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는 200 여년의 짧은 역사 동안에 자기 나라 일로는 한 번도 전쟁을 해본 적이 없다. 비록 2차 대전 때 일본이 호주의 북쪽 끝에 있는 다윈이라는 시골 동네에 연습 삼아 폭격을 한 번 했기는 했지만. 호주 사람들은 일본의 잠수함이 시드니 항까지 침입한 것을 보고 기겁을 해서 항의 입구의 남쪽에서 북쪽까지 4 킬로미터를 쇠로 된 그물을 쳤단다. 참 전쟁은 쓸데없는 짓을 많이 하게 만든다. 갑자기 박통 때 서울근교 북쪽 전체에 인민군 탱크 못 들어오게 한다고 논바닥에 흉물스럽게 철근 콘크리트 장애물 설치해 놓은 것이 생각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는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전쟁에 빠지지 않고 꼽사리를 끼었다. 아마도 세계에서 제일 전쟁을 많이 한 나라인 큰 집 영국의 영향권에 있기 때문에 부득이한 면이 있기도 하지만 자기 나라에서 전쟁 날 일이 없으니 훈련을 하기 위해서도 그러는 것 같다. 밤낮으로 침략만 당하고 살던 우리 입장에서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사실 실제 전투보다 더 좋은 훈련이 어디 있으랴? 그래서 호주는 군대에 갔다 온 것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 만큼 대우를 해준다. 특히 전쟁에 참가한 것은.

1차 대전 때 터키군과 싸울 때 터키의 갈리폴리라는 해안에 상륙작전을 하다가 오스트렐리아와 뉴질랜드 연합군 만 명 정도가 전멸했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그 날의 희생을 잊지 않기 위해서 AUSTRALIA와 NEWZEALAND의 머리글자를 따서 우리로 말하면 충무공 정신 쯤 되는 ‘ANZAC 정신’을 최고의 가치로 내 세운다. 
자기 나라도 아닌 남의 나라 전투에 차출되어가서 이긴 것도 아니고 몰살을 당한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가 짧은 나라라서 이렇다하게 내세울 정신적 가치가 없다보니 그런 것인 모양이니 이해해 주어야지 어떻게 하겠나? 그러나 여기에는 자기들이 유럽의 일원이라고 하는 정신적 유대감이 크게 작용한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안작 데이의 행진은 현역 군인들이 하는 것이 아니고 퇴역 군인들이 가슴에 훈장과 기장을 주렁주렁 달고 늙은 몸을 이끌고 참여한다. 수만 명의 늙은 군인들이 휠체어를 타고 혹은 다리를 절룩이면서도 대열을 이루어 행진을 하는 것은 관광객들에게도 큰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다. 
보통 아침 9시부터 1시까지 시내의 가장 번화한 거리에서 행진이 벌어지는데 실제 개인의 행진 시간은 30분 정도 밖에 안 된다. 즉, 부대 마다 시내 집결 장소에 군데군데 곳에 모여 있다가 짜인 시간표에 따라 출발지점으로 와서 행진을 하고서 해산지점에서 자연스럽게 해산을 하는 것이다.
퇴역 참전용사들이 각기 자기가 참전 했던 전투의 부대 깃발을 앞세우고 행진을 하는 것을 보면 마치 현대사의 시네마를 보는 것 같다. TV는 오전 내내 행진을 생중계하고 도로 연변에서는 시민들이 환호를 벌인다. 

최연소자가 60대 후반의 나이인 파월 한국군 참전부대는 그래도 그 중에 영계에 속하는 편이다. 호주인들은 대강 줄만 맞추어서 발은 맞추지도 않고 완전 자유민주주의식으로 행진을 하지만 오랜 동안 군사독제 시절을 겪은 한국인들은 줄은 물론이고 어떻게든지 발까지 맞추어보려고 애들을 많이 쓴다.  더욱이 한국인들은 어려서부터 줄을 서서 행진 하는 것을 많이 해봐서 그런 데로 폼이 나는 편이다.그러니 호주 영감들에 비해서 그래도 비교적 싱싱한 한국인들이 보무당당하게 행진을 하는 것을 보면 연도의 시민들이 열렬하게 박수를 보낸다.

호주에는 고맙게도 연합군 연금이라는 것이 있어서 호주가 참전한 전쟁에 연합군으로 나란히 참전했던 국가의 군인은 호주의 재향군인과 똑같이 취급해서 61세부터 연금을 지급한다. 인심 좋게 부인까지 함께.
따라서 호주가 참전했던 한국전과 월남전에 참가한 한국인들도 해당이 되는 것이다. 덕분에 젊은 시절 월남에서 피 한 방울 흘려 본 적도 없고 땀 몇 방울 흘린 것 밖에 없는 나 같은 사람이 멋모르고 호주로 온 덕에 효자 만난 셈이다. 젊음 시절 고생해서 돈은 한국에다 벌어주고 늙어서 혜택은 호주에서 받으니 좀 미안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호주의 국군의 날이라고 할 수 있는 ANZAC 데이 행사에는 반드시 참여한다. 최소한 밥값은 하기 위해서. 그런데 연금은 꼬박 꼬박 받아 쳐 먹으면서 안작 데이 행사에는 코배기도 안 비치는 양심은 한국에 두고 몸뚱이만 이민을 온 사람도 있다.

