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파쌍의 <산골 외딴집 이야기>라는 단편을 보면 프랑스 귀족 집안 가족이 여름에는 알프스 언덕의

별장에 와서 한철을 보내고 겨울이 다가오면 도시-빠리?로 다시 떠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가족

중 따님 하나가 산장의 집지기 정년을 못 잊어하는 얘기가 줄거리라고 기억된다. 너무 오래 되어 기

억이 정확한지 모르겠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 담배 사러 밖에 나가기도 겁이 난다. 담배 심부름은 가족에게 시키기가 미안

해서 되도록 한밤중에라도 옷을 두껍게 입고 가까운 편의점으로 가서 담배를 사오는데 또 요즘에는

사재기를 막는다고 보루로 팔지도 않고 겨우 서너갑 정도 구할 수 있으니 이틀이 멀다 하고 담배 사

러 나가야 한다. 바깥 외출이 겁나는 것은  체온이 갑자기 떨어지는 걸 극력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몸이 말라서 그런 이유 아니라도 추위 견디는 게 쉽지가 않다. 방에 앉아 쌀쌀한 공

기가 멤도는 창 밖 풍경을 바라보면서 불현듯 따뜻한 남국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전부터 이런 공상을 해왔었다. 추운 겨울에는 타이완으로 가서 한겨울을 지내고 봄이 되면

돌아온다. 반대로 더위가 극성을 피우기 시작하는 초여름 쯤에는 모스크바로 떠난다. 모스크바의

여름은 여행자에게 그야말로 천국이다. 선선한 초가을 날씨에 외국 관광객도 많아서 거리가 활기

를 띠고 도시 여기저기 널려있는 숲의 공원들이 한층 푸르름을 뽐내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한번도

공상을 현실로 바꿔내지 못했다. 타이완이건 모스크바건 몇차례씩 다녀오긴 했지만 단순하게 추위

와 더위를 피한다는 순수한? 목적으로 그곳을 다녀온 적은 없다는 얘기이다.

 

 지금쯤 타이완 공항에 내리면 후덥지근한 남국의 열기가 확 전신에 몰려온다. 전에 <화렌>이야기

에도 쓴 바 있지만 공항 앞 광장 거리에는 커다란 잎새가 너풀거리는 야자수들이 즐비해서 자신이

추운 북국에서 갑자기 남국으로 떠나온 것을 실감할 수가 있다. 타이페이는 번화한 현대도시이지만

나는 그곳에는 별다른 매력을 못 느낀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은 화렌, 코발트 색 바다가 있고 대리석

계곡이 있고 오룡차(烏龍茶) 판매점들이 즐비한 아기자기한 상가거리가 있고 맛있는 타이완식 만

두를 파는 식당이 있는 화렌이다. 그곳 바닷가 언덕 위에 있는 중간급의 숙소에 거처를 정하고 반팔

셔츠만 입고 한가롭게 바닷가를 거니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 그런데 지금은 공상일 뿐 현실

은 아니다.

그까짓 타이완 쯤이야 몇푼이나 든다고...?  당장 떠나면 되는 것 아닌가. 서울에서 불과 한시간 반?

길어야 두시간이면 가볍게 건너갈 수 있는 지척 아닌가. 그렇지만 생활이란 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여기서 할 일도 여전히 만만치 않게 내 손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나는 독신자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이건희 옹도 아니다. 이옹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와병 전엔 그는 하와이나 남부 일본

에서 추운 겨울을 가끔씩 지내고 했던 갓 같다. 어느 기사를 봤더니 일천억을 주고 새 비행기도 구

입한 모양인데 그 비행기가 지금 놀고 있는 게 조금 아깝기도 하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공상에만 젖어있을 수 있겠는가. 이번 겨울을 지나고 다음 겨울에는 공상을

현실로 바꿔볼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 담배를 태우면서 그 궁리를 열심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