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옷차림도 그렇지만  행동거지가 무척이나 정숙했고 요즘 여성 답지 않게 수집음을 많이 탔다. 말소리도 크게 내지 않고

들릴듯말듯 소리를 죽여 겨우 또박또박 몇 마디를 했다.

"부끄럽지만 선생님께 제가 쓴 글을 꼭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원고 가져오셨으면 주세요. 근데 여기서 보긴 그렇고 집에 가져가서 봐야 합니다. "

그녀는 원고가 담긴 큰 종이봉투를 조심스럽게 내 앞에 내놓았다.

"나는 평소 남의 글 보는데 매우 인색하단 소릴 듣습니다. 물론 자신에게도 인색하죠.  "

나는 이런 때 흔히 하던 소릴 또 했다. 칭찬에 인색하단 소리는 전부터 동료 작가들에게서 자주 들어왔다.

"그럼, 다음 주 0요일 같은 시간에 여기서 다시 만나기로 하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를 찻집에 남겨놓고 먼저 찻집에서 나왔다.

 

 일주일은 눈 깜박할 사이에 흘러간다. 이날 나는 출판사 사장실에 잠시 들렀다가 약속한 시간이 되자, 원고

를 들고 찻집으로 나갔다. 그녀는 지난번과 같은 옷차림으로 같은 자리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척

긴장된 표정이었다. 나는 우선 커피를 시켜 한모금 마신 뒤 심호흡을 한차례 하고 나서 이 아리땁고 예의 바

른 작가지망생을 향해 주저없이 첫 마디를 던졌다.

"집에서 원고를 자세히 봤는데요. 소설은 그만 두시는 게 좋겠어요. "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 왜 그토록 잔인한 화법을 썼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된다. 나는 이리저리 돌려서 얘

기하는 걸 상대를 기만하는 나쁜 습성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상대방이 가급적 빨리 자신을 파악하게끔 돕

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처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는 어조를 조금 낯춰 사유를 간명하게 설명했다.

"이야기는 많이 가지신 것 같은데 문장이 안 되어 있어요. 그래서 가닥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소설은 내 생

각에 이야기 보다 문장이고 문체입니다. 문체가 없으면 소설은 무의미해요. 그러니 차라리...."

아리땁고 예의 바른 작가지망생은 입도 벙긋 못하고 숨을 죽인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담배 한모금을

피운 뒤 이번에는 조금 부드러운 어조로 좀 더 친절한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드라마를 써보세요. 이야기는 많이 가지신 것 같으니 그쪽이 유망하겠어요. 요즘 소설가 보다 드라마 작가

들이 훨씬 좋습니다. 구태여 소설에 매달려 허송할 필요가 없지요."

처자의 얼굴이 수치심과 모욕감으로 빨갛게 상기된 걸 나는 보았다. 당시만 해도 소설은 고상한 것이고 드라

마는 그야말로 요즘 유행어로 찌라시 같은 거라는 인식이 강했던 것이다. 소설 지망생에게 난데없이 드라마

쓰라는 소리는 모욕도 이만저만 모욕이 아니었다. 물론 나는 당시에도 장르에 매달리는 그런 고정관념은 갖

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전망하기에 앞으로 드라마가 유망할 거라는 예상도 하고 있었다. 나의 난데없

는 드라마 권유에 처자는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물러났다. 그녀가 당장에는 나로부터 받은 모

욕감?에 몹시 괴로왔을 거라고 나는 추측한다. 그런 뒤 그녀를 다시 만난 일은 없다. 그리고 작가회의 소강

당에서 그녀의 조카라는 시인으로부터 인사를 전해들은 것이다.

 

드라마 작가 조소해는 한때 김수현을 능가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고 앞서도 언급했지만 시청율 기록을

오래동안 보유했다고 한다. 그런데 앞길이 창창한 나이에 여성들에게만 나타나는 모종의 암을 만나 그만

요절해버린 것이다. 이 얘기도 한참 뒤에 들어서 알게 되었다.

그때 뒷골목 찻집에서 고즈넉한 자세로 내 얘기에 귀기울이던 그 곱던 모습이 가끔 어른거린다. 나의 폭탄

선언을 듣고 수치심과 모욕감으로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으면서도 내게 조금도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던 예의바른 그 모습이 가끔 떠오른다. 운명이 참 야속하고 가혹하다는 걸 다시 느낀다.

님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