2007년도에 시드니에 있는 월남참전 전우회원들은 안작데이 행사에 오랜 숙원 사업이었던 옛 상관인 전 주월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을 초청하기로 했었다. 나는 이 기회를 계기로 영화 쪽에서 일하고 있는 아들의 도움을 받아 ‘노병들의 재회’ 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만들 것을 기획했다.

월남전 종전 후 월남에서 일하던 기술자들과 현지에서 제대를 해서 일을 하던 한국인 150 여명이 호주로 왔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월남전 종전 후 공산정권에 의하여 포로로 잡혀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이들도 있다. 한국 전쟁이 끝난 지 20년이 아직 안되어 나라가 경제적으로 불안정해서 호주를 택한 그들은 낮선 땅에 도착해서 생존을 위한 또 하나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들 대부분은 정식으로 영주권을 받아서 이민 생활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여행 비자로 호주 생활을 시작했다. 대부분이 미혼이었던 그들은 그 후 고국에서 여자들을 데려와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은 키워서 오늘날 한인사회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이미 월남에서 월남 여자들과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룬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여정은 특히 험난했다. 왜냐하면 당시 월남인들은 보트가 아니고서는 월남을 떠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호주로 온 노병들이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살면서 전쟁 참여 시기와 관계없이 모두의 상관이었던 노장군을 초청해서 만난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 영화에서 한국계 호주인 2세, 3세들에게 아버지로써, 할아버지로써, 그리고 이웃으로써 그들이 전쟁터에서 그리고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호주에 어떻게 뿌리를 내렸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었다.

영화는 행사 2 주 전에 한국에서 먼저 채 장군과 인터뷰를 끝내고 채 장군 일행이 인천 공항에서 출발하는 모습에서 시드니 공항에서 환영 나온 전우들에게 경례를 받는 감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하려 했다. 아들에게 시드니 공항 출구를 나올 때 밖에서 촬영 팀이 기다리고 있음으로 중구난방으로 나오지 말고 채 장군을 선두로 해서 질서 있게 나오도록 주문을 해놓았다. 촬영을 위해 군대도 갔다 오지 않은 아들에게 채 장군 일행의 군기를 단단히 잡으라고(?)를 강력하게 주문을 해두었는데 불행히도  채 장군이 출국 직전에 갑작스럽게 복막염 수술을 하게 되어 오지 못하게 되는 바람에 월남전에 참전했던 다른 예비역 장성 몇 명이 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 행사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꼴별견이 연출되었다. 행사 중에 갑자기 비가 오자 호주 예비역 장성들은 묵묵히 비를 맞고 있는데 한국인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일제히 거의 무의식적으로 우산을 꺼내서 예비역 장군들을 가려주었다. 나는 그 모습이 호주인들 눈에 얼마나 이상하게 비추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주나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전역을 하면 평범한 민주시민으로 돌아오는데 한국인들은 결코 민주적인 사고방식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월남 파병 50년 후인 2014년 9월 정기 국정감사에서 최근 한겨레 신문 보도에 따르면 월남전 참전 피해자 단체인 '고엽제 전우회'가 각종 정치 현안 관련 집회를 주최하며 회원들을 동원한 정황이 내부 공문을 통해 드러났다. 국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 고엽제 전우회는 관련법에 따라 정치 활동이 금지돼 있다. 하지만 이들은 세월호 '맞불 홍보', 교육감 직선제 폐지 운동 등에 수시로 동원되는가 하면, '육영수 여사 40주기 추모식' 등의 행사에도 지시를 받고 참석했다. 고엽제 전우회 서울지부는 또 '종북세력 척결' 등을 이유로 시국사건 집회를 수시로 열며, '7월28일 오후 1시 서울중앙지법 앞. 지회장 포함 20명. 복장은 행사복' 등 지회별로 '동원'해야 할 인원수와 옷차림까지 명시해서 내려 보냈다. 

이들은 과거에도 종종 각종 집회에 가스통을 들고 나서서 국민들로 부터 '가스통 부대'로 인식되어지고 있다. 나는 이들의 이러한 모습에서 1950년대 한국 전쟁 직후 다리나 팔이 없는 신체에, 계급 없는 군복을 입고, 목발을 집고서 상점 마다 다니면서 물건을 구매하던지 아니면 행패를 부리던 상이군인들이 떠올랐다. 한국 전쟁 전상자들이었던 상이군인처럼 정도가 심하지는 않지만 고엽제 단체 회원들은 정부에 보조를 받거나 각종 수익 사업에 관여해서 수익을 얻고자 하는 이익단체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전략적으로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스통을 들고 서 있을 자리를 잘못 선택했기 때문이다.


