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대중들의 눈을 어지럽게 만들었던 허경영은 나에게 바나나와  같이 떠오르는 인물이다. 사단 본부에 갇혀만 있다가 몇 달 만에 처음으로 군수 물자 수송 트럭의 경계병으로 차출이 되어 트럭을 타고 부대 밖으로 나가 보게 되었다. 트럭 위에서 난생 처음 보는 월남의 시골 풍경을 신기하게 관찰하면서 이동을 하는데 트럭이 어느 마을 근처에 섰다. 트럭들이 서자 동네 아낙들이 잡다한 물건들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 트럭들 주위로 다가왔다. 그 순간 내 눈에 띈 것은 그 때까지 별로 먹어 볼 기회가 없었던 바나나였다. 사실 40년 전 내가 군대에 가기 전 까지만 해도 바나나는 보통 사람들이 감히 먹을 수 없는 책이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식물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한국 생각을 하고 1불을 주고 아낙이 들고 있는 바구니에서 바나나를 두 갠가를 뜯었다. 그래도 그 아낙은 바구니를 쳐들고 더 가져가라는 눈빛이었다. 그래서 내가 바나나 한 다발을 집었는데도 그냥 서 있는 것이었다. 
그 때 옆에 있던 고참이 “야! 저 바구니에 있는 거 다 해도 1불이 안 돼.” 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한국과 현지 물가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많은 바나나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간 망설였지만 아낙의 눈길 보는 순간 그 바구니를 통째로 트럭에 실었다. 물론 잔돈을 거슬러 달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잔돈을 거슬러 주고 싶어 하지 않고 바나나를 모두 팔고 싶어 하는 아낙의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많은 바나나를 내가 다 먹을 수도 없고 보관을 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바나나를 트럭에 타고 있던 전우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그 때 그 트럭에 허경영이도 타고 있었다. 허경영은 그 때도 웃기는 녀석이었다. 모두들 야자나무 아래서 땀을 식히고 있는데 갑자기 경영이가 배낭을 주 섬 주 섬 뒤지더니 구겨진 양복을 꺼내서 군복을 벋고 갈아입기 시작 했다. 경계 근무하러 나가는 놈이 배낭에 사복, 그것도 양복을 넣고 다니는 것은 기상천외한 행동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럴 경우 다른 사람이면 영창 감이지만 워낙 평소에 이상한 행동을 많이 하는 경영이라 인솔 하사관도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더욱 웃기는 일은 주머니에서 스카치태잎을 꺼내더니 귀를 올려붙이는 것이었다. 경영의 귀가 당나귀 귀처럼 늘어졌는지는 모르지만 미리 어떻게 사진을 찍어야 하겠다고 철저하게 계획을 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는 야자수를 배경으로 마치 관광객처럼 유유하게 폼을 잡고 서서 가지고 온 사진기를 내밀고 다른 전우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당시 나는 전입한 지 얼마 안 되는 신병이고 경영이는 고참 급에 속했기 때문에 '전쟁터에서 저래도 되나?'하고 어리둥절하기만 했었는데 다른 병사들은 경영이의 특이한 행동에 이력이 났었는지 낄낄거리면서 웃기만 했다.
몇몇 고참들이 야유를 하자 경영이는 "내가 니들에게 무슨 피해주나? 상관 하지 마라." 고 오히려 큰 소리를 쳤다.
경영은 내 기억으로는 특별히 타인이나 단체를 생각하는 공익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될 수 있으면 자기에게 유리하다면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이 안 되는 억지를 부리기도 하는 타입이었다. 뭐 모두 미성숙한 20 대 초반이 일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젊었을 때의 그의 모습은 최소한 오늘날처럼 거창하게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웅지를 품은 사람 같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경영은 사단 법무참모부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함께 근무하는 행정고시를 패스하고 왔다는 김녹규(내 기억으로) 병장과는 대조적으로 워낙 엉뚱한 행동과 말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저 웃기는 놈’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나는 경영과 다른 내무반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내무 생활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석식 후 초번 보초를 나가기 위한 집합 시간에 매일 만나야 했다. 집합 시간에 가끔 요즘 말로 게겨서 주번사관으로 핀잔을 한 번씩 듣거나 간단한 기압 정도 받는 그런 타입이었다.

그런가하면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경영과는 전혀 반대 이미지로 남아 있는 인물이 있다. 당시 정훈자료로 많이 등장했던 김 화복 병장이다. 김 병장은 군대에서 특과라고 할 수 있는 야전병원 원장(대령)의 당번 병이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계속해서 병원으로 후송되어 오는 병사들을 보고서 후방에서 편히 근무하는 것에 대하여 자책감을 꼈다. 병원장에게 자신을 전투부대로 보내달라고 하자 병원장은 미친 소리 하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 
김 병장이 계속 청원을 하자 병원장은 이 사건을 주월 사령관에게 보고하고 사령관은 이를 가상히 여겨 김 병장을 전투 부대로 보낸다. 사령관의 특별한 관심 속에서 김 병장은 사단에서 연대로 대대로 중대를 거쳐 말단 소총소대까지 오게 되었다. 
그런데 입장이 난처해 것은 막상 김 병장을 맡은 중대장이었다. 만약에 주월 한국군 전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김 병장, 정훈자료로 쓰이고 있는 김 병장이 죽거나 다치면 자신이 골치가 아파지는 것이다. 공연히 이상한 놈 하나가 자기 부대에 떨어져 관심이 집중되니 엄청 부담이 생긴 것이다. 혹시 김 병장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다른 사병과는 전혀 다르게 추궁이 심할 것이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김 병장이 살아야 정훈 효과가 있는 법이고 만약에 죽는다면 시시하게 죽으면 안 되고 장열 하게 전사를 해야만 그럴듯하게 정훈 자료가 될 것이 아닌가? 
김 병장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 중대장은 "저 새끼 취사반에 쳐 넣어!"하고서 전투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 
이렇게 되자 김 병장은 자기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막상 전투현장에 와서 총 한 번 만져 보지 못하고 지내고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파서 전투에 못나가게 된 소대원 대신에 출전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그 뒤에는 김 병장이 나가는 전투마다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무적의 불사신이 되었다나? 말았다나? 하는 개 같은 스토리였다. 

