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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nly Church That Illuminates Is A Burning Church (By Slavoj Zizek)

밝게 비추는 유일한 교회는 불타고 있는 교회이다 (슬라보예 지젝)

 

* 출처: <ABC> 종교와 윤리 여론란 / 201188

http://www.abc.net.au/religion/articles/2011/08/08/328794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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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is theology emerging again as a point of reference for radical politics? It is emerging not in order to supply a divine "big other," guaranteeing the final success of our endeavours, but, on the contrary, as a token of our radical freedom, with no big other to rely on.

 

왜 신학이 다시 급진 정치를 위한 하나의 준거점으로 출현하고 있을까? 그것은 우리의 노력의 최종적 성공을 보증하면서 신적 대타자를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의존할 수 있는 대타자를 동반하지 않은 채, 우리의 급진적 자유의 한 증표로서 출현하고 있다.

 

Fyodor Dostoevsky was aware of how God gives us freedom and responsibility - he is not a benevolent master steering us to safety, but one who reminds us that we are wholly unto ourselves.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떻게 신이 우리에게 자유와 책임을 주는지 자각하고 있었다 - 그는 안전한 삶을 살도록 우리를 끌고 가는 자애로운 주인이 아니라 우리에게 우리가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주인이다.

 

The God that we get here is rather like the God from the old Bolshevik joke about a communist propagandist who, after his death, finds himself in hell, where he quickly convinces the guards to let him leave and go to heaven.

 

여기서 우리가 갖게 되는 신은 차라리 한 공산주의 선전선동가에 관한 오래된 볼쎄비키 농담에 등장하는 신과 같다. 그 선동가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는데, 거기서 그는 이내 그가 지옥을 떠나 천국으로 가게 해달라고 경비들을 설득한다.

 

When the devil notices his absence, he pays a visit to God, demanding that He return to hell what belongs to Satan. However, as soon as he addresses God as "My Lord!" God interrupts him: "First, I am not 'Lord', but a comrade. Second, are you crazy, talking to fictions? I don't exist! And third, be short - otherwise, I'll miss my party cell meeting!"

   

그의 부재를 알아차리자 악마는 신을 찾아가 사탄에게 속한 그를 지옥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요구한다. 그렇지만, 악마가 나의 주시여라고 말하며 신에게 다가가자마자 신은 멈춰 세우고 이렇게 말한다: “첫째, 나는 가 아니라 동지이다. 둘째, 허구에게 말을 걸다니, 너는 미쳤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셋째, 요점만 간단히 말하라 - 안그러면 나는 당세포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게 될 것 같다!”

 

This is the kind of God an authentic left needs: a God who wholly "became man" - a comrade among us, crucified together with two social outcasts - and who not only "doesn't exist" but also himself knows this, accepting his erasure, entirely passing over into the love that binds members of the Holy Ghost (the party, the emancipatory collective).

 

이것이 진정한 좌파가 필요로 하는 종류의 신이다: 완전히 인간이 된” - 두 부랑자들과 함께 십자가형을 당한, 우리 사이의 한 동료인 - 신이자 존재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말소를 받아들이면서, 성령의 구성원들을 한데 묶어주는 사랑으로 전적으로 넘어가면서, 그 스스로 이 점을 알고 있는 신.

 

Catholicism is often designated as a compromise between "pure" Christianity and paganism - but what, then, is Christianity at the level of its notion? Protestantism? No. One should take a further step here: the only Christianity at the level of its notion, which draws all the consequences from its basic event - the death of God - is atheism.

 

카톨릭은 종종 순수기독교와 이교 사이의 절충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 그렇다면 자신의 개념에 상응하는 수준의 기독교는 무엇인가? 개신교인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발자국을 더 내딛어야 한다: 자신의 개념에 상응하는, 즉 그것의 근본 사건 - 신의 죽음 - 의 모든 귀결을 끌어내는 유일한 기독교는 무신론이다.

 

The Spanish anarchist Buenaventura Durutti said: "The only church that illuminates is a burning church." He was right, though not in the anti-clerical sense his remark was intended to have. Religion only arrives at its truth through its self-cancellation.

 

스페인 아나키스트 부에나벤투라 두루티는 이렇게 말했다: “밝게 비추는 유일한 교회는 불타고 있는 교회이다.” 그는 옳았다. 비록 그가 의도했던 반교권주의적 의미에서는 아니지만 말이다. 종교는 그것의 자기-폐지를 통해서만 그것의 진리에 도달한다.

 

In "The Intellectual Beast Is Dangerous," Bertolt Brecht asserts: "A beast is something strong, terrible, devastating; the word emits a barbarous sound." Surprisingly, he writes: "The key question, in fact, is this: how can we become beasts, beasts in such a sense that the fascists will fear for their domination?"

   

지적인 야수는 위험하다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주장한다: “야수는 강하고 소름끼치고 파괴적인 어떤 것이다; 그 낱말은 야만적인 소리를 낸다.” 놀랍게도, 그는 이렇게 쓴다: “결정적 물음은, 사실, 이것이다: 어떻게 우리는 야수들이, 파시스트들이 그것들의 지배를 두려워 할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야수들이 될 수 있을까?”

 

It is thus clear that, for Brecht, this question designates a positive task, not the usual lament on how Germans, such a highly cultured people, could have turned into the Nazi beasts. "We have to understand that goodness must also be able to injure - to injure savagery." It is only against this bgcolor that we can formulate the gap that separates oriental wisdom from Christian emancipatory logic.

   

따라서 브레히트에게 이 물음이 어떻게 독일인들이, 그토록 고도로 문명화된 사람들이 나치 야수들로 바뀔 수 있었나에 대한 통상적인 한탄이 아닌, 하나의 적극적인 과제를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선 또한 상처 입힐 수 - 야만인들을 상처 입힐 수 -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 배경에 비추어서만 우리는 기독교적 해방논리와 동양적 지혜를 분리시키는 간극을 정식화할 수 있다.

