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보다는 옥수수를 달라!


내가 살고 있는 곳보다 후진적인 사회에 갔을 때 제일 염려되는 것은 음식이다. 나의 이번 남아공 행은 안정된 한국인 가정으로 갔기 때문에 먹는 일로 신경을 쓰일 일은 없었지만 흑인들은 어떤 음식을 먹는지 관심을 가져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흑인들의 주식은 쌀이 아니라 옥수수였다. 앵? 쌀 아니면 밀가루, 감자를 주식으로 먹는다는 소리는 들어 보았어도 사람이 가축의 사료로나 쓰이는 줄 알았던 옥수수를 주식으로 삼고 있다니?


그러나 한국인들이 옥수수가 동물의 사료로 쓰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김순권 박사 탓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김 박사는 막상 한국인들은 잘 모르지만 노벨상 후보로도 여러 번 올랐던 세계적으로 가장 탁월한 옥수수 박사이다. 그는 옥수수가 세계의 식량문제 뿐 아니라 평화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70년대에 이미 아프리카에서 종자개발에 젊음을 소비했던 사람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요청으로 북한의 옥수수종 개발을 위해 10여 차례 북한을 방문하고 거기서 연구 활동을 하셨던 분인데 4 대강 정부 들어와서는 흑! 그 다음에는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중동과 아프리카에서는 국빈대우를 받는 분인데 금년에 중국에서 극진히 모셔갔다고 한다. 김 박사가 한국 환경에 맞는 사료용 옥수수종을 개발해서 한국 사람은 옥수수가 주로 사료로 쓰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몇 해 전에 아프리카에 기근이 들었을 때 미국에서 유전자조작으로 농사를 지은 옥수수를 보내주겠다고 해서 아프리카에서 반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에게 동물의 사료로 먹이는 옥수수를 먹인다니 이런 죽일 놈들이 있나?"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아니었던 것이었다.


옥수수를 지름 1mm 안팎으로 가루를 낸 것을 쌀밥을 짓듯 짓고 뜸을 들이면 밥처럼 Pop이 된다. 우리도 맨밥을 먹지 않듯이 반찬과 함께 먹는다. 전통적인 반찬으로는 우리의 김치와 비슷한 망고무침도 있고 chakalaka 라는 야채무침도 있고 무엇보다도 거의 항상 고기류와 함께 먹는다. 소고기, 돼지고기, 양고기, 닭고기들을 가공한 소세지류등이 주요 반찬들이다. 구름은 Pop을 너무 좋아해서 출장을 다니면 햄버거 보다는 Pop을 더 선호한다. 그래도 주식으로 삼지 못하는 건 불행히도 어릴 적부터 먹어 버릇한 게 쌀밥이라 몇 배를 비싸게 들여서 억척스레 쌀밥을 주식으로 한다고 한다.

흑인들 가운데 비만이 많은 이유는 바로 이 옥수수밥이 제일 큰 이유일 것이다. 왜냐하면 .

이걸 먹으면 항상 기름진 고기류를 같이 먹게 되기 때문이다.

길거리에서 구운 옥수수 하나 사먹으면 US 1불 정도, 굽지 않은 생옥수수는 0.7불. 물론 가공된 가루는 훨씬 싸다. 옥수수라는 것이 사실 덩지만 컸지 알맹이 양이야 얼마 안 되니까 끼니로 채우려면 3~4개 정도 먹어야 성에 차니까 결코 싸구려 음식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그걸 좋아해도 매끼 먹을 수 없는 사람이 여기엔 무수하다는 뜻이다.


사람이 한 평생 옥수수만 먹고 산다니 평생 쌀만 먹고 살아온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든 일이었다. 만일 내가 쌀 대신 옥수수를 주식으로 먹으면 당연히 내 위장이 받아들이지를 못할 것이다. 그것은 내 머리의 기준이 아니라 위의 기준이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다른 나라 다른 문화권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나의 생각 또한 한국, 혹은 서구화된 시스템과 달라서 받아들일 수없는 것이다. 그런 기제를 대량 생산하는 시스템이 교육이란 것이다. 그러기에 지금 보수 세력이 교과서를 고치려고 그 난리를 치는 것이 아닌가? 자기들의 취향에 맞는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

.