나에게 허경영과 김 화복은 전쟁터의 코미디와 허구적인 선전의 상징이었다. 허경영은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피에로였고 순진무구한 김 화복 병장은 군대라는 조직이 만든 피에로이었다. 그런데 허경영과의 인연은 월남전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 번은 SBS TV ‘그것이 알고 싶다’의 담당 작가실에서 쪽지를 받았다. 하경영의 정체를 폭로하는 1차 분을 방영 하고 2차를 준비하기 위하여 자료 수집 차 온라인 서핑을 하다가 내 블러그에 있는 허경영 관련 내용을 읽고 협조를 요청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후 SBS 측과 이메일과 통화를 주고받았는데 나를 인터뷰하기 위해서 호주로 올 수도 있단다.
허경영에 대하여 별스런 정보도 없는 나로서는 그렇게까지 한다는 것은 매우 부담이 되는 일이라서 사양을 했더니 일단 자료를 보고 판단을 해달라고 했다. 다음은 SBS 측에서 보내온 ‘그것이 알고 싶다’ 1회 방영분의 대본이었다.
 
PD: 본인이 고 박대통령의 비밀보좌관이었다는 부분을 강조하다가 월남 얘기를 꺼냈었는데요,
허:  내 군대생활 기록부 봤습니까? 군대생활 기록부 보세요. 청와대로 돼 있어요.
PD: 월남전 가셨다고.
허: 그러니까 청와대에서. 월남에는 심부름 갔지. 대통령이 보내서 간 거고 월남 휴전 때, 월남에 있는 금괴.. 금괴를
    월남의 대통령이 박대통령한테 아 이걸 좀 한국으로 옮겨 달라, 인천으로. 근데 그걸 LST로 가져가서 청룡부대  가서 그 금괴를 싣고 오라는데 대통령이 거기 응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일단 내가 월남에 갔죠. 가서 전반적인 걸 봤는데, 사태가 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노, 그래서 그 사람하고 그냥 헬리콥터로 도망갔죠. 그러고 말았는데.

이상이었다. 세상에나? 저나 나나 무슨 고급 장교도 아니고 병역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 징집된 일개 사병에 불과한 처지에 도저히 만화에서도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데 제 멋대로 지어내다니?
빽이 좋았던지 운이 좋았던지 편한 곳에서 근무한 덕분에 5천여 명이 전사한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으면 감사하고 살아야지 월남전을 소재로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멋대로 지어내는 것은 파병 전우들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허경영이 무슨 헛소리를 하든지 내가 알 바가 아니지만 그는 분명히 73년 2월 4일 미군 수송용 민간 항공기를 타고 나와 함께 귀국했는데 헬리콥터는 무슨 공중에 날아가다 추락할 소리는 하고 있는지...전우들이 고귀한 목숨을 바친 전쟁 상황을 자신의 인기몰이를 위해서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지어내서 전체 국민을 속이는 일은 도저히 묵과 할 수 없는 일이고 판단이 되었다. 한국에 파월 전우회, 걸핏하면 가스통 들고 나오는 고엽제 피해자 단체 등이 있던데 허경영이 혀를 교묘하게 경영을 해서 월남전을 팔아먹는데 왜 가만히 있는지 모르겠다.

허경영에 대하여 별다른 감정이 없었던  나는 분노의 오르가슴이 느껴져서 즉시 작업에 착수하기로 했다. 이제 문제는 어떻게 빨리 찍어서 보내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10 년 전에 한국서 온 KBS PD들과 ‘추적 60분’을 제작해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시드니에서 현지 제작을 하는 방법이 있었다. 시드니에서 제작을 할 수 있는 사람들과 접촉을 해서 30도의 찜통더위 속에서 에어컨도 없는 내 서재에서 뒷마당의 시끄러운 새소리 때문에(우리 집 큰 나무에 피어 있는 꽃들 때문에 온 동네 새들이 모여서 잔치를 벌인다) 창문을 닫고 뜨거운 조명을 켜 놓고 촬영 기사, 오디오 기사와 땀을 뻘뻘 흘리며 1 시간 이상 작업을 해서 10분짜리 필름을 만들어 보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까 80년대 후반에 을지로 4가 국도극장 뒤 인쇄골목에서 우연히 그를 만나서 차 한잔할 기회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서로 뭐하냐고 근황을 주고받게 되었는데 그는 개인사업 한다고 했고 나는 빈민 운동을 한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왜 지금도 기억 하는가 하면 그의 반응이 매우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내 상황은 흔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보통 내 이야기를 들으면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좋은 일 한다든지 아니면 그런 일을 왜 하느냐 든지 이다. 그런데 허경영의 반응은 마치 아이처럼 신기하다는 듯이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 나서 끝까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런 반응을 흔히 경험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