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시내 한 카페에서 인질극이 벌어졌는데 도시 전체가 마비가 되었고 국가 전체에 비상이 걸렸었다. 이유는 일반 범죄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이기 때문이다. 즉 정치적인 이유일 때는 한 자루의 총이 국가 전체를 흔들 수 있는 것이다. 사건은 16시간의 대치 끝에 3 명이 사망하는 참극으로 끝났다. 사건 배경을 설명하는 수 많은 뉴스 가운데 평소 범인의 변호사였던 이의 코멘트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조현아처럼 성질은 더러워도 지킬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양같이 순해도 잃어버릴 것이 사람이다. 왜냐하면 잃어버릴 것이 없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절망에서 나오는 용기"라고 한다.

젊은 시절 나도 한 때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라는 신념 하나로 살았던 때가 있었다. 아무런 희망이 없기 때문에 불안도 없는 것이다.


조선 시대 춘향이 로맨스의 상징이라면 심청은 효녀의 상징이다. 심청이가 살았을 무렵 조선 땅을 덮은 공기는 ‘충’과 ‘효’를 위해서 존재하고 숨을 쉬는 사회였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봉사의 딸로서 착하게 살아야 하는 조선 땅의 공기를 마시며 살아온 우리의 심청이가 공양미 삼백 석을 절간에 시주하고 인당수에 쓸개치마를 뒤집어쓰고 뛰어내리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오직 천지신명께 아버지의 두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도만 했을까? 

아니면 왜 나는 이렇게 가난한 봉사의 딸로 태어나 삼백 석에 이 푸른 바다에 물귀신이 되어야 하는지 원망을 하면서 뛰어내렸을까? 

아니면 ‘살아봐야 양반집에 시집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효녀라는 칭찬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형편에 이 기회에 확실하게 ‘효녀’라는 소리나 확실하게 들어보자. ‘ 하고 풍덩 뛰어 내린 것은 아닐까?

너무 잔인한 해석 같지만 심청이가 IQ가 높았다면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심청이는 인당수에 다이빙을 함으로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삶에서 도피하는 효과와 동시에 효녀라는 절체절명의 국가, 사회적 이데올로기인 ‘효’의 상징으로 청사에 빛나는 거사를 치른 것이다. 즉 절망에서 우러나오는 용기는 아니었을까?


그러나 절망한 상태에서 심청의 투신자살 같이 살신성인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기적이 일어나는 것에 가깝고 대부분은 부정적, 파괴적으로 나타난다.

자기 목숨 아깝지 않은 사람이 없는 법인데 자살 폭파범들은 왜 폭탄을 안고 죽을까? 자살테러가 일단 철저한 자기희생의 길인 것은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숭고한 자기희생적 신앙적 자세 때문 만인가? 

9.11 테러범이나 영국에서 자란 무슬림들의 자살테러를 보면 분명히 그런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설명이 부족하다. 당사자가 처하고 있는 절망이라고 하는 개인적 분위기를 무시하면 안 된다고 본다.

개인적 절망이 그 시대의 사회적 대의와 결합될 때 인당수에 다이빙을 할 수 있었던 심청이처럼 자살테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실제로 하루하루를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팔레스틴의 젊은이들이 ‘화끈하게’ 살다가 죽는 자살테러를 지원한다고 한다.

사회가 위험해지는 것은 핵무기 때문이 아니고 절망 바이러스가 퍼지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 ‘절망 바이러스’가 점점 퍼져가고 있고 그 근원지는 아무래도 저 높은 청와대 구중궁궐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기대를 저바리지 않고 계속 실망을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