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라고 생각한 고양이와 고양이라고 생각한 개....


초등학교 시절이라고 생각한다. 돈만 있으면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곤 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라고 생각되는 데 그때 우연히 골랐던 책 제목이 바로 [개라고 생각한 고양이와 고양이라고 생각한 개]였다.


어떤 책이냐구? 예전부터 유럽에 살던 유대인 아슈케나지 Ashkenazi 들 사이에서 전래되어 온 온갖 민담들을 소설적으로 재구성한 이야기책이다. 작가는 1978년에 노벨상을 수상한 아이작 B. 싱어 (Isac Bashevis Singer).




  

가장 힘들고 어려운 한 때 난 그 책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유머를 읽으면서 슬픔을 잠시 동안은 잊을 수 있었다. 싱어라는 작가가 아동작가가 아니고 더구나 대표작은 개와 고양이 어쩌구가 아닌 [적들, 어느 사랑이야기 Enemies, A love story] [모스카트가 The Family Moskat] 등등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 참 후의 일이었다.


하누카, 하누카절에 먹는 동부유대인들의 갖 가지 음식들, 하누카절에 노는 여러 가지 놀이들, 그리고 우리 민담과도 흡사한 정말 정감가는 유대인들이 전승동화를 꼼꼼히 기억하곤 했다. 유대의 악마들은 지금도 소돔과 고모라의 폐허위를 맴돌고 있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 지금도 생각나면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는 유쾌한 바보들의 마을 켈름에 관한 이야기도 그 책에서 읽었고 난 어쩌면 켈름에 속한 인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곤 했다.



2. 박노자, 이스라엘을 통박하다.......


현재 이스라엘의 국어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히브리어. 우리나라 신학교에서도 목사가 되기위해서는 히브리어를 제법 공부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는 무엇일까? 히브리어라고? 아니다. 아니, 적어도 근세까지는 아니었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이디시어(Yiddish)였다. 이디시어는 히브리어문자를 사용하지만 히브리어와 독일어, 슬라브어가 적절히 혼용되어 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모국어처럼 사용하던 언어였다.


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을 아슈케나지라 부르는데 사실 이들이야말로 우리가 아는 유대인의 본류에 가까운 민족이다. 이들은 이디시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했고 1908년 체르노비츠 언어회의에서는 이디시어를 유대인의 국어라고 공포했다. 그 공포이전에도 이미 유대인의 국제언어는 이디시어였으므로 사실상의 국어지위는 이미 획득하고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쩌다 히브리어가 이스라엘의 국어가 되었냐구? 우리는 여기서 또다시 민족주의와 파시즘의 만남을 목격해야 한다. 박노자가 쓴 책 “하얀가면의 제국”을 보면 이스라엘건국과정에 얽힌 피비린내 자욱한 비극이 자세히 나와 있다.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들은 시오니즘으로 무장하고 시오니즘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은 유대인이 아니라는 극단적인 주장도 서슴치 않는다. 아니 주장 뿐 아니라 진보적 유대인들인 아유케나지와 팔레스타인지방에서 아랍민족과 잘 지내던 수많은 원주 유대인들, 세파르디들 을 마구잡이로 학살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위적인 히브리민족을 ‘창조’하기 위해 당시 까지 주류를 이루던 아슈케나지의 언어, 이디시어를 철저하게 탄압하기 시작한다. 시오니스트들은 민족 내에서 민족을 말살하고 자신들의 이상적인 민족인 가상의 ‘히브리민족’을 창출한 것이다. 그 가상의 히브리민족에 해당되지 않는 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무자비한 폭력 뿐이었다.


좀더 자세한 내용은 박노자의 [하얀가면의 제국] 175-195쪽을 참조하기 바란다. 민족주의가 민족 그 자체에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폭력을 박노자는 상세하게 설명해 준다. 그는 통박한다. 유대인들이여, 십계명을 지켜라.



3. 매트릭스 속에 사는 민족


아이작 B. 싱어는 자신의 모든 작품을 이디시어로 발표했다. 그리고 그 작품들을 다시 영어로 번역하여 발표하곤 한다. 이디시어는 1000년이 넘는 세월을 아슈케나지와 함께하며 발전한 소중한 문화적 유산이다. 그리고 그렇게 굴곡의 세월을 이겨내고 유대인이 겪은 역사적 고통을 웃음으로, 문학으로 승화시킨 이디시어가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다. 거의 형식과 의례에 가까운 유대교를 변혁하여 경건성과 신비성을 되찾자는 하시디즘운동을 주도한 언어도 이디시어였다.


 

<마틴부버 Martin Buber>


마틴 부버는 하시디즘을 다시 근대의 신비주의로 개창하면서 시오니즘에 만연한 인종주의에 반대했다. 물론 그의 그런 운동은 미약한 것이었고 시오니즘의 주류는 베긴같은 파시스트였다. 하지만 그는 말년에도 유대인의 반성을 촉구했고 그의 장례식에 아랍학생조직의 대표는 화환을 바치기도 했다. 한 인간의 노력이 많은 것을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작은 평화를 가져올 수는 있다는 것을 부버는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디시어도 이디시문학도, 심지어 마틴 부버와 같은 참된 종교철학자가 주창한 평화주의도 인정하지 않는다. 한 점 망설임 없이 팔레스타인 소년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이스라엘 청년의 가슴 속에는 히틀러의 망령만이 꿈틀댈 뿐이다. 그들은 이미 유대인이 아니라 유대인의 탈을 쓴 파시스트일 뿐이다.


어린 시절, 난 한 유대인이 이디시어로 쓴 작품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옛이야기들을 읽으며 슬픔을 달래곤 했다. 나 역시 삶에 의해 잠시 유배되어 있지만 유배되어 있다고 해서 웃음을 잃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곤 했다. 유대인들은 가장 힘겨울 때에도 웃었다고 하니까.


 

<팔레스타인 소년을 체포하여 연행하는 이스라엘청년군사>


하지만 그들의 후예는 이디시어를 없애고 이제 자신들의 웃음마저 없애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소년을 수감하는 저 이스라엘의 청년의 표정은 아마도 유대인을 수감하던 나찌의 그것이었을 것이다. 저들은 히브리민족일지는 몰라도 유대인은 아니다. 가상의 역사를 배우며 가상의 언어를 사용하며 가상의 민족이 된 저들의 세계, 저들이야말로 매트릭스 속에 사는 인간일런지도 모른다.


가상의 세계에서 출현한 저 히브리민족은 유대민족을 없애고, 유대언어를 없애면서 이제 내 추억마저 더럽히고 있다. 그러나 어디에도 메시아는, 네오는 나타나지 않는다. 2000년 전에 저들이 못 박은 탓일까.


P.S. [개라고 생각한 고양이와 고양이라고 생각한 개]는 현재 다른 출판사에서 [행복한 바보들이 사는 마을, 켈름]이라는 제목으로 재 출간 된 것으로 안다. 건조한 일상에 지칠 때 읽으면 작은 미소가 감도는 이야기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