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유로든 자기가 속한 집단과 '다르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자기가 속한 집단과 정서를 같이 하지 못하는 것은 고통일 수 있다. 왕따든 자따든 소외의 결과는 타인과 다른 자기만의 내적 동기가 더 강화될 수도 있고 왜곡되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최근에 한국 사회에 나타나는 일베현상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월남전에 참여 했을 당시의 나의 처지도 그러했다.


1971년 한 해 미국의 대학에서 4,800회의 반전 데모가 벌어졌고 체포 7,400명, 3분의 2가 경찰이었던 부상자 462명, 방화 247명, 사망이 8명이나 되었고 도서관이나 연구소에 방화가 발생했었다. 닉슨 대통령이 한 베트남 참전 장교의 부인에게 베트남에 있는 병사들은 훌륭히 그들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데 대학에서 일부 건달패(Bums)들이 소동을 부리고 있다고 언급한 말이 보도되어 학생들의 반전 데모를 더욱 점화시켰다.

오하이오 주 켄트 주립대학에서 주지사는 주방위군을 파견하였고 발포명령이 떨어져 대학생 4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잇달아 전국적으로 데모가 번져 450개에 달하는 대학이 휴교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국에서 대학생들이 반전운동을 주도하여 미국의 전의를 감소시키고 있을 때에 남베트남 대학생들은 격렬한 반정부 운동을 벌리고 있었다. 매달 수천 명의 젊은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남베트남의 대학생들은 징집이 연기되어 상아탑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의 젊은이로서 국가의 가장 큰 특혜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그들도 국가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했다. 그들의 이론은 국가 존망의 기로에 서있는 나라의 대학생들이 이대로 학업만을 계속해서는 안 되고 나라를 망하게 하고 있는 독재정부를 타도하여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박정희 정권은 외신을 통제해서 한국군이 파병되어 있는 월남에 관해서 부정적인 정보는 일체 보도가 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6, 70 년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한민국이라는 땅에서 탈출해보려고 몸부림쳤었다. 형편이 좀 나은 사람들은 아르헨티나나 브라질 집단 이민으로 가족 단위로 길을 찾았고 개인별로는 독일의 광부나 간호사로 노동자들은 중동건설 현장으로 살 길을 찾아 떠났었다. 월남 참전 초창기에는 막연한 외국에 대한 선망, 돈을 벌어야 하겠다 등등의 이유로 대부분이 지원을 했었다. 참전군인들 가운데 부산 제 3 부두에서 태극기 물결 속에 배에 오를 때 속으로는 가족을 위한 희생양(scapegoat)이 되겠다는 생각에서 ‘고기값이라도 해보자.’ 즉 죽으면 보상금이라도 타서 부모님에게 효도하자는 자조적 농담을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최소한 누구나 “내가 무사히 돌아가면 우리 집에 황소 한 마리 끌고 갈 수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파월 되었던 1972년에는 전쟁이 거의 끝나가는 무렵이여 월맹 정규군이 마지막 총공세를 펼쳐서 한국군이 많은 죽은 시기였던 만큼 진급을 위한 경력 관리를 하려고 하는 장교가 아닌 사병으로서는 지원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부대에서는 부대별로 할당이 떨어져도 지원병이 없으니까 할 수없이 차출을 하는데 보통 평소에 부대장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병사를 보냈다. 그래서 월남차출이 떨어지면 부대장에게 “앞으로 부대 생활 착실하게 할 터이니 제발 보내지 말아 달라.”고 울고불고 사정을 하는 희극도 벌어지곤 했다.

후유증을 줄이기 위해서 당사자에게는 바로 전날 통보를 해서 정신없이 보내 버리기도 했다. 실제로 대대에서 PX병으로 근무하던 대학 동창은 월남차출이 되어서 내일 떠난다며 연대본부에 있던 나에게 인사과에 돈을 써서라도 자기를 빼달라고 울면서 전화를 했었다. 일개 사병인 내 입장에서 더욱이 출발 전날 밤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나는 “야! 인마 월남 간다고 다 죽냐? 걱정 하지 말고 가. 나도 곧 뒤 따라 갈께”라고 했다. 실제로 당시의 나의 삶은 너무 단조롭다 못해서 권태롭기도 했고 아무 희망이 없는 삶이었다. 