고엽제 문제는 1970년대부터 알 수 없는 질병에 시달리던 미군과 호주 뉴질랜드 참전군인들이 1978년 미국 고엽제 제조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고엽제 소송은 미국 의회 청문회가 열리고 전 주월 미군 총사령관 웨스트 모어랜드 육군대장이 증인으로 청문회에 출석할 만큼 큰 문제가 되었던 다국적 초대형 소송이었다. 
하지만 이 재판은 이길 수 없는 재판이었다. 왜냐하면 '정부조달계약자 항변원칙'(Government Contractor Defense)이라는 대법원 판례에 따라, 정부조달물품 제조사는 제조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게 돼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엽제 제조사들은 법정화해를 한다. 재판이 시간을 끌면 끌수록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이 재판으로 인해, 엄청난 재판비용과 판결보다 더 무서운 기업 이미지 추락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1984년 미군과 호주(7000명 참전) 뉴질랜드(600명 참전) 참전 고엽제 환자들은 2억4000만 달러를 피해 보상금으로 받는다. 그러나 8년 5개월 동안 32만 명 참전을 해서 정작 미군 다음으로 많은 장병이 참전했고 당연히 미군 다음으로 많은 고엽제 환자가 발생한 대한민국은 단 돈 1달러도 받지 못한다. 이유는 전두환 전 대통령 때문이다.
한국은 철저한 보도통제 때문에 재판이 열리는 사실조차 몰라서 소송의 일원으로 참여하지도 못했다. 유신시대는 말할 것도 없었고 5공 전두환 정권은 베트남전으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미국을 겨우 고엽제 문제 따위로 또다시 심기를 어지럽게 해드리는 불경죄를 저지를 수 없었던 것이다.
1984년 J 일보에서 고엽제 문제를 보도했으나 제보 기자를 해고시키고 타 언론이 보도하지 못하도록 통제하여 국민의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입에는 재갈을 물렸다. 인터넷이 없었던 세상이었고 해외 여행 완전 자유화는 1989년 시작되었으니, 그 후에나 겨우 한국 참전 군인들은 고엽제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 후 고엽제 피해 전우들은 마땅히 받아야할 고엽제 제조 회사에서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로부터 혜택을 받게 되었다. 장작 고엽제 피해 단체가 법률 제 8793에 의하여 비로소 공법단체가 된 것은 연대장, 대대장으로 월남전을 다녀왔던 전두환이나 노태우 때가 아니고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7년 12월 21일이었다. 

지난 10월 5일 존 케리 미국무장관이 워싱턴을 공식 방문한 팜 빈 민 베트남 외무장관에게 베트남 전쟁 이후 처음으로 미군무기 베트남 수출 금지 조치를 철회하기로 결정했다고 통보했다. 이미 2014년 9월 마틴 뎀프시 미국 육군참모총장이 베트남을 공식 방문하며 미국과 베트남의 군사 협력 개선에 돌파구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베트남이 중국에 대항하여 군사협력을 하는 이 시대에 미국이  "우리는 자유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월남전에 참전했었다"고 주장하겠는가? 전쟁을 벌인 미국에서도 하지 않는 생각을 지금 한국 참전용사들이 하고 있다면, 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인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월남 참전 전우들이 참전의 권리를 요구해야 할 상대는 누구인가? 당연히 국가이고 권력을 가지고 있는 정부 여당이다. 파월 전우들은 어떤 정당이 집권을 하건 정부 여당을 상대해서 권리를 찾기 위해서 싸워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야당을 비난할 일이 아니라 활용해야 할 것이다. 
월남 참전 전우들이 참전의 권리를 요구해야 할 상대는 누구인가? 당연히 국가이고 권력을 가지고 있는 정부 여당이다. 파월 전우들은 어떤 정당이 집권을 하던 정부 여당을 상대해서 권리를 찾기 위해서 압박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야당을 비난할 일이 아니라 연대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항상 보수 세력의 편을 들어 각종 어용 집회에 동원되는 들러리 역할을 하고 있지 않는가? 더욱이 이들은 몇몇 행사에서 개스통을 들고 나타나 일반 국민들에게는 파월 참전 용사하면 무조건 개스통 부대를 연상하게 만들었다. 일반 파월 전우들로서는 오해를 받고 있는 억울한 면이 있으나 대중의 눈에는  고엽제 피해 단체나 일반 파월 전우나 구별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후보 때 당선되자마자 월남참전군인들을 6.25 참전 군인들처럼 국가유공자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물론 월남전 참전군인들은 이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앞장서서 '묻지 마!'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했던가? 그야말로 이명박답게 내용은 어무 것도 없는 명찰만 '국가유공자'로 달아주셨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세상에 돈이 없지 뜻이 없나? 어떤 정부가 피를 흘려 한국의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던 월남 참전 군인들에게 혜택을 주고 싶지 않겠나? 문제는 예산일 뿐이지. 언제나 모자라는 예산 집행의 우선순위는 급한 것, 요구가 강한 것부터 하게 되어있다. 예산을 따내기 위해서는 권력에 대하여 호소나 비위를 맞추어서 될 일이 아니고 국민적 공감대를 얻은 투쟁만이 효과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