에서 잠을 자다 깨어나 어머니가 안 보여 울음보 터트렸다는

장면에서 승전-

 내 울음이 너무 요란하고 맹렬했기 때문에 주위에서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의 집 더부살이인데 마당이 떠나가라

울어대니 누나들과 형제들이 내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때 세째 형이 어디선가 바람처럼 나타나 나를 들쳐 업었다. 그 형은 나와

일곱살 터울이다. 이 형에 관해서는 할 얘기가 태산 같은데 여기서는 뒤에서 간략히 소개하겠다. 내가 3살이라 하더라도 형은

겨우 10세일 것이다. 나를 들쳐 업은 형이 어머니가 가셨다는 이웃 동네 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 집은 지방 유지의 집으로 한옥

이지만 깨끗한 기와집이고 마당도 무척 넓었다. 마루에는 흰 옷 입은 부인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내가 왔다는 전갈을 받고 어머

니가 방안에서 나와서 나를 나무랐다. "아이고, 잠깐 마슬 나왔는데 그 새(시간)를 못 참냐?"

그러고는 아마 어머니가 형에게 '내가 곧 집에 돌아갈테니 애를 데리고 빨리 집에 가 있거라." 라고 말했던 것 같다. 형은 나를 다시

들쳐업고 집으로 돌아왔고 잠시 후 어머니도 돌아왔다.

그때 그집 마루에 모였던 그 흰옷 입은 부인들의 모습이 마치 무슨 명화의 한 장면처럼 지금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당시

한국 여인들은 거의 흰옷 아니면 검정색 옷을 입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대개는 무명으로 지은 저고리와 치마를 입었고

형편이 좀 나은 사람은 옥양목 저고리와 치마를 입었다.

자, 여기서 나이를 한번 따져본다. 내 남자 아우가 나와 두살 터울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그때 아우가 젖먹이 상태로 있었다는

얘기다. 젖먹이 아우가 있는데도 내가 애기행세를 했다는 걸 보면 세살은 넘지 않는다. 네살 짜리 아이를 10세 남아가 들쳐업고

1킬로 이상을 간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사실 내 기억도 여기서 멈춘다. 그래서 셋째 형이 나를 들쳐업고 가던 시간과

흰옷 입은 여인들을 보던 장면이 공식적으로는 내 최초의 기억의 시발점이 되며 그때문에 유독 기억에 또렷히 남는 것이다.

일곱살 터울의 형-나는 11남매 속에 자랐는데 남자 여덜, 여자 셋- 이 형제들 가운데 제일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이 이 세째 형

이다. 그는 천사표였고 음악에 특별한 재능을 지녔고 특히 내겐 평생동안 잊을 수 없는 사연을 남긴 형제이다. 그는 중학을 졸

업하던 해 광주로 바이올린 줄을 사러 가다가 버스가 빨치산 습격을 당해 산으로 끌려가서 열입골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그

는 이상하게도 나에게 유독 자상하고 너그러운 형이었다. 가정법은 의미가 없지만 만약 그가 생존했다면 분명히 내 삶은

아주 다른 삶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떠난 이후 형제가 아무리 많아도 내가 진심으로 의논하고 의지할 형제는 한사람도 없게

되었다. 모두가 나에게 피해와 고통을 주는 형제 뿐이었다. 내가 알료샤라고 생각하는 이 형의 얘기를 써놓았으나 수정할 데

가 너무 많아 출간을 미루고 있다. 일단 여기서 이 얘기는 멈춘다. 몇해 전 고향을 찾아가는 방송프로가 있어 내가 태어난 장

소를 찾아갔던 적이 있는게 그 얘긴 다음 기회로 미루겠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 드린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