사실 나는 훈련소에 입대를 하자마자 기회만 있으면 월남으로 가려고 하는 참이었다. 그러나 나는 연대장이 필요해서 특별히 데려다 놓은 필수 요원이었기 때문에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침 연대장이 사흘간 서울로 휴가를 간 기회에 월남 차출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때는 이 때다’ 하고 지원을 했다. 내가 지원을 하자 사병계는 이상하게 생각해서 인사과장에게 보고를 하고 인사과장은 부연대장에게 보고를 했다.

지금도 그 모습이 어제 일처럼 너무도 분명하다. 인사과장이 가슴이 두근거리는 나를 연대장실로 데리고 가서 부연대장에게 "이 녀석이 연대장님이 월남 간다고 하는 것을 허락하셨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니까 부연대장은 “그렇다면 허락하셨겠지. 뭐?” 라고 하며 눈을 껌벅이던 모습이.

아마도 내가 거짓말을 하리하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사람 좋은 부연대장은 나중에 연대장에게 혼 좀 났을 거다. 요즘처럼 휴대폰이 있는 시대였다면 그런 거짓말이 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흘 후에 연대장이 돌아와서 내가 없어진 것을 알더라도 연대장의 힘으로는 이미 사단 밖을 벋어나서 있는 나를 도로 불러 올 수는 없다는 군대의 명령체계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저지른 행동이었다. 항상 아는 놈이 범죄도 저지르는 법이다.


오음리 제 7 보충단에서의 6 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월남으로 떠날 날이 다가왔다. 흰 색깔로 선명하게 백마가 그려진 부대마크가 달린 얇은 흑록색 정글복을 갈아입고 보니 기분이 좀 이상해지고 막연하기만 했던 월남이란 나라가 비로소 조금씩 피부에 닿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새벽녘에 우리들을 태운 트럭들은 끝없이 노란 흙먼지를 피우며 구비 구비 꼬부라진 배후령 고개(일명 빼찌 고개)를 넘어서 춘천역에 도착했다.

춘천역에는 푸르죽죽하고 시커먼 군용열차가 색종이를 칭칭 감고 큼직한 태극기와 함께 머리와 꼬리에는 형형색색의 꽃다발이 걸린 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그런 군용열차의 모습이 내게는 꼭 거대한 영구차 같아 보였다.

춘천역 광장에는 3군단 군악대가 쿵작거렸고, 평소에 사병들을 보면 승냥이처럼 뜯어 먹을 것 없나하고 눈을 부라리던 헌병 녀석들도 그날만큼은 모처럼 상냥한 눈빛-사실은 불쌍하게 보는 눈빛이었겠지만-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광경들이 정작 나에게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오직 나의 관심은 과연 마지막으로 정희를 다시 한 번 더 볼 수 있을지 없을지 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훈련생의 신분인 나로서는 막연히 오늘 출발하는 것만 알았지 부대가 몇 시에 출발 할지 정확하게 알려 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정확지도 않은 시간에 맞추어서 서울의 북쪽 끝인 구파발에서 춘천까지 오기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맞은편에서 오던 경춘선 열차가 플랫폼에 도착하자(이 당시 경춘선은 단선이었기 때문에 반대편의 기차가 와야 출발 할 수가 있었다) 간단한 환송식을 마친 군용열차가 드디어 출발할 시각이 왔다.


