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써두었던 독서일기입니다. 이 글의 결론부분을 보고 노빠 박빠 개독교 호남주의 관피아 등등을 떠 올리는 분도 있을법 한데, 그런 현상들 아래 잠복해있는 독특한 원인을 짚어보고 싶은 욕구로 이 글 올립니다.

 

 

왜 김상봉인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마르크스가 1845년에 집필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Thesen über Feuerbach>에서 한 말이다. 김상봉 교수는 자신의 저서 <학벌사회>의 첫머리에 이 말을 인용하지만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선 우선 치밀한 분석과 해석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한국사회 전반을 일별만 하더라도 저자가 왜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키워드로 “학벌”을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사회과학이라는 것이 보편성속에서 특수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일반 등의 여러 사회부문을 젖혀두고 하위개념으로 치부되는 교육, 그 중에서도 ‘학벌’로 우리사회를 설명하려는 이런 시도는 그 자체가 저자의 한국사회에 대한 관점을 명시한다. 

 

저자는 한국사회를 다른 어떤 사회와도 구별되는 특이한 사회로 본다. 그리고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학벌’이란 대한민국의 특유한 현상인데 서울대학교 출신들의 권력, 금력, 정신문화력의 독점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가족주의이다.>라는 것이다.

 

또 ‘학벌’은 사회적인 차별과 불평등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학벌집단의 구성원들에게도 독특한 방식으로 부작용을 일으킨다고 한다. ‘학벌’이란 ‘학벌의식’이 없으면 존재하지 못하는데, 학벌의식이란 개인이 학벌집단 속에서 자기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주체성을 스스로 포기하고 양도함으로써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개인의 주체성은 아무런 실재적 내용도 갖지 못하는 한갓 추상적인 주체성으로 격하되고, 개인은 오직 특정한 학벌의 구성원으로서만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 이런 학벌의식의 생성원리는 무엇인가? 모든 과학은 특정 현상에 대해서 왜? 하고 묻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특히 현상에 대한 분석의 결과가 기괴할수록 그 원인에 대한 궁금증은 더 커진다.

 

왜 이런 학벌의식이 생겨났을까? 그리고 저자의 말대로라면 ‘학벌’이 우리사회의 모든 구성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고 그 시스템에 근본적인 제한을 주는 것이라면, 모든 구성원들이 그것을 인지하고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왜 인지조차 못하는 것일까? 칸트를 전공한 철학자답게 저자는 먼저 철학적인 물음으로 학벌사회의 연원을 찾는다.

 

 

사회란 무엇인가?

사회과학자들은 오랫동안 사회에 대한 정의를 두 가지 대립되는 관점으로 파악해왔다. 그 하나는 사회를 개인의 집합체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격성이 제거된 하나의 구조로 보았다. 하지만 개인의 집합체인 사회가 진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선 개인들이 ‘주체’적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독립되고, 의식적으로도 개별화된 개체이지만, 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한다고 해서 인간이 ‘주체’적인 것은 아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노예 같은 인간이 과연 주체적일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런 인간들의 모임이 과연 ‘사회’일수 있겠는가.

 

 

주체, 주체성

서양철학에서 칸트를 비롯한 독일의 관념론자들은 이른바 ‘반성하는 자아’를 주체적인 인간의 기준으로 보았다. 쉽게 말하면 한 개인의 의식 속에는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역사속의 자기와 그 자기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또 다른 자기인 시간에 불변하는 자아가 있다. 이 불변하는 또 다른 자기가 역사속의 자기와 소통하는 과정에서 두 개의 자기는 동질적이면서도 동시에 객관적이 될 수 있다. 비로소 그 때 이 두 개의 자기는 하나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칸트식의 자기본위의 주체성은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심하게 말하면 주체적이고 완성된 인간이 왜 굳이 다른 사람과 모여 사회를 이룰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또 다른 20세기 철학자인 후설은 이 점을 비판하면서 타자에 대한 지향성속에서 주체성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인격적인 타자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타자가 존재한다는 단순한 인식을 통해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한다는 점에서 칸트류의 자기본위의 주체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은 왜 사회를 이루는가?

이런 칸트식의 주관주의적인 존재이해방식으로는 사회라는 존재의 당위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플라톤식의 몰자아적이고 구조적인 개념, 즉 자기를 비인격적인 전체의 한 부분으로서 파악하는 객관적주의적 존재이해방식도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이런 이론대로라면 전 세계의 모든 개인이 다 사라져버려도 그 ‘구조’나 혹은 전체인 ‘사회’는 존재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은 분명한 모순이다.

