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글은 http://acro.pe.kr/zbxe/?document_srl=4709 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정전 선생의 오늘자 프레시안 칼럼입니다. 생각해 볼 거리가 많이 있는 것  같아서 전문을 퍼옵니다.

 원문 출처는: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626184114&Section=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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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열흘 전 그러니까 6월 13일에 한국철학회 정기학술대회가 서울대학교에서 있었다. 이번 학술대회의 주제는 "시장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었다. 최근 미국발 세계 경제위기로 시장경제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탓인지 혹은 근래 대학에서 철학과가 자꾸 없어지고 있던 터에 이명박 정부의 반인문학 정책기조에 위기를 느낀 탓인지 그날 유례없이 많은 철학자들이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 시장이 대학에서 인문학을 몰아내고 있다는 점에 상당한 정도로 공감하는 분위기에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주장과 옹호하는 주장이 충돌하였고, "시장에 의한 대학 식민화" 문제가 논의되었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주제들을 다루다보니 깊이 있는 토론이 부족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아쉬움은 다른 학술대회에서도 늘 반복된다. 우리나라 토론문화에 무언가 변화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철학은 가치를 다루는 학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학술대회가 인간의 욕망이나 선호의 차원에서 시장의 문제를 좀 더 깊이 논의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자본주의 시장은 인간의 욕망, 특히 물질적 욕망을 가장 잘 충족시켜주는 제도라고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자랑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의한다. 시장에서는 돈만 있으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살 수 있다. 심지어 마약이라든가 성매매 등과 같이 불법적인 것이나 부도덕한 것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원해서 시장에서 어떤 상품을 살 때 아무도 왜 그것을 원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정당한지 아닌지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돈만 내면 무조건 살 수 있다. 이것이 시장의 특징이다. 성매매시장에 나가면 아무도 성매매가 부도덕하다고 말리지 않는다. 시장에서는 우리의 욕망은 절대적이다. 기업은 그런 인간의 욕망을 어떻게 잘 충족시켜서 돈을 많이 벌 것인가에 골몰한다.

경제학은 시장을 주된 연구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이나 선호를 주어진 것으로 간주한다. 그것이 정당한지 아닌지, 도덕적인지 아닌지를 따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경제학도 인간의 욕망을 절대적 가치로 인정한다. 경제학은 그 주어진 욕망과 선호를 최대한 잘 충족시켜주는 수단을 연구할 뿐이다. 경제학에서 인간의 욕망은 목적의 위치에 있고 이성은 수단의 위치에 있다. 철학적으로 보면 바로 이점이 경제학의 가장 큰 특징이요, 또한 가장 못마땅한 부분이기도 하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라는 속담도 있지만, 최근 심리학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인간의 욕망은 충족되는 정도에 비례해서 더 커진다. 20평짜리 아파트를 사면 곧 30평짜리 아파트를 사고 싶고, 30평짜리를 사고 나면 곧 40평짜리가 사고 싶어진다. 소득수준이 높아지면 사람들은 더 높은 소득수준을 향해서 달린다. 이런 현상을 놓고 심리학에서는 포부가 형성된다고 말한다. 이들이 실험해본 바로는 가진 것에 비례해서 가지고 싶은 것이 늘어난다. 가진 것이 10% 늘어나면, 가지고 싶은 것도 10% 정도 늘어난다. 경제학적으로 말하면 탄력성이 대략 1에 가깝다.