맞은 편 철로에 서울서 방금 도착한 경춘선 열차에서 승객이 쏟아져 내리는 사이로 이쪽을 향하여 정신없이 달려오는 하늘색 투피스를 입은 정희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나는 정희를 알아 볼 수 있지만 정희는 똑 같은 제복을 입고 창가에 매달려 있는 수백 명의 병사들 가운데 나를 찾을 수는 없었다. 나는 통로에 서 있는 녀석들을 제치고 승강구로 달려가서 정희를 향하여 “여기야! 여기!”하고 소리를 질렀다. 정희가 혼란스런 상황에서 나를 발견하고 다급한 표정으로 내가 있는 승강구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승강구 마다 헌병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나는 승강구를 내려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막 군용열차가 그 거대한 몸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그저 서로 황망한 시선으로 서로 쳐다만 볼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순간 우리의 상황을 보고 감을 잡은 다른 병사들이 이구동성으로 “태워! 태워!”하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홀려서 나도 모르게 팔을 뻗어 정희의 손을 붙잡아 승강구로 끌어 올렸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자 놀란 한 헌병이 제제를 하려고 열차에 올라타려고 했다. 그러자 승강구에 있던 파월 병사들이 "어딜 올라와? 개새끼들아!" 발로 걷어차 버린 것이다. 이 광경을 보고 순식간에 주변의 헌병들이 달려오자 내가 서 있는 승강구로 몰려든 병사들과 기차에 울려 타려는 헌병들의 싸움이 벌어졌다. 평소 같으면 고양이 앞에 쥐처럼 헌병 앞에 주눅이 잔뜩 들 수밖에 병사들이었지만 그 때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죽으러 가는 마당에 더 이상 헌병이 무서울 리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상황은 주변에서 높은 사람들을 비롯해서 많은 시민들이 보고 있는 판이라 헌병들은 평소처럼 거칠게 할 수 없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병사들은 개판을 쳐도 상관이 없기 때문에 헌병들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더 이상 지체 할 수가 없는 군용 열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헌병들은 닭 쫒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어 버렸다.

베트콩보다 헌병을 먼저 물리친 전공(?)을 세운 병사들은 기세등등해졌다. 우리가 객실에 들어서자 병사들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야! 거기 자리 비켜줘!”, “모포로 가려 줘!”하고 술과 과자를 가져다주고 난리도 아니었다. 평소에는 지나가던 여자들만 보아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천박한 군바리 기질은 순식간에 어디로 가버리고 그 순간에는 모두 중세기 기사가 되어 버린 심정이었다. 어떤 병사들은 먹을 것과 음료수를 가져다주면서 ‘부산까지 가야 돼. 절대로 내리면 안 돼! “하고 후까시를 잡기도 했다. 훈련을 끝내고 전장으로 가는 마당에 ’뭐 시비 걸게 없나? ‘했던 병사들의 심리상태에서는 재미있는 판이 벌어진 샘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우리 둘의 기분은 전혀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차분히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우리는 상당히 난처한 입장에 빠져서 말도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서 쳐다만 보고 있었다. 우리들의 일은 이미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 제대 전체의 사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열차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에는 병력을 부산까지 수송하는 책임을 맡은 호송 장교 대위가 나타났다. 그는 물론 우리와 같이 월남으로 가는 사람이 아닌 군용열차를 관리하는 수송부대 장교였다. 대위는 우리들에게 명령이 아닌 통사정을 했다.

“나도 여러분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규정상 군용열차에 민간인이 탈 수가 없다. 그리고 용산에서 육군본부에서 고위 장성들이 나와서 환송식을 하는데 이대로 타고 가면 나는 영창에 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수송 장교 대위가 통사정을 해도 병사들은 한 마디로 "좆 까지 마라! 영창을 가면 네 놈이 가지 내가 가냐?’는 식이었다. 이제는 다른 열차 칸에서 심심한데 재미있는 일 생겼다고 관광(?)을 오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천 명의 젊은 병사들이 탄 군용열차에 젊은 처녀가 한 명 타고 있다는 것만 해도 관심거리일 터인데 전쟁터로 가는 군용열차이니 그 기분이 어떠했겠는가? 그 시간만큼은 정희는 전체 병사들의 애인이었던 것이다.