텃밭에다 분명히 한국에서 가져온 종자를 심었는데 막상 수확을 해보니 그 맛이 안 나서 실망한 적이 종종 있다. 땅에서 나고 자라는 식물들이 자연에 맞게 자라듯이 사람 또한 그러한 것이다. 결국 인간은 태어나 자란 곳과 받아드린 교육을 통해서 자기 정체성을 갖게 되는 법이니 사람도 자연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내가 옥수수를 주식으로 삼을 수 없듯이 타인이 먹는 음식을 내 몸이 거부하기도 하고 내 몸이 잘 받아드리는 음식을 타인이 먹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꼽게도 서럽게도 불쌍하게도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하늘로 부터 뚝 떨어져 온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은 인간이 살고 경험한 세계에서 생성된 기억과 습관, 생각과 행동의 조합일 뿐이다. 그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이 종교이다. 중동이나 인도에 가서 예수 믿어야 산다고 선교하시는 분들 참고 좀 하면 좋겠다.


한 번 레인보우나 세세미 스트리트 같은 어린이들을 위한 연속극이나 영화들을 보자. 비록 여러 색깔을 지닌 아이들을 평등한 주인공들로 설정했다 하더라도 이 영화들이 남미나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에 수출되어 그 나라의 아이들이 이 영화를 볼 때 가장 중요한 주인공은 바로 같은 유색인종의 어린이가 아니라 백인 아이들이다. 그것은 오랫동안 백인들의 문화는 고급문화이고 선진문화라고 배워왔고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서 그렇게 오랫동안 학습 받아왔기 때문에 비 서구 아이들의 눈에는 백인 아이들이 우월하고 선진적인 문화를 대표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특히 비 서구 아이들에게도 오랫동안 서구 백인들의 중심된 제국주의의 역사를 직, 간접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더욱 백색문화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자신도 모르게 백인 문화에 종속되어 어렵고 힘들게 번 돈을 자신의 미래를 위하여 투자하는 것이 아니고 형편에 비해 비싼 가발을 사면서까지 백색문화를 추구하게 된 것이다.


남아공에서 허덕이면서 서구화를 따라가기에 바쁜 흑인들의 모습으로 보면서 언젠가 읽었던 산악인들에 대한 책이 떠올랐다. 에베레스트 등정대가 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지역 출신의 세르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 중에는 어떤 산악인보다 8,000m급을 많이 오른 셰르파가 있었다. 셰르파들은 8,000m급 등정을 마치면 등정 팀의 초대를 받는데 등정 팀의 초대를 받고 이 나라 저 나라를 구경하고 고향에 돌아온 그는 술로 신세를 한탄하거나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문명을 보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비루한 삶을 의식한 것이다. 문명에 노출된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닌 것이다.


아내를 여럿 두고 싶어?


남아공은 기본적으로 일부다처가 보장되는 나라이다. 일부다처는 이곳의 줄루족에게는 오랜 전통이고 회교도들에게는 당연한 제도이다. 현 대통령 주마는 현재 서너 명의 부인을 두고 있는데 마지막 부인과는 재작년에 결혼 했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 이 문제가 이슈가 된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완전히 명문화 되었다고 들은 바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부인을 여럿 가진 사람이 거의 없다. 남녀를 불문하고 이것이 대화의 소재가 되는 것조차 반기지 않는다. 법이 보장함에도 결코 일부다처가 사회에서 환영받지는 못한다는 또한 재미있는 현상이다.

줄루 족과 같은 Nguni족에 속하는 스와질란드의 스와지족의 왕이 매년 결혼식을 하는 오랜 전통이 있다. 얼마 전 부인 중 하나가 영국으로 망명하면서 국제적 비판을 받아선지 스스로 힘에 부쳤는지 이제는 그만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 곳 역시 왕을 제외하고는 여러 부인을 둔 남성은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나 인식이 높아졌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아프리카 대부분 부족의 전통에 이곳 말로는 lobola 라고 하는 게 있다. 이는 남자가 여자를 부인으로 맞으려면 여자의 아버지에게 주어야 하는 소를 말한다. 소를 몇 마리 요구하고 주느냐에 따라 결혼 여부가 결정되는 그냥 전통 정도가 아니라 아주 강하고 오래된 풍습이다.

이 풍습의 장단점을 외부인이 파악하기는 쉽지 않을 테지만 이로 인해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을 보자면 좀 황당하다. 여자 가족들은 10마리 안팎의 소를 원하는 경우가 보통인데 한국 돈으로 천만 원이 넘는다. 이 돈을 내지 못하면 같이 살고 있고 애를 여럿 낳아도 아무 상관 않지만 정식 결혼은 허용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그냥 사실혼 관계만 유지하고 있는 커플이 많고 이 풍습은 대부분의 여성들을 미혼모로 만들고 있다. 바람네 회사의 자녀 딸린 흑인 여성들은 거의 다 미혼모이든지 미혼모였다. 전통적으로는 애 아빠가 책임을 다해야하지만 슬그머니 사라진 경우가 허다하다.