 

The oriental or Buddhist logic accepts the primordial void or chaos as the ultimate reality and, paradoxically, for this very reason, prefers organic social order with each element in its proper place. At the very core of Christianity, there is a vastly different project: that of a destructive negativity, which does not end in a chaotic void but reverts (and organises itself) into a new order, imposing it on to reality.

 

동양적 또는 불교적 논리는 원초적 진공이나 혼돈을 궁극적 실재로 받아들이며 역설적으로 바로 이 이유로 각 요소가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는 유기적 사회질서를 선호한다. 기독교의 중핵에는 이와는 전혀 다른 기획이 놓여있다: 혼돈에 찬 진공으로 끝나지 않고 되돌아가 자신을 실재에 부과하면서 자신을 새로운 질서로 조직하는 파괴적 부정성이라는 기획.

 

For this reason, Christianity is anti-wisdom: wisdom tells us that our efforts are in vain, that everything ends in chaos, while Christianity madly insists on the impossible. Love, especially a Christian one, is definitely not wise. This is why Paul said: "I will destroy the wisdom of the wise" ("Sapientiam sapientum perdam," as his saying is usually known in Latin).

 

이런 이유로, 기독교는 반()지혜이다: 지혜는 우리의 노력이 헛되다고, 모든 것은 혼돈으로 끝난다고 얘기한다. 반면 기독교는 불가능한 것을 미친 듯이 강조한다. 명백히, 사랑, 특히 기독교적 사랑은 지혜롭지 않다. 이것이 바울이 이렇게 말한 이유이다: “나는 지혜로운 이의 지혜를 부술 것이다” (그의 이 말은 대개 "Sapientiam sapientum perdam"라는 라틴어로 알려져 있다).

 

We should take the term "wisdom" literally here: it is wisdom (in the sense of "realistic" acceptance of the way things are) that Paul is challenging, not knowledge as such. With regard to social order, this means that the authentic Christian tradition rejects the wisdom that the hierarchic order is our fate, that all attempts to mess with it and create another egalitarian order have to end up in destructive horror.

 

우리는 지혜를 여기서 문자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 바울이 도전하고 있는 것은 지식 자체가 아니라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의 현실주의적승인이라는 의미에서의) 지혜이다. 사회적 질서와 관련해서라면, 이것은 진정한 기독교 전통은 위계질서가 우리의 운명이라는, 그것에 간섭해 다른 평등주의적 질서를 창출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파괴적 공포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지혜를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Agape as political love means that unconditional, egalitarian love for one's neighbour can serve as the foundation for a new order. The form of appearance of this love is what we might also call the idea of communism: the urge to realise an egalitarian social order of solidarity.

 

정치적 사랑으로서의 아가페는 이웃에 대한 무조건적인, 평등주의적 사랑이 새로운 질서를 위한 기반으로서 구실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랑의 현상형태는 우리가 또한 공산주의의 이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평등주의적인 사회적 연대 질서를 실현하려는 충동.

 

Love is the force of this universal link that, in an emancipatory collective, connects people directly, in their singularity, bypassing their particular positions in a social hierarchy.

   

사랑은 해방을 추구하는 집단에서 사람들을, 그들의 단일성 속에서, 사회적 위계 속에서의 그들 각각의 특수한 위치들을 우회해,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이 보편적 유대의 힘이다.

 

Indeed, Dostoevsky was right when he wrote: "The socialist who is a Christian is more to be dreaded than a socialist who is an atheist" - yes, dreaded by his or her enemies.

 

실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렇게 썼을 때 옳았다: “사람들은 무신론자인 사회주의자보다는 기독교도인 사회주의자를 더 두려워한다” - 물론 그의 또는 그녀의 적들이 두려워한다는 얘기다.

 

It was St Paul who provided a surprisingly relevant definition of the emancipatory struggle: "For our struggle is not against flesh and blood, but against leaders, against authorities, against the world rulers [kosmokratoras] of this darkness, against the spiritual wickedness in the heavens" (Ephesians 6:12).


해방투쟁을 놀랍도록 적절히 정의한 이는 성() 바울이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에베소서 6:12).

 

Or, translated into today's language: "Our struggle is not against concrete, corrupted individuals, but against those in power in general, against their authority, against the global order and the ideological mystification that sustains it."

 

또는, 오늘날의 언어로 옮기면: “우리의 투쟁은 구체적인, 부패한 개인들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권력자들 일반, 그들의 권세, 전반적 질서 그리고 그것을 지탱해주는 이데올로기적 신비화를 상대로 한 것입니다.”

 

One should resolutely reject the liberal-victimist ideology that reduces politics to avoiding the worst, to renouncing all positive projects and pursuing the least bad option.

 

우리는 정치를 최악을 회피하기, 모든 적극적 기획들을 포기하기, 가장 덜 악한 선택지를 추구하기로 환원시키는 자유주의적-희생제의적 이데올로기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As Arthur Feldmann, a Viennese-Jewish writer, bitterly noted, the price we usually pay for survival is our life.

 

빈 태생의 유태계 작가 아더 펠드만이 신랄하게 지적한 대로, 우리가 대개 생존을 위해 지불하는 대가는 우리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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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avoj Zizek is the International Director of the Birkbeck Institute for the Humanities, University of London, and one of the world's most influential public intellectuals. His most recent book is Living in the End Times (Verso, 2010).

 

슬라보예 지젝은 런던 종합대학교 버벡 인문학 연구소의 국제 디렉터이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공론장 지식인들 중 하나이다. 그의 가장 최근 저서는 Living in the End Times (Verso, 2010)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