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쯤 전에 하킴님이랑 이야기 하다가 생각나서 써둔 픽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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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오빠, 일어나. 늦겠어."

  영광은 머리가 지끈 거렸다. 확실히 소주 두 병부터는 무리가 갔다. 은혜는 벌써 나갈 채비를 다 하고 있었다. 영광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떨구어서 이마를 오른손 위에 얹어야 했다.  

  "... 일어났어."

  "나 다음주는 마감조니까, 그 다음 주로 알아본다."

  "그래.. 그러자.."

  "그나저나 이번달에도 또 적금 못 넣네. 지난 달에도 못 넣었는데.." 

  "어쩔 수 없지 뭐."

  "갔다 올께. 오빠도 얼른 준비해. 또 늦으면 사장님 화내신다."

  "알았어."

이부자리에서 빠져 나올생각은 도저히 하지 못하고서, 영광은 간신히 고개만 들고 실눈을 떴다. 문을 열고 나가는 은혜의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고보니 지난달에도 적금 못 넣었었다. 보일러값 안나가는 여름 동안에 좀 넣어 두어야 하는 건데. 

  바깥 대문이 끼이익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하더니 쾅하고 닫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문 시끄럽게 닫았다고 나중에 위에서 1층 아줌마가 또 한소리 할 듯 했다.


아침.


영광은 결국 30분 정도 늦고야 말았다. 나오면서 청소는 커녕 허둥대느라 이불도 개지 못했으니, 분명히 이따가 한 쿠사리 들을 것이었다. 은혜는 왔는데 문 열자마자 이부자리부터 보이는 꼴이 제일 싫다고 했었으니까. 가뜩이나 기분도 안 좋을텐데, 이런 사소한 것도 해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굴비 이놈 자식아, 두 놈이나 쓰는데 둘 다 늦으면 어떻게 해?"

대머리 사장님은 영광을 굴비라고 불렀다. 살아오면서 제일 많이 들은 별명이기도 했다. 군대있을 때 원사님은 "담배"라고 불렀었다. 옛날에 글로리라는 담배가 있었는데, 한때는 나가서 사서 피웠다 하면 그거만 피웠다나..

  "동현이는요?"

  "뚱이 그 자식은 배때지가 불러서, 아침에 못 나온단다. 콜왔으니까 니가 좀 대신가라."

  "어딘데요?"

  "국화아파트 가동 306호."

영광은 한숨부터 나왔다. 국화아파트는 좀... 별로였으니까. 자기 구역이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하는 곳이었다. 한번은 거기 진상 아저씨가 원래부터 맛이 가있던 데탑 하드가 수리 잘못이라며, 빽빽 우겨대더니 대신 랩탑 윈도우를 공짜로 새로 깔아달라고 졸랐다고 들었다.


  "컴퓨터 수리왔습니다."

  306호 아줌마는 키가 작은 젊은 여자분이였다. 방에서는 4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애가 놀고 있었다. 오늘따라 꼬마애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이 아줌나는 적어도 진상 떨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하는 생각이 드는 찰라, 아줌마가 먼저 말했다.

  "아저씨, 컴퓨터 너무 자주 고장나는데, 수리 제대로 해주시는 거 맞아요?"

  "그럼요. 저희 사장님은 동네에서 장사 오래하려면, 일 똑바로 해야한다고 맨날 말씀하시는 걸요."

  "그치만 지난 주에도 불렀는데..."

  "부품이 오래되서 그럴 수도 있고요, 윈도우 문제일 수도 있고요. 일단 볼께요."

  마루에 놓여있는 컴퓨터는 데탑이었고, 몇 년 지난 모델인것 같았다. 아줌마가 증상을 이야기 해 주었다.

  "처음에는 잘 되다가, 30분쯤 지나면 갑자기 밑에 있는게 다 없어지면서  아무것도 안돼요."

  어째 올때 부터 느낌이 악성코드였다. 영광이 악성코드를 다 제거하는데 1시간 정도 걸렸다. 굳이 포맷은 필요 없을듯 했다. 혹시 모르니까 포맷하고 운임이나 조금 더 받아볼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콜이 하나 더 들어왔길래 그만 두었다. 

  "다 고쳤습니다. 출장비랑 수리비랑 삼만원입니다."

  "좀 깍아주세요. 지난주에 뭐 바꾼다고 십삼만원이나 드렸는데, 일주일도 못 갔잖아요."

  "지난주엔 제가 안와서 잘 모르겠는데, 그 때와는 다른 고장이 생긴거니까요."

 이런 말을 하다가 영광은 갑자기 안좋은 예감이 들었다. 영광은 한번만 더 보겠다고 아줌마에게 말하고는 본체를 열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딱 보기에도 메모리 카드가 교환되어 있었다. 그런데 꽂혀있는 건 무려 DDR1 128메가 두 개. 먼지 상태로 보건대 원래는 옆 슬롯에 DDR2가 꼽혀있었던 것을 빼고, DDR1을 꼽은 것 같다. 동현이 그 자식 이 따위 치사한 장난을 치다니. 그나저나 요즘 시절에 DDR1은 도데체 어디서 구한거야? 

  영광은 잠시 밖으로 나가 일단 사장에게 전화해서 사정을 설명했다. 사장은 노발대발하면서, 동현이 찾아서 원래대로 돌려놓라고 하고 오늘은 돈 한푼도 받지 말라고 했다. 동네 장사는 신뢰가 생명이라며. 

  '띠불 내 운임은?'

  "정말로 지난번 부품에 조금 하자가 있었네요. 사장님이 그냥 새로 바꿔드리랍니다. 찾아보고 이따가 4시쯤 다시 와서 바꿔드릴께요."