또 다른 면으로 흑인들의 문화를 들 수 있는데 원래 줄루족이 주류인 남아공 흑인들은 "네 것, 내 것이 없는" 것이 기본 정서이다. 지금도 이런 전통이 남아 있어서 도시로 몰려온 흑인들 가운데 같이 사는 동료가 실직을 해도 나누어 먹는 것에서 별로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의 이러한 미풍양속(?)은 공무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되어서 친구나 친척의 부탁이 사회의 법률이나 도덕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친척이나 친구가 갱이면 경찰이 함부로 체포를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경찰이나, 경비 업체의 정보를 공유해줘서 그들의 범죄를 돕기까지 한다.


안전하다고 판단되었던 외곽지역 민박집 등도 가끔씩 털리는 이유가 경비나 가정부가 그들의 친척이나 지인의 부탁에 못 이겨서 집 열쇠를 넘기기 때문이다. 이런 끈끈한 유대감 때문에 그들은 동료나 이웃이 잘못한 일에 대하여도 절대로 고자질을 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흑인들끼리는 좋을지 몰라도 그들을 고용하는 입장에서는 흑인들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매우 곤란한 것이다.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


요한네스버그에서 600 Km 떨어진 남아공 안에 있는 레소토라는 다른 나라를 갔다. 백인들이 전혀 없는 남아공보다도 경제 형편이 더 어려운 인구 200만의 왕국이었다.

한 눈에 둘러보면 다 보이는 손바닥만 한 수도의 한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하는데 한 명 뿐인 웨이터가 초보자임에 분명해 보였다. 주문을 받으러 온 그의 얼굴을 보고 내가 아주 곤란한 기분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가 어쩔 줄을 몰라 곤란해 하는 표정이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말 한 마디라도 잘못하면 금방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착하고 선량한 인상을 한 웨이터는 갓 시골에서 올라와 서울역에 떨어진 표정이었다. 식사가 다 끝나고 테이블에서 계산을 끝낸 다음에 다른 손님도 없는데 내 테이블을 떠나지 않고 우물쭈물 하고 서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마 팁을 바라는 모양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1000원의 팁을 주었다. 그랬더니 입으로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탱큐"라고 하기는 했지만 더욱 더 아주 곤란한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다.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나중에 바람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폭소를 터트리면서 "아마 그 청년은 왜 팁을 주는지도 몰라서 그랬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시골에 가면 그런 얼굴 많아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남아공을 떠나서도 한 동안의 흑인들의 어정쩡한, 자신 없어 하는 얼굴들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외부에 노출해도 다치지 않을 만한 환경에 있는 사람만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다. 적어도 무능한 가장이 술 먹고 집에서 가족들을 상대로 마음 놓고 주정을 하듯이 자신의 내부세계와 외부세계가 충돌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감정표출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흑인들은 자기들의 생존 기반이 너무도 약하기 때문에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나 같은 이방인으로서 표정은커녕 사람도 그 얼굴이 그 얼굴 같아서 누가 누구인지도 구분이 잘 안가지만 남아공 경찰은 얼굴만 보고도 남아공사람인지 아닌지를 구분을 해서 다른 나라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을 잡아 간다고 한다. 형식상 법으로는 외국인 고용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외국인이 노동을 하다가 잡혀가면 돈을 주고 빼온다고 한다. 흑인들의 표정을 읽고 자존심 상하지 않게 관리를 하면서 보호해 주고 앞길을 열어주려는 바람 부부의 노력은 끝이 없어 보였다.


외국에 나가 본 사람들은 한국인들의 얼굴이 얼마나 굳어있는지를 피부로 느끼게 된다. 한국 사람이 원래 그런 민족이었을까? 아니다. 3000만 인구 중에 1/10인 300만이 희생된 6.25 전쟁을 치룬 후 인심이 흉흉했던 탓일 것이다. 아니, 그 이전 100년 전에 2000만 인구 중 5,60여 만 명이 희생당한 동학 혁명에서부터 일제 강점, 6. 25 내란까지 근세 한국의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한 시라도 인상을 펴고 살 수가 없었던 탓일 것이다. 한국인의 무뚝뚝하게 굳은 얼굴 표정은 처절한 근대사에서 비롯된 만성적 긴장증후군이 아닌가 싶다.

세계의 온갖 민족이 사는 호주에서 제일 인상이 더러운 민족은 레바논계이다. 이 사람들 왜 인상이 그런지는 설명이 필요 없다. 레바논 계는 60년대 내전 때 대거 호주로 피난 온 사람들인데 그 때 찌그러진 인상이 아직도 안 펴지고 있다.


