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쓰거나 따로 기록을 남겨두면 어느 시점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한 시점이 나온다.

그러나 문자도 모를 때 기록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자기 기억 속에 맴도는 어릴 때의 간단한

에피소드들이 기억의 부표(浮漂)가 된다. 에피소드는 스토리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기 때문에

되도록 간명하게 ,말 그대로 부표처럼 처리한다.

 

 1945년, 해방되던 해 나는 여섯살. 아버지가 면단위 초등학교 교장 대리였는데 갑자기 읍내

큰 초등학교 교장으로 임명된다. 정식 임명이 아니고 급조된 건준(조선건국준비위) 위원회에서

임시로 임명한 것이다. 읍의 교장관사로 가족들이 몰려갔는데 거기서 백열전등을 처음 봤다.

직전까지 일본인 교장이 살던 곳이라 마루밑에서 일본 아이들이 갖고 놀던 장난감들이 쏟아져

나왔다. 저녁이 되어 전등에 불이 켜졌는데 가족들 앞에서 내가 큰 소리로 말했다

"저기 석유를 넣어야지. 안 그러면 곧 불이 꺼질텐데."

백열전등에 석유를 넣자고 말하는 촌뜨기 말에 가족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나와 7년 터울인

세째형과 누나들이

"이 바보야, 이건 석유 없이도 불이 켜지는 전기란다." 라고 내게 가르쳐줬다. 그런데 영악한

세째형이 금방 내가 가족들을 웃길려고 농담했다는 걸 알아차리고 내 뒤통수에 꿀밤을 먹였

다. 그집에선 며칠 묵지 못하고 다시 면의 살던 집으로 돌아왔다. 건준의 임명이 무슨 이유인

지 금방 무효가 된 것이다.

 

 읍내엔 제법 근사한 유치원이 있었다. 읍내 조금 사는 집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녔다. 나는

면의 촌뜨기로 잠시 읍내에 머무는 동안 혼자 유치원 구경을 갔었다. 강당 안으로 들어가지

는 못하고 바같에서 창 문 사이로 강당안에서 아이들이 율동과 노래를 배우는 모습을 한참

동안 부러운 마음으로 구경했다. 아직 초등학교 취학 전이니까 여섯살 무렵일 것이다. -그때

강당 안에서 율동 배우던 아이들을 뒷날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모두 만났고 친구가 되기도

했다. 이 유치원 관람은 여섯살, 혹은 다섯살 때 일인지 확실치가 않다.

 

 나는 형제가 아주 많다. 스스로 카라마조프 형제들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성격도 제각각이

다. 나와 두살 터울인 바로 손위 형, 내가 카인이라고 내심 생각하는 형이 있다. 이 형과 나

는 자주 마주쳤는데 내가 질려고 하지 않는 바람에 피해가 막심했다. 그 형이 가위로 내 발등

을 찔렀다. 내가 '찌를테면 찔러봐! 라고 대들었던 것이다. 큰 상처가 났고 피가 흘러 병원으

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 처음 누나가 동행했고 두번째부터 혼자 병원에 다녔다. 다섯살 때 일

로 기억한다. 다음엔 같은 경로로 내 발등에 불이 달궈진 인두로 상처를 냈다. 구멍이 깊이 파

였다. 같은 병원에 다니면서 또 치료를 받았다. 그  두개의 상처는 지금도 뚜렷하게 남아있다.

 

해방 이전 다섯살 무렵 우리가 살던 곳은 면단위 시골 '포천'이란 곳이다. 사실은 포천이란 곳

과 역시 면단위 시골인 묘량이란 곳을 아버지 직장 때문에 옮겨다니며 살았다. 지금부터 얘기

는 그림은 여전히 선명하고 윤곽도 뚜렷하지만 시점은 명확하지 않은 것들이다. 나이는 이런저

런 정황을 참작해서 추정할 뿐이다. 그러나 가능하면 근거를 명확하게 해두려고 한다.

 

 해방 전 포천에서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감이거나 혹은 수석교사 정도였을 것이다. 교장은 일

본인인데 키자 작고 아주 야무지게 생긴 사람이 군복 비슷한 복장을 하고 연단 위에서 카랑카

랑한 목소리로 훈시하던 장면을 관사가 있는 언덕에서 지켜봤던 일이 있다. 나는 물론 아직 취

학 전이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한 겨울을 맞았는데 함박눈이 쏟아져서 카인의 형과 함께

밖으로 나가서 이웃의 아이들과 눈사람을 만들었는데 너무 추워서 잠시 손발을 녹이려고 집

에 들어왔다.  불과 몇분 쉬었는데 나는 춥더라도 빨리 다시 나가서 눈사람을 만들고 싶어 카

인에게 재촉했다. 사실은 눈사람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고 진짜 사람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

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웃집 아이들 가운데 오빠와 누이가 있었는데 그 누이를 빨리 다시 보고

싶었다. 그 오누이의 부친이 당시 금융조합 이사여서 시골 아이들 치고는 옷차림도 깨끗했다.

서둘러 다시 나가서 눈사람을 만들긴 했으나 그 누이와 말 한마디 나누지는 못했다. 성격이

무던한 그 오빠는 우리에게 무척 친절하게 굴었다. 그러니까 그 누이와 함께 했던 시간은  겨

울 한낮의 기껏해야 한 두어시간, 그것이 끝이었다. 어른들 끼린 교유가 있었겠으나 나는 그

이후 그 누이를 본 기억이 별로 없다.-참 우스운 이야기인데 내가 25세가 되어 학다리고교

에서 일년간 독일어 교사를 하고 있을 때 거기서 멀지 않은 목포라는 항구에서 그 누이가

여고의 영어교사로 근무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울의 명문여대 영문과 출신이란 얘기도

들었다. 그러나 옛 기억과 기껏해야 다섯살 때의 인연을 내세워 그 누이를 찾아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나 자신도 도피중인 신분이기도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