  "4시에는 혜린이 엄마한테 데려다 줘야 되는데.. 그 전에 오시던지 아님 5시 넘어서 오시면 안되요?"  

  은혜 오기전에 들어가서 이불 개고 청소하려면 5시면 너무 늦을텐데하는 염려가 들었다. 영광은 전화드리고 오겠다고 말한 다음 문밖으로 나섰다.


오후.


  영광은 두번째 콜을 마져 처리하고, 맨날 가던 분식점에서 라면을 먹었다.  가게로 돌아가는 길에 이따가 은혜 만나서 다시한번 이야기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해야 좋을 지 아직 갈피가 서지 않았다. 골목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대 더 피고 가려고, 허리춤을 뒤적이는 도중 이쪽으로 나오고 있는 동현의 모습이 보였다. 동현은 벌써 사장이랑 한바탕한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동현도 영광을 알아보고는 먼저 달려왔다.

  "띠불, 형은 그거 얼마한다고 그걸 꼰지르냐."

  "동현아."

  "그거 나만 그러는거 같아? 컴퓨터 고치는 새끼들 열이면 열 전부 다 그래. 안그러면 그 돈 받아서 어떻게 먹고살라고?"

  "..."

  "사장 새끼는 어떻게 먹고사는 줄 알아? 그거 다 형이랑 나 인건비 빨아먹고 사는 거야. 동네 장사에 신뢰는 무슨 개소리. 부품 마진도 전부 지가 먹으면서."

  영광은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었다.

  "씨발, 너같은 건 형도 아냐. 마누라도 있으면서 그깟 운임 푼돈 모아서 가게라도 낼 거 같아. 조까라 그래 씨발."

  동현은 침을 퉤 한번 뱉고는 가버렸다.


  가게에 들어가자 대머리 사장이 담담하게 영광을 맞아주었다.

  "뚱이 자식은 내일부터 안나온다."

  "네."

  "글구 앞으로 그냥 딴 놈 안 쓸 생각이다. 세상에 두 명이나 데리고 하는 집이 우리 집 밖에는 없어요."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동현이가 나간게 좀 미안하기는 했지만, 그건 녀석이 잘못해서 그런거고.. 

  "사장님, 딴 데보다 기본금 조금 주시는 게 두 명 쓰시느라 그렇다고.."

  사장은 순간 흠칫하는 듯 했다. 

  "아.. 그랬나? 그래 그럼...10만원 올려줄께."

  영광은 두 배를 바랐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동현이 구역까지 다니려면 스쿠터 가스값도 만만치 않을터였기에, 입이 절로 비죽나왔다.

  "이놈아, 동현이 공임은 니가 먹는 거잖아. 글구 위브랑 현대는 내가 콜 다닐꺼야."

  결국 약간의 줄다리기 끝에 결국 기본급 10 인상에다가 LPG값 10만원까지 내주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저녘

  국화아파트 들려서 램 꼽아준 다음 바로 집으로 들어갔다. 어짜피 그냥 해주는 일이라 정산 할 께 없었으니까. 306호 아줌마가 그래도 착해서 하루에 두 번 온 게 고마웠는지, 냉장고에서 레쓰비 캔커피를 하나 꺼내주었다.

  

  그러고도 영광은 다행히 은혜 오기 전에 먼저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이번주부터 한 시간씩 초과 근무하고 오기로 했었더랬다. 시간이 좀 있길래 영광은 얼른 이불부터 개고, 방바닥을 한번 청소했다. 어짜피 좀있으면 다시 이불 깔건데 뭐하는 짓인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리에 앉으니 머리속이 복잡했다. 영광은 월수입이 얼마나 늘어날지 생각해 보았다. 30? 40? 어쩌면 50? 혹시 굳이 병원에 갈 필요가 없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위브랑 현대를 빼면 콜이 그렇게 많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겨울이면 월세도 재계약 해야하는데, 집주인이 얼마 올려달라 그럴지도 궁금해졌다. 은혜는 다음번엔 샤워기 있는 방으로 가고 싶어 했었는데...


  영광은 갑자기 어제 술김에 자주가는 게시판에 익명으로 질문을 올렸던 게 생각이 나서, 인터넷을 켰다.


   ㅅㅅㅅ (27.109.xxx.xxx) 현실적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모아둔 돈 없이 어떻게 키우실 건지요.

   *** 관리자에 의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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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쌤통이다 (113.224.xxx.xxx) 니미럴 어린놈이 기집애끼고 사니까 그렇지. 할 땐 좋았지? 생각 없는 놈아.

   니발로털리 (218.117.xxx.xxx) 제 주위에서도 그런 경우는 전부 포기했음. 애는 사랑만으로 키울수 없다는 걸 생각하셔야 할듯.

   소년탐정개정일 (38.153.xxx.xxx) 낫아서 키ㅇ워야지 시발.

   뉴비축출 (178.215.xxx.xxx) 소년탐정개정일// ㅋㅋㅋㅋㅋㅋ 낫아서    

   화끈한하룻밤 (153.49.xxx.xxx) 여대생 두명과의 화끈한 하룻밤. 완전 노예처럼....   


  그때 은혜가 돌아왔다. 손에는 순대 한봉지가 들려있었다. 

  "오다가, 오빠 배고플 것 같아서."

  둘은 상을 펴고 말없이 순대를 집어 먹었다. 영광의 눈에 들어온 은혜의 눈은 어쩐지 붉어져있는 것 같았다. 영광이 먼저 입을 열었다.  

  "... 은혜야, 우리.. 내년되면... 가게 못 내더라도, 식부터 올리자."

  "아니, 그러지 마."

  "왜?"

  "괜찮아. 난 오빠만 옆에 있으면 행복한 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