백만장자 예언자


흑인들은 조상 숭배가 기저를 이루고 있는 전통적인 유교 문화권인 한국 보다 조상 숭배 경향이 더 강하다. 죽은 조상들의 삶이 살아 있는 가족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것은 현대인들이 쉽게 받아드리기 어렵지만 흑인들의 조상 숭배는 주술적 현상마저도 포함해서 강력하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현대의 남아공에서 젊은이들은 그들의 씨족과 가족들을 뒤로 한 채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야만 한다. 그러나 남아공 흑인문화에서 정체성(identity)이란 공동체(community)의 개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따라서 전통적 구조가 도시화로 인해 붕괴되면서, 도시의 흑인들은 원래 그들의 정체성과 공동체의 개념을 확립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만 했다. 그런 면에서 조상숭배가 흑인들로 하여금 백인들의 압제에 대해 대항적 모습을 취했다는 면에서 자신들을 통합시키는 장치(mechanism)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백인들에게 밀리면 밀릴수록 조상숭배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절박한 성격을 띠었을 것이며, 19세기 서구 세력의 위협으로 무너져가는 현실 앞에서 그들 자신의 전통과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영적 닻(anchor)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된다.


그런가 하면 완전 날라리 순 사기꾼 야바위 종교가 사람을 홀리는 것은 한국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이다.

호주 ABC 방송에서 남아공의 한 백만장자 자칭 예언자에 대한 BBC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토착 종교와 혼합 종교가 무성한 아프리카이지만 정말로 별난 스스로 예언자를 자칭하는 그는 매주 마다 고급 양복점에 가서 양복을 새로 사서 입고 손가락에는 큰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고급차를 타고 항상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4 명의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대단한 연예인처럼 요란뻑적지근하게 다녔다. 교회 안에서는 예언자가 축복했다는 각종 물품을 팔아서 돈을 벌었다. 실제로 그의 모든 행동은 대형 연예인 급이어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모으고 전혀 권위적이지 않고 아무하고나 잘 어울리고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쇼멘쉽을 발휘했다.

내가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대형 교회 안에 가득 찬 신자들이 한 손으로는 새로 산 가장 좋은 팬티를 머리 위로 높이 흔들면서 한 손으로는 자기의 성기에 손을 대고 축복하는 장면이었는데 상상을 뛰어 넘는 연출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조금만 상식을 가지고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사기꾼 같아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추종하고 그를 위해서 가난한 신자들이 헌금을 할 수가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내가 납득될 수 있었던 것은 한 교인에 대한 인터뷰이었다. 그것은 리포터의 비판적 질문에 대해서 그 교인은 “그는 특별하다. 그가 우리와 똑 같이 가난하고 힘이 없다면 우리가 왜 그를 믿겠는가?”하는 답이었다.


그것을 보고서 나는 어째서 이미 한국 사회에서 윤리적으로나 법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판단이 끝난 김홍도, 조용기 목사 같은 이를 따르는 신자들이 아직도 많은가 하는 의문이 비로소 이해가 될 수 있었다. 인간이 미개할수록 약자에 대한 연민 보다는 강한 자편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 큰 법이다.

예수는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라."고 했지만 인간은 여전히 열매를 보지 못하고 무성한 나뭇잎만을 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남아공에서는 아직도 흑인들을 희생적으로 섬기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목사나 선교사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주변에 소수의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중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기회가 있으면 약한 그들은 털려고 하는 약탈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이고 대형교회 목사는 두렵고 섬길 대상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흑인들은 힘이나 능력을 가진 비인격적, 초자연적 존재를 믿는 수준이어서 마법, 주술, 요술 등의 신비적 힘이 영향을 미친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마법적 힘이 존재한다는 믿고 이러한 힘에 접근하게 해주는 수단, 즉 의식, 주문, 부적 등을 믿고 그런 마술적 힘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거나 개인적 능력으로 이루어낸 특별한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 이런 초능력이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능력이 있다는 본능적 믿음을 가지고 그들의 개인적 목적달성을 위해 이에 의지하므로 대형교회 목사와 신도들은 본질적으로 상호의존적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나도 예수를 쎄게 믿으면 무언가 남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어서 십여 년간을 하송 세월을 보낸 일이 있었다. 그래도 그렇게 믿는 사람들의 숫자가 점차 줄어드는 한국은 그나마 남아공 보다 수준이 낫다고 스스로 위로를 받아야할까?