▲ 이번 금융위기가 발발하기전 미국인들의 평균 저출률은 0에 가까웠다. 이들은 오랫동안 부동산담보로 빚을 얻어서 흥청망청 돈을 써왔다. 이런 '비이성적 과열'은 결국 미국의 경제위기를 가져왔고 나아가 전 세계의 경기침체를 초래했다. ⓒ로이터=뉴시스
지난 반세기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의 소득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졌다. 이에 따라 이들 나라 국민들의 욕망도 계속 커졌다. 시장에는 인간의 욕망을 제어하는 제동장치가 내재되어 있지 않다. 물론, 경제학자들은 각 개인의 소득이 욕망 충족에 대한 절대적 제약조건이라고 말하지만, 지난 수십 년 미국의 경험을 보면 별로 그렇지도 못하다. 미국인의 평균 저축률은 거의 0에 가까웠다. 이 말은 중저소득계층의 저축률이 마이너스였음을 의미한다. 이들은 매우 오랫동안 부동산을 담보로 빚을 얻어서 흥청망청 돈을 써왔다. 다시 말해서 중저소득계층은 자신들의 소득수준에 구애됨이 없이 물질적 욕망을 충족시켜 왔다는 것이다. 그린스펀 전 미연방준비위원회 의장은 미국인의 과소비를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로 점잖게 표현했지만, 어떻든 그동안 미국인들은 부동산 거품으로 빚잔치를 했던 것이다. 결국 그 빚잔치가 미국의 경제위기를 가져왔고 나아가서 전 세계의 경기침체를 초래하였다.

환경운동가나 환경보전론자들은 미국발 경제위기가 오기 훨씬 전부터 그와 같이 끊임없이 부풀어 오르는 인간의 욕망이 오늘날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각종 환경문제의 근본원인이라고 주장하였다. 끊임없이 부풀어 오르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시장은 너무나 많은 자연자원을 소모하고 있으며 또한 너무나 많은 환경오염물질을 배출시키고 있다. 그래서 환경위기가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부풀어 오르는 인간의 욕망이 경제위기와 환경위기를 포함한 인류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경제학은 인간의 욕망(선호)이 단순히 주어진 것으로만 간주한다. 그 욕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욕망이 사회적으로 타당한지 등을 일체 따지지 않는다. 경제학자들이나 신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의 욕망을 단순히 주어진 것으로 보고 이것을 어떻게 잘 충족시킬 것인가에만 관심을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다. 바로 이점이 그들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시장은 체제유지를 위해서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 시장이 잘 돌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생산된 상품이 잘 팔려야 한다. 그래야 기업도 신나서 생산을 계속하게 되고 경제성장도 가능해진다. 그러나 상품이 잘 팔리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상품을 많이 사주어야 한다. 옛날에는 상품을 잘 만들기만 하면 잘 팔렸지만, 지금은 질 좋고 값싼 상품이 시장에서 넘쳐난다. 이제는 사람들로 하여금 지갑을 열게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상품을 많이 사게 만드는 한 가지 효과적인 방법은 이들의 욕망을 끊임없이 부채질하고 이들로 하여금 늘 부족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의 수많은 광고나 각종 고도의 상술은 바로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노린다.

일찍이 마르크스도 자본주의 사회의 욕망조작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그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인간을 매우 탐욕적이게 만들뿐만 아니라 인간의 물욕과 소유욕을 끊임없이 조장함으로써 수요를 한없이 부풀린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행복하기는커녕 늘 부족을 느끼게 만들고 무언가 늘 불만스럽게 만든다. 자본주의가 아무리 전대미문의 높은 생산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인간의 무절제한 욕망, 값싼 욕망을 끊임없이 확대시켜서는 사람들은 늘 부족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숙명이라고 마르크스는 단언하였다.

경제학자들은 인간의 욕망이 끊임없이 부풀려진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이 무엇이냐고 반문할 것이다. 각자 더 많은 돈을 벌고 그 결과 더 많은 욕망이 충족된다면 그 만큼 복지가 증진되는 것이니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주장은 사람들 각자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분명하게 알고 있으며 그리고 오직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서 자주적으로 행동함을 전제한다. 이 전제는 경제학의 기본전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경심리학자라든가 두뇌과학자들이 일상인들을 상대로 아무리 실험을 해봐도 이 전제가 들어맞는 경우보다는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만일 경제학의 이 전제가 옳다면, 사람들의 실제 선택이 하찮은 요인이나 쓸데없는 것의 영향을 받아 이리 저리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일상 행동을 보면, 과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아주 간단한 예만 몇 가지 들어보자.

요즈음 김연아 광고효과가 대단하다고 한다. 김연아가 옆에 붙어 있는 에어컨은 잘 팔리고 다른 사람이 서 있으면 잘 안 팔린다. 김연아와 에어컨의 성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다. 광고는 그렇다고 치자.