한 참 있다가 스피커에서 점잖은 목소리로 방송이 나왔다.

“장병 여러분! 나는 여러분과 같이 월남으로 가는 제대장 김OO 중령이다. 여러분과 나는 한 마음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냐? 우리는 군인 아닌가? 보안대가 모두 보고 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월남으로 간다고 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보안대는 월남에도 있다. 여러분을 월남까지 인솔하는 것은 본관의 책임이다. 여러분의 협조를 간곡히 부탁한다. 이제 열차가 역이 아닌 곳에서 설 것이다. 그 때 전우의 애인이 내릴 수 있도록 협조를 부탁한다.”


우리와 같이 월남으로 파병되는 장교 가운데 가장 계급이 높은 중령이 공갈 반 호소 반으로 하는 소리였다. 같은 말도 시어머니가 하는 말 다르고 친정어머니가 하는 말 다른 법이다. 김 중령의 합리적이고 간절한 부탁이 있은 다음 분위기가 갑자기 수그러지기 시작했다.

방송이 끝나고 잠시 후 기차가 서서히 속력을 줄이더니 드디어 섰다. 호송장교 김 대위가 다시 우리 칸으로 와서 정희 보고 내려 달라고 했다. 다른 병사들이 “그런데 여기가 도대체 어디냐? 역도 아닌데 여자를 혼자 내려놓는다는 말이냐?”고 시비를 걸었다. 호송장교는 “군용열차는 운행 계획에 없는 역에 세울 수가 없다. 양해해 달라.”고 설명을 하고 정희에게 논두렁으로 조금만 가면 경춘 국도가 나오니 안심하고 내리라고 난처한 표정으로 설명을 해 주었다.

열차가 선 곳이 마침 오른 쪽으로 굽어진 곳이라서 정희가 내리는 모습을 모든 열차 칸에서 볼 수 있었다. 모든 병사들이 창문마다 승강구 마다 매달려서 정희에게 미친 듯이 손을 흔들어댔다. “영자야! 말자야! 순자야!” 제멋대로 이름을 부르면서 마치 제 애인에게 작별이라도 하는 듯이 “잘 가라! 잘 있어라!”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어떤 놈은 “고무신 거꾸로 신지 마라!”라고 소리를 질렀다. 너무나 당황한 정희는 뒤도 돌아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논두렁을 따라서 걸어가고 기차는 서서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광란의 시간이 지나고 서울이 가까워지자 열차 안은 점점 침울한 분위기에 잠겨버렸다.


군용열차가 서빙고역에 멈추었을 때는 이미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밤이었다. 샛노란 전등이 환희 켜진 플랫폼에는 춘천역의 3군단 군악대보다 훨씬 세련된 육본 군악대가 뿡빵거렸고 허우대 좋은 육군본부 의장대와 옷깃에 별들이 반짝이는 고위 장성들이 도열해 서 있었다.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파월 장병 가족들이나 민간인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헌병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는 가운데 공식 환송행사가 서빙고역에서 잠시 벌어졌다. 이미 파월 장병을 30만 명이나 보냈기 때문에 별 새로운 것도 있을 수가 없는 닳을 대로 닳아빠진 완전히 기계적인 환송행사였다.


행사가 끝나고 기차가 막 출발하려고 한 차례의 기적이 울릴 때였다. 갑자기 아무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또 다시 벌어졌다. 도대체 어떻게 삼엄한 헌병들의 경비를 뚫고 들어왔는지 어디선가 뚱뚱한 처녀 아이 하나가 갑자기 철로로 뛰어들더니 사색이 되어 “오빠! 오빠!” 하고 울부짖으면서 열차 창문에서 제 오빠를 찾고 있는 것이었다. 그 여자애는 열차 창문마다 새까맣게 매달려 있는 똑같은 군복의 병사들 사이에서 제 오빠를 찾을 수가 없으니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아마 두 시간 전의 춘천역에서 정희의 심정이 그랬으리라!