떠나기 전 날 저녁에 함께 살고 있는 흑인 직원들과 바비큐를 했다. 가정부인 남아공 흑인 메기와 영어를 잘 못하는 3 명의 말라위에서 온 흑인들이었다. 애초에 바람이 그들끼리 편하게 먹도록 하자는 것을 내가 차별하는 것 같아서 같이 먹자고 해서 본의 아니게 어색한 식사 자리가 되고 말았다. 다함께 대화를 하려면 영어로 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으니 말없이 밥을 먹어야 하는데 묵언수행을 하는 것도 아니니 자연히 우리끼리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서 말없이 밥을 먹는데 우리끼리 마음껏 떠드는 것도 어색한 일이라서 그만 엄숙한 수도원 식사가 되고 말았다.

바람 부부는 평소에 말 없는 흑인들과 함께 생활을 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기에 이상할 일이 전혀 없을 터이지만 나로서는 마치 주인과 하인들이 함께 밥을 먹는 것처럼 매우 이상한 식사자리였다. 경영자와 직원의 관계에다 인종적인 차이에다 언어소통의 한계를 가진 관계이니 흑인들에게 편한 자리일 수가 없는 것이다.

말이 잘 안 통한다는 것은 내 쪽에서만 아니라 상대편에서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말이 통하지 않을수록 우리는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하여 온 관심을 집중 시켜서 표정에서라도 상대의 뜻을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영어를 잘 못하는 흑인과 이야기를 하면 알아듣기 위해서 애를 쓰는 표정을 읽을 수 있다. 그런 사정을 잊어버리고 공연히 배려를 한답시고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해서 흑인 직원들을 불편하게 만든 것이다.


가기 전부터 가장 궁금했던 점은 바람 부부가 결코 동등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과연 흑인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현장에 가서 내가 느낀 것은 바람 부부는 흑인들에 대하여 배려하고 흑인들은 그것을 감사로 받아들이는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남아공에서 나는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에서 세계관의 혼돈을 경험했다. 왜냐하면 외견상으로 한 눈으로 바라보아도 느껴질 수 있는 결코 평등할 수가 없는 사회는 내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이었기 때문이다. 남아공은 비록 법적으로는 평등하지만 사회 환경이나 경제적으로 도저히 평등할 수 없는 사회이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는 크게 이슈로 제기되고 있는 甲乙 관계로 본다면 바람 부부와 흑인들의 관계는 바람이 갑이라면 흑인들은 절대적으로 을인 것이다.


바람 부부는 을의 입장이 아닌 갑의 입장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가를 터득한 것이다. 갑과 을의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 조화를 이루어 가는 것은 서로간의 깊은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곳에 막상 와보니 아무리 흑인들을 위한다고 해도 그들과 공동생활을 하는 것은 의식의 차이, 문화의 차이, 소득의 차이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면서 왜 구한 말 조선에 온 선교사들이 조선인들과 분리되어 자기들끼리 선교사촌을 이루어 살았고 학교를 세웠던 이유를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남아공에 와서 선교사들이 비록 한국 교회에 근본주의적이고 교파적인 해악을 남기기는 했지만 한국을 깨우치기 위해서 모진 노력을 했던 것을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잠깐 선교사들의 선교방법을 생각해보고 넘어 가자. 서구 선교사들이 피선교지의 형편과 수준에 따라 선교비를 사용하는 방법에는 3 가지가 있었다.

첫째, 선교비를 현지인들에게 맡기고 재량껏 쓰게 하는 방법.

둘째, 현지인들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영수증 받는 방법.

셋째, 처음부터 끝까지 선교사들이 돈을 쓰는 방법.

이상에서 선교사들이 취했던 방법이 첫째는 일본, 둘째는 한국, 셋째는 아프리카라고 보면 된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남아공에서 시계 바늘이 돌아가듯이 모든 것이 안정되고 정연한 호주로 돌아와 보니 마치 청룡 열차에서 방금 내린 느낌이었다. 정신 좀 차리고 요점을 정리해보자.

물론 호주에는 남아공이 불안하기 때문이거나 일자리를 찾아서 호주로 온 백인들이 많다. 또 남아공으로 갔던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성공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바람과 구름처럼 한국에서 절망했다가 남아공에서 희망을 찾은 사람도 있다. 그들은 한국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남아공에서 이루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위험이 기회이기도 한 것이다.

결론이다. 한국에서 할 일이 없는가? 그러나 목숨을 걸고 이루어야 할 목표가 있는가? 그렇다면 남아공으로 떠나라. 그곳에서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시범을 보여줄 조교가 있다. 이미 말했잖은가? 외인부대 지원병을 붙잡아서 평생 써먹고 있다고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