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들이 받은 녹봉을 보면 녹봉으로는 우리가 보는 양반 주택이나 노비를 거느리고 살 수가 없지요

그러니까 대부분의 관리들이 선대로부터 내려오던 호족들이나 땅 많은 지주들 가문의 자녀들이었다는 것이지요

아니면 다들 뒷돈을 받아 생활을 했다고 봐야지요

아무리 그 시대가 가난했다고해도 이런 급여체계로 500년이나 나라가 유지되었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입니다.

여기에는 아예 관리도 아닌 아전이나 각 관청에 소속된 노비들의 식사나 의복 서리들의 급료 이런것은 어떻게 해결했고 또 준다한들 그걸로 먹고 살수 있는 정도가 아닌데 말이지요


그래서 실직과 허직이 있고 한 자리에 세명을 임명해서 돌아가면서 교대로 근무하고 근무한 달만 급여를 받았습니다.

특히 무감이나 무관 벼슬직등이 그런 경우가 많았지요

나라입장에서는 벼슬로 인심쓰고 유사시에는 다 부려먹을 수 있고 급여는 한 사람몫만 주면 되고 뭐 참 

당시 관리들 정원이나 이런 것을 보면 숫자가 그다지 많지 않은데 그런 정도 급여도 제대로 줄 수 없을만큼 나라가 가난했다는 것이지요

뭐 상업이나 공업 무역을 거의 팽게치고 오직 농사만으로 먹고 사는 나라였으니 그렇다고 하지만 좀 심하지요

현실이 이러니 왕도 사실 관리들이 비리를 저질러도 뭐라고 할수가 없고 파당에 속하지 않거나 재수없이 정치적 건으로 걸려서 탄핵을 받으면 

걸린놈만 재수없게 되는 것이지요



출처

http://goddls1.innori.com/11


조선시대 관리들의 봉급 정도를 살펴보면 재미있는게 후대로 가면 갈수록 봉급 액수가 줄어든다는 겁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는 이걸로 어떻게 먹고 사나 싶을 정도로 줄어듭니다.

조선 전기의 녹봉은 1년에 4번 주게 되어 있고 액수는 품계에 따라 나누는데 가장 높은 정 1 품은 중미(中米) 14섬, 현미 48섬, 조·보리·밀·콩 등 35섬, 주(紬) 6필, 정포(正布) 11필, 저화(楮貨) 10장을 주고, 가장 낮은 종 9 품은 현미 8섬, 잡곡 4섬, 정포 2필, 저화 1장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주는 명주를, 정포는 무명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가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타격으로 녹봉 액수가 다음과 같이 줄어들게 됩니다. 정 1품이 쌀 11석, 전미 2석, 콩 4석이고 종 9 품은 쌀 2석에 콩 1석이라는 도저히 생계유지가 불가능할 정도의 액수를 지급받습니다. 이때가 인조 25년 (1647) 이었으니 이 정도 녹봉도 겨우겨우 였을겁니다.

그로부터 얼마뒤인 경종 11년 (1670)에 가면 녹봉 액수가 다소 늘어납니다. 정 1품이 쌀 11석에 콩 6석, 명주 2필, 정포 2필을 받고 종 9품이 쌀 2석, 콩 2석, 명주 1필, 정포 1필을 받게 됩니다. 역시 1년에 4번 지급되고 여름에는 명주 대신 마포(삼베)로 지급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음 왕인 숙종조에 들어서면 녹봉 액수가 계속해서 줄어들어 숙종 27년 (1701)에는 결국 1년에 4번 주던걸 매월 지급하는걸로 마꾸고 명주와 정포도 제외합니다. 이때 정 1품이 1달에 쌀 2석 12말, 콩 12말을 받게 되었다는군요.

이런 쥐꼬리보다 가벼운 봉급 체제는 결국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장려하는(?) 요인이 되었고 조선후기 세도정치와 맞물려 조선사회에 막대한 타격을 주게 됩니다.


참고로 봉급과 비교할 자료를 찾다가 당시의 무기 제조비용을 올려봅니다. 

각궁 - 쌀 2가마 7두 5승
화살 - 일반 화살인 장전은 1부 (30발)에 쌀 1가마, 편전은 쌀 10 말
환도 - 쌀 2가마 5말
창 - 쌀 2가마, 단 삼지창과 요구창은 4가마 5말
조총 - 쌀 3가마 5말
갑옷 - 의복 내부에 쇠나 가죽 조각을 쇠못으로 박아 고정시킨 두정갑의 경우 쌀 16가마 10말 쇠투구는 4가마 5말, 합이 21가마..... (영의정 8달치 월급과 맞먹는군요.....) 

이 시대 물가는 보통 쌀 1가마에 상평통보 4~5냥이었고 좁쌀 1가마는 3냥, 콩 1가마는 2냥, 소금 1가마는 2냥에서 비싸면 4.5냥, 무명이나 베 1필은 2냥 이었답니다.

참고로 군인 봉급은 훈련도감 기준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보병-- 매월 쌀 4말이 초봉, 그후 승급해서 최대 9말까지이다.

기병-- 매월 쌀 10말에 콩 3말, 말을 못받으면 쌀 9말로 깍는다. 

여기에 봉족료(일종의 수당?)가 매년 무명 9필씩 나옵니다. 그외 패두등의 직책을 맡으면 쌀 1말에 좁쌀 2말, 겸사복(세자 호위병)을 맡으면 쌀 3말의 추가 수당이 지급됩니다. 임금님 거동하시는데 따라가면 돈 4전을 준다는군요. (이 시절에도 수당으로 먹고 살았던거냐?)

그리고 참고로 당시 성인 남자의 쌀 소비량은 1끼에 7홉이었습니다. (세상에.....-_-)

한편 갑오경장 (1895)때 화폐 제도의 개혁과 함께 관리들의 봉급도 현물에서 현금으로 바뀌게 됩니다. 먼저 품계에 따라 차등을 두어 정1품이 월 300원, 9품이 월 15원 이었는데 나중에 관리들의 봉급 액수를 살펴보면 최고인 총리대신이 연봉 5000원, 각부 대신은 (지금의 장관 입니다) 연봉 4000원 이었고 가장 낮은 9품은 연봉 120원 이었답니다. 참고로 당시의 말단 경찰관이던 순검의 1달 봉급은 7원, 병졸의 봉급은 3원 50전(물론 의식주가 제공됩니다) 이었답니다.

당시 물가는 쌀 1말이 1냥 (이건 백범일지 기준입니다), 서울에서 전주로 보내는 전보 열자에 2냥, 편지는 1통에 1전 내지 2전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19권 - 오백년 왕국의 종말' 참조 입니다) 이었는데 보통 2냥을 1원으로 쳤답니다.


(참고로 구한말 화폐제도는 상당히 문란했던 것 같습니다. 갑오경장때도 화폐단위는 여전히 냥이었는데 여기에 1901년에 발행한 신식 화폐인 환과 일본 화폐인 원이 혼용되고 더하여 정부는 백동화를 마구 찍어내고 위조 화폐까지 합해져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답니다.우리가 보통 엽전으로 일컫는 상평통보도 계속 유통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