그런데 헌병들이 미처 그 여자애에게 다가가기 전에 기차에서 한 병사가 총알같이 뛰어내렸다. 필경 그 놈은 나보다도 훨씬 절박한 놈이었던 모양이었다. 두 남매가 철석같이 달라붙은 채 철로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며 몸부림치는 것이 아닌가? 무슨 절절한 사연이 있는지 두 남매가 처절하게 부둥켜안고 우는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남매는 오빠가 군에 오기 전에 얼마 전에 부모가 세상을 떠나서 고아가 된 처지였다는 것이었다. 그 광경은 아무리 목석같은 인간이라도 감정이 동요되지 않을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 열차에 탄 파월장병의 눈에는 모두 이슬이 맺히고 마음 여린 병사는 새로 입은 정글복 소매로 연실 눈물을 닦아냈다. 환송행사에 나왔던 높은 장교들도 제대로 쳐다보지를 못하고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높은 사람들은 말은 못하고 헌병들에게 손으로 빨리 떼어 놓으라고 신호를 보냈다. 

기차 안의 1,000 여명 장병들이 쳐다보고 있는데 두 남매를 떼어 놓아야 하는 헌병들의 입장은 아주 난처했다. 결국 친절한 유치원 선생처럼 태도를 바꾼 헌병 장교의 간곡한 설득 탓에 드디어 남매는 떨어지고 오빠는 헌병들에게 마지못해 등을 떠밀려 승강구에 올랐다. 그런 오빠의 마음을 헤아리기나 하는 듯 기차도 느릿느릿 출발하기 시작했다. 멀어져가는 기차를 바라보면서 여동생이 철로의 자갈 위에 주저앉아서 발을 구르며 넋을 놓고 우는데 내 생애에 그렇게 절망적으로 우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오빠! 오빠!” 부르며 울부짖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병사들이 하나 둘 눈물을 짓기 시작하더니 금방 돌림병이 번지듯이 열차 안은 너나 할 것 없이 오열하는 소리로 가득했다. 여기저기서 울다가 코가 메여 코를 풀어대는 놈, 스스로 자기도 모르게 울고 있는 자기감정에서 벋어나기 위해서 대상이 누구에게 라고 할 것도 없이 욕지거리를 해대는 놈, 있는 대로 소주건 맹물이건 닥치는 대로 들이키는 놈 등등 열차 안은 통제 불능의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그 때 어느 열차 칸에선가 군가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훈련기간에 이가 갈리도록 불러서 듣기도 싫던 군가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갈수록 격렬해졌다.

마치 군가소리가 작으면 누가 때려죽인다고나 한 것처럼 모든 병사들은 모두들 악을 쓰는 듯 군가를 불러대기 시작했다. 1,000여 명의 병사들이 두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 것이나 두드리면서 바락바락 악을 써대면서 아는 군가라는 군가는 모조리 메들리로 불러 제켰다. 마치 악을 쓰며 군가를 부름으로 마음 속 밑바닥에서부터 밀려오는 허전함을 물리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

우리를 태운 군용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점점 캄캄한 어둠 속으로 달리는 동안 악을 쓰며 군가를 부르던 병사들은 더 이상 목이 쉬어 군가를 부르지도 못하고 하나씩 지쳐서 잠에 떨어졌다. 눈을 떠보니 기차는 이른 새벽 부산항의 제3부두에 도착해 있었다.

또 다시 간략하고 형식적인 환송식이 벌어졌다. 부산에 있는 여고생들이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파월장병의 환송식에 순번제로 동원되어서 나눠진 태극기 몇 번 흔들다 가는 것이 행사의 전부였다. 드디어 배가 바다로 미끄러져 가고 육지가 점점 작아졌다.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는 나라 한국을 떠난다는 것이 시원했지만 “드디어 떠나는구나! “ 하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