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시체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Star Trek>의 한 에피소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고 한다: 적의 공격을 받아서 몇 명이 죽는다. 적의 공격이 계속되자 감정은 없고 이성만 충만한 Spock은 당장 도망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감정이 있는 다른 사람들은 동료들의 시체를 수습하기 전에는 떠날 수 없다고 우긴다. 매우 논리적인 Spock의 입장에서는 죽은 사람을 위해 산 사람이 목숨을 거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사람들이 감정 때문에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를 보는 사람들은 한편으로 Spock의 논리에 동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도 공감할 것이다. 비슷한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예컨대 부검이 필요한 경우라 하더라도 유족들이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유족들은 한편으로 부검으로 사망 원인을 밝히는 것이 범인을 찾아내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이해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죽은 이에게 칼을 대는 것에 대해 극도로 싫어한다.

 

시체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은 인류 보편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시체를 먹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보통 주술적인 이유(죽은 이의 영혼을 흡수하기 위해) 때문이거나 극단적인 기아 때문이거나 정신병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 평범한 생활을 할 때에는 죽은 친척을 맛있게 요리해 먹는다는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못한다. 애완 동물이 죽었을 때도 사람들은 보통 비슷하게 행동한다.

 

 

 

 

 

고전적 합리성과 생태적 합리성
 

20세기 심리학자들의 악취미 중 하나는 인간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를 파헤치는 것이었다. 인간의 온갖 사고 왜곡이나 자기 기만에 대한 관찰과 연구를 기록한 문헌은 수북이 쌓여 있다.

 

기독교인들이 이런 연구들을 꼼꼼히 살펴본다면 “신은 왜 인간을 이렇게 바보 같이 창조했는가?”, “인간이 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것이 사실이라면 신이 이렇게도 바보 같은가?”라는 의문을 품어볼 만도 하다. 다윈은 신을 자연 선택으로 대체했다. 인간의 사고가 일어나는 기계인 뇌를 창조한 것은 자연 선택이다. 자연 선택이 인간의 사고를 창조했다는 통찰은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고전적 합리성과 생태적 합리성을 구분한다.

 

고전적 합리성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학과 자연 과학을 살펴보면 될 것이다. 현대 수학과 현대 물리학의 이론들은 고전적 합리성의 진수를 보여준다. 고전적 합리성은 논리 정연하게 진리에 근접하려는 경향을 가리킨다.

 

반면 생태적 합리성의 경우에는 목적이 다르다. 고전적 합리성의 목적이 진리라면 생태적 합리성의 목적은 번식이다. 유전자의 수준에서 말하자면 유전자의 이해관계 추구 즉 유전자 복제다. 자연 선택의 핵심은 번식 경쟁이다. 따라서 동물이 자연 선택의 산물이라면 고전적 합리성보다는 생태적 합리성을 추구하도록 설계되었을 것이다.

 

물론 세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번식에 도움이 될 때가 많으므로 고전적 합리성도 어느 정도 추구하도록 설계되었을 것이다. 예컨대 어떤 동굴에 곰이 세 마리 들어가는 것을 관찰한 후에 두 마리 나오는 것을 관찰했다고 하자. 이 때 동굴에 적어도 곰이 한 마리 이상 있다고 판단하고 동굴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번식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고전적 합리성이 항상 번식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 자신의 친족, 자신의 친구, 자기 부족을 위해 어느 정도 사고를 왜곡하는 것이 최대한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것보다 자신의 포괄 적응도(inclusive fitness)를 높이는 데 더 유리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따라서 생태적 합리성을 위해 고전적 합리성을 어느 정도 포기하도록 인간이 설계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자연 선택의 논리를 고려해 보았을 때 당연해 보인다. 그리고 인간의 사고가 왜곡되는 방향은 생태적 합리성과 잘 부합한다.

 

 

 

 

 

죽은 자식을 들고 다니는 침팬지 – 과연 비합리적인 행동인가?
 

Jane Goodall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따르면 어떤 엄마 침팬지가 죽은 자식을 며칠 동안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Goodall은 이 모습을 보고 몹시 가슴 아파했지만 감정이 없는 Spock이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이번에도 엄마 침팬지가 감정 때문에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고 볼 것이다. 과연 그럴까?

