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11 사건으로 날벼락을 맞은 이후로 미국 입국 심사대 직원들은 권총을 차고 근무를 한다. 입국 심사대에서 도대체 권총을 왜 차고 있는지? 하루 종일 무거운 쇠 덩어리를 차고 있으면 허리에도 안 좋을 터인데……
아마 일종의 공포 분위기 조성의 겁주기 차원일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미국 애틀랜타 국제공항에서 '전동칫솔'의 진동소리 때문에 한동안 공항이 마비되는 소동이 일어났다. 1월 4일(현지시간) 오전 8시께 애틀랜타 공항 보안 당국에 "여행가방 안에서 진동소리가 울린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애틀랜타 국제공항은 직원이 진동소리를 들으면 의무적으로 보안 당국에 보고하도록 돼 있다.
당국은 폭발물이 들었을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수상한 가방이 발견된 공항 내 일부 터미널을 폐쇄하고 공항으로 통하는 도시 전철 운행도 전면 중단시켰다.
애틀랜타의 전철 회사인 '마르타'는 자사 트위터에 "긴급사태로 인해 어떤 열차도 공항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메시지를 띄워 불안감이 증폭됐다.
그러나 경찰이 열어본 수상한 가방 안에는 폭발물이 아니라 전동칫솔 1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고 있을 뿐이었다. 수하물 처리 과정에서 가방 안에 충격이 가해져 전동칫솔이 작동한 것이었다. 당국은 도시를 한동안 테러 공포에 떨게 한 전동칫솔의 스위치를 끄고 40분 만에 공항과 전철 운행을 정상화시켰다. 미국이 세계의 인심을 잃고 사는 한 아무리 권총을 차고 폼을 잡아도 전동치솔 소리 하나에도 불안에 떨면서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빈라덴은 9. 11 에 서구 세계에 ‘불안’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안겨 주었다. 그런데 이 ‘불안’이라는 선물은 워낙 값이 비싸서 경제적으로는 시간적으로나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고 있어 심지어는 우리가 비행기를 탈 때마다 안전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자.
테러를 벌인 쪽은 아예 애초부터 안전이라는 것이 없는 쪽이었다.
그들에게 안전이 있다면 절망 속의 안전일 뿐이다.
절망이 주는 안전이라니? 세상에 그런 것도 있는가 싶을 것이다.
절망이 주는 안전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안정은 내가 경험해 보아서 잘 안다.
젊은 시절 나는 한 때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라는 신념 하나로 살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니 겁나는 것이 무엇이 있겠나? 아무런 희망이 없기 때문에 불안도 없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슬라보에 지젝은 그의 책 ‘실제의 사막’에서 헤겔식 표현을 사용해서 9.11 사태 이후의 세계를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 설명한다. 정작 주인이랄 수 있는 미군은 ‘아군의 사상자가 전혀 없는 하이텍크 전쟁’(콜린 파월이 내세운)을 하려하고 노예의 처지인 무슬림 급진주의자들은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전투를 하는 현실을 설명한 것이다.

이런 농담이 있다. ‘맹인과 벙어리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맹인이 이길 수밖에 없다. 왜? 뵈는 게 없으니까?’
목숨을 아까와 하는 놈과 아까워하지 않는 놈과 싸우면 결과는 뻔 한거다. 
아무리 좋은 무기를 가졌다 한들 목숨을 아까워하는 놈이 목숨을 버린 놈을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절망 속에서 신앙을 만나면 안전을 찾게 된다. 자살 테러범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보통 인간은 가정적, 사회적, 경제적, 법적, 육체적 그 어느 하나라도 안전하지 못하면 불안이 찾아온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과 전혀 상관이 없는 불안이 있다.
바로 ‘신앙적 안전'이 지켜지지 못한다는 불안이다. 그들은 자기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댓가도 치룰 각오가 되어있는 근본주의자들이다.

그런데 이와는 정반대 입장이 있다. 그것은 스스로 안전이 아닌 불안을 택하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윤리적 관점에서 '의견의 자유'란 무엇보다도 악을 지명하는 자유라고 말한다. 
즉 악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을 자유를 말한다.
어떤 사안에 대하여 모두가 동의를 할 때 홀로 동의를 하지 않는 것은 곧 불안한 존재가 되는 일이다.
단순히 동의만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이 그리 대단한 것이냐고 생각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동의 하지 않는 것은 일견 수동적인 자세로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능동적인 실천의 시작일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실천은 동의와 공감의 차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에 대하여 동의를 거부하는 것은 지금 내가 서 있는 곳과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내 태도와 실천을 결정하는 기본적인 토대가 되는 것이다.
현실을 직시 하는 것에서 오는 불안, 그것이 정말 안전한 것이다.

9월11일은 화요일이었다. 토요일 시내에 나가보니 벌써 시대를 내다보는 소수의 깨달음이 있는 사람들이 “아랍인들을 희생제물로 삼지 마라.”, “전쟁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었다. 윤리적 상상력이 발달한 사람들은 벌써 앞 일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주일에 교회에서 기막힌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젊은 유학생들이 모인 교회였는데 그들은 지구와 전혀 상관이 없는 외계인 같이 지구가 뒤집어지는 사건이 발생한 그 주일에 복음 성가만 부르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도 소위 CCM 이라는 복음송가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날을 정말로 기가 막혔다. 대부분의 경배와 찬양의 가사들은 사람들을 무뇌아적인 기독교인으로 만들기에 참으로 딱 알맞은 가사들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날 ‘이들은 한국군이나 미군으로나 전쟁에 나가서 미국 때문에 죽을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고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아프칸에 파견되었던 윤장호 병장의 전사로 슬프게도 나의  예감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흥미있는 것은 9.11조사위원회가 최종보고서에서 9.11 테러를 막지 못한 것은 미국 관리들이 "상상력 부족으로" 알 카에다의 위협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상상력' 부분과 관련 "비록 상상력이 일반적으로 관료주의와 어울리는 재능은 아니지만" 그 전의 알 카에다 공격들에 폭탄을 자동차에 실어 터뜨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선박이나. 비행기들 같은 다른 탈 것들을 사용할 것이라는 (상상의) 비약은 무리한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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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신앙을 가지면 앞에서 언급한 청년들처럼 윤리적 상상력이 떨어질까?‘. 그런데 원래 성서는 상상력으로 쓰여졌다. 구약 성서는 다른 어떤 민족 보다 신에 관한 풍부한 상상력을 가진 유대인들의 역사 속에서 생성된 작품이다. 그런 성서를 문자로 읽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다.
지성수님의 사진.
지성수님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