요즈음 살 빼기가 크게 유행하면서 음료수의 당분함량에 많은 사람들이 신경을 쓴다. 그래서 두 가지 종류의 주스에 대하여 소비자들의 선택을 조사하여 보았다. 하나는 '5%의 당분 포함'이라고 표시된 주스이고 다른 하나는 '95% 무가당'이라고 표시된 주스이다. 표현만 다를 뿐 두 주스의 당분농도는 동일하다. 하지만, 실험결과에 의하면, 압도적 다수가 '5%의 당분 포함'주스보다는 '95% 무가당' 주스를 선택하였다. 만일 사람들이 합리적이라고 한다면 이 두 가지 주스에 대하여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당분농도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는 '95% 무가당'이라고 표시된 주스가 '5%의 당분 포함'이라고 표시된 주스를 밀어내게 된다. 이와 같이 상품의 질이나 가격과 전혀 관계가 없는 아주 하찮은 요인에 의해서 소비자들의 선호가 이리저리 바뀌고 그 결과 소비자들의 선택도 휙 휙 바뀐다.

이와 같이 내용은 같음에도 불구하고 표현을 달리함으로써 선택을 뒤바뀌게 하는 효과를 프레임 효과(frame effect)라고 하는데, 일상생활에서 아주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행태경제학에서 중요한 연구 분야가 되고 있다. 이른바 미끼효과도 사람들의 선택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많은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멸치와 굴비를 파는 어물전이 있다고 하자. 멸치 한 상자는 5만 원이다. 그러나 어물전 주인은 멸치만 팔기보다는 멸치와 굴비를 한꺼번에 팔고 싶어 한다고 하자. 굴비 한 줄과 멸치 한 상자를 묶어서 가격이 11만 원이라고 하자. 이렇게 두 가지를 내놓으면, 굴비-멸치 조합은 비싸기 때문에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멸치만 사려고 한다.

이럴 경우, 소비자로 하여금 굴비-멸치 조합을 사게 만드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굴비 한 줄에 11만 원의 가격표를 붙인 다음 5만 원짜리 멸치 상자들과 11만 원짜리 굴비-멸치 묶음 사이에 슬쩍 끼워 넣는다. 소비자들이 보기에 굴비 한 줄도 11만 원이고 여기에 멸치 한 상자를 덧붙인 것도 똑같이 11만 원이다. 그러면 소비자들은 굴비-멸치 조합을 사면 멸치 한 상자가 공짜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이 공짜를 얻기 위해서 비싼 굴비-멸치 조합을 선택한다. 이 경우 11만 원짜리 가격표를 부친 굴비는 단순히 미끼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미끼를 끼워 넣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선택이 바뀐다는 사실이 많은 실험을 통해서 밝혀졌다.

이런 일련의 실험결과에 의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콕 집어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일상생활에서도 보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최선인지 잘 모를 때도 많고, 이것이 좋은지 저것이 좋은지 잘 몰라서 쩔쩔매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절대적 판단기준에 의해서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일은 별로 없다. 마치 비행장 활주로 양쪽에 유도등이 켜져 있어야 조종사가 어디에 착륙해야 할지를 알듯이 사람들은 상황이 조성되어야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상황이 사람들의 욕망이나 선호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인간의 욕망을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있으나 그것이 이와 같이 가변적이고 특정인들에 의해서 쉽게 조작된다면, 과연 그렇게 신성시할 가치가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각 개인의 욕망은 별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각 개인의 욕망을 전부 합친 전체의 욕망이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한도 혹은 대자연이 수용할 수 있는 한도를 넘었을 때 위기가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그런 위기가 오기 전에 징후가 나타나고 이것이 시장의 가격에 반영되고 그러면 인류가 거기에 적응하게 되기 때문에 시장을 통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장담한다. 그러나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는 징후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의 경고까지 있었지만,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코웃음만 쳤다. 환경재앙의 경우에는 그 징후가 나타났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파멸로 치닫게 된다고 환경보전론자들은 우려한다.

끊임없이 부풀어 오르는 인류의 욕망이 인류의 위기를 초래할 가능성을 내포한다면 이제부터라도 인간의 욕망을 어떻게 적절히 통제할 것인지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 일은 아마도 철학자들부터 나서주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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