 

동물의 지각과 사고가 완벽할 수는 없다. 오류의 여지는 항상 있다. 오류를 완벽하게 없앨 수 없다면 더 적응적인 방향으로 오류를 범하는 것이 낫다.

 

뱀에 대한 공포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인류가 진화했던 아프리카에는 독사가 살았다. 하지만 대부분은 독이 없는 뱀이었다. 독사와 독이 없는 뱀을 정확히 구분해서 독사는 피하고 독이 없는 뱀은 잡아 먹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구분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대 생리학의 놀라운 업적을 전혀 접하지 못했을 원시인들이 실제로 물려보지 않고 독사를 구분해 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실제로 물려보고 알아내는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이럴 때에는 뱀이라면 무조건 피하는 전략이 매우 유력하다. 왜냐하면 뱀을 피하는 데 드는 비용은 작지만 독사에게 물렸을 때에는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편의상 어떤 지방의 뱀 중 90%는 독이 없고 10%는 독사라고 가정하자. 뱀이라면 무조건 피하는 전략은 90%는 오답이고 10%만 정답이다. 반면 뱀을 전혀 피하지 않는 전략은 90%는 정답이고 10%는 오답이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보면 뱀을 전혀 피하지 않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하지만 생태적 합리성의 관점에서 보면 뱀을 무조건 피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엄마 침팬지가 죽은 자식을 며칠 동안 끌고 다니는 것은 합리적인 행동인가? 이것은 침팬지가 사망 여부를 얼마나 정확히 알아낼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현대 의학으로 무장한 의사들은 사망 여부를 사실상 100%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침팬지와 원시인의 경우는 다르다. 그들은 진짜로 죽었는지 여부를 정확히 알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부정확한 지식을 바탕으로 판단을 내려야 할 때에는 어떤 판단이 생태적으로 더 합리적일까? 이 때에 오류의 비용이 중요하다. 죽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산 자식처럼 끌고 다녔을 때 치러야 하는 비용은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실제로는 살아 있는데도 버리고 떠나버렸을 때의 비용은 막대하다. 따라서 엄마 침팬지의 입장에서는 며칠 동안 끌고 다니는 것이 합리적인 행동일 것이다. 설사 죽었을 확률이 99%가 넘더라도 그런 행동은 생태적으로 합리적일 수 있다.

 

 

 

 

 

적응 가설과 부산물 가설 – 인간은 왜 시체를 존중하는가?
 

적응 가설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 선택에 의해 시체(정확히 말하면 죽은 것으로 보이는 사람)를 존중하도록 설계되었다. 그 이유는 죽은 것으로 보인다고 곧바로 요리해 먹었을 때 혹시 치를지도 모르는 비용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목숨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죽었다고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기 전에 최대한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이 더 적응적이었을 것이다. 혹시 살아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최대한 잘 모셔두고 며칠 동안 관찰하는 것은 현대 의학이 없던 시절의 동물과 인간에게는 가장 생태적으로 합리적인 행동으로 보인다.

 

부산물 가설에 따르면 인간이 시체를 존중하는 이유는 살아 있을 때의 사랑 때문이다. 살아 있는 육체에 대한 사랑이 시체에까지 지속되는 것이다. 일종의 관성이라고 볼 수 있으며 적응적인 행동이 아니다.

 

적응 가설과 부산물 가설 모두 그럴 듯해 보인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옳은지 어떻게 가릴 수 있을까? 당장 떠오른 생각은 전혀 없으며 이런 문제를 다룬 문헌을 본 기억도 없다.

 

적응 가설이 옳다면 번식 가치가 큰 친족의 시체를 훼손했을 때 더 화를 낼 것이다. 따라서 갓난 아기나 80세 노인의 시체를 훼손했을 때보다 사춘기 무렵의 시체를 훼손했을 때 더 화를 낼 것이다(노인은 번식이 거의 불가능하므로, 갓난 아기는 사춘기가 되기 전에 죽을 수 있으므로 상대적으로 번식 가치가 작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적응 가설이 옳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부산물 가설도 똑 같은 것을 예측하기 때문이다. 자식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관련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자식 사랑은 자식이 사춘기 무렵이 되었을 때 가장 크다. 따라서 시체에 대한 존중이 사랑의 관성 때문이라 하더라도 사춘기 무렵의 자식의 시체를 훼손할 때 가장 화가 많이 날 것이다.

 

 


2009-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