 

현대철학은 이 두 방식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시도에서 시작된다. 저자인 김상봉 교수는 존재이해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언어인 ‘서로주체성’ 개념을 도입하고, 그 서로주체적인 인간들이 모여서 형성한 사회를 ‘사회적 공동주체’ 라고 한다. ‘서로주체성’이란 ‘나는 너와 더불어 우리가 되지 않고서는 결코 내가 되지 못한다’ 라는 통찰이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방인 너가 필요하다는 것이며, 서로의 영향 하에서만 우리는 완전한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왠지 기시감이 드는 개념인데, 붓다가 정명을 이루고 처음 한 일이 보리짚단 두 개를 기대어 세워놓고 “보아라. 이것이 내가 본 것이다” 라고 했다. 즉 인간의 본성은 한 개인이 아닌 둘이 될 때 비로소 완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동양문화권에서 알게 모르게 우리 의식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다. 한자 사람 인(人)은 붓다가 시현한 그 장면 외에 더 이상이 아니다.

 

 

사회의 속성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설명한 말 중 가장 적합한 말은 불교용어인 ‘인디라망’ 일 것이다. 인간사회를 표상하는 큰 그물이 있으며, 각 씨줄 날줄의 교차지점에는 개인을 표상하는 구슬이 달려있다. 그 구슬은 옆의 구슬을 비치고 그 옆의 구슬은 또 그 옆의 구슬을 비추고... 이런 식으로 하면 한 구슬은 자신 안에 그 외 다른 모든 구슬을 비추고 담을 수 있다. 이 말은 한 개인의 속성은 그가 속한 전체사회의 속성을 표상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칸트식의 주관주의적인 존재이해에 따르면 불변하는 자아와 역사적인 자아가 동질적이면서도 동시에 객관적으로 될 때만 한 개인은 온전한 개체인 ‘주체’가 될 수 있다. 개인을 불변하는 자아로 사회를 역사적인 자아로 유비하면, 나와 사회가 동질하면서도 객관적인 관계가 형성될 때 그 사회는 온전한 ‘주체’적인 사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학벌과 권력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왜 ‘학벌’인가 라는 물음에 답할 때다. 우리사회의 근본 구성원리와 작동원리가 왜 학벌이라는 프레임을 바탕으로 형성되는가?

 

요즘 오바마뿐만 아니라 미국의 교육부장관까지도 한국의 교육열에 대해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한국의 교육이 아니라 ‘한국의 교육열’에 대한 찬사라는 것이다.

 

한국의 학벌을 탐구하기 전에 한국의 교육열은 대체 어디에서 근원하는가 라는 물음이 자연스럽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의 교육열은 순수한 학문탐구의 열의가 아니라 바로 ‘권력욕’이다.

 

2002년 대통령 선거 출마자의 출신학교를 보자. 이회창, 최병렬, 이부영, 이상희 등의 한나라당 후보는 모두 서울대였다. 새천년민주당의 후보자중 노무현 대통령을 제외한 여섯명중 4명이 서울대, 두명이 고려대 출신이었다.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과 사회당도 사정이 마찬가지였는데 권영길, 김영규씨도 서울대 출신이었다.

 

노무현정부의 열세명의 수석비서관도 문재인씨를 제외하고 모두 서울대 출신이었다. 처음 내각 인선도 국무총리 포함 19명의 장관중 서울대 출신은 11명이었다. 권력이 사적으로 소유될 수 없고 반드시 집단적으로 행사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노무현정부도 사실상 대통령이 권력을 잡은 것이 아니라 서울대가 권력을 잡은 것이었다.

 

주요 공직인 장.차관과 판.검사, 그리고 교수, 언론인, 100대 기업의 CEO들을 막론하고 한국사회의 실질적인 지배계층은 서울대이다. 서울대 집중도가 가장 약하다는 입법부 국회의원의 예에서도 이런 현상은 두드러지는데, 우리와 사회구조가 비슷하다는 일본과 비교해도 그 정도가 심하다. 일본의 도쿄대출신 국회의원의 비율은 18. 5%인데 비해 한국은 두배에 가까운 36.1%이며, 미국은 어떤 대학이라도 상원은 5%미만, 하원은 보통 1~2% 점유율을 보일 뿐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권력의 독점은 자본의 독점으로 이어지며, 또한 문화와 정신의 영역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즉 서울대는 본래적 의미에서 학문공동체가 아니라 사회의 모든 권력과 자본, 영향력을 재생산하는 일종의 장치인 것이다.

 

 

가치와 권력정당성의 문제

이렇듯 서울대는 학문의 요람이 아니라 권력의 요람이다. 하지만 지배를 권리로써, 그리고 타인의 복종을 의무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배를 위한 이데올로기적인 정당화가 필요하다. 다른말로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이른바 ‘자격’이 필요한데, 이 자격은 도덕적, 윤리적 정당성이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지배계급의 자격으로 지혜, 용기, 절제를 말한다. 그 이유는 지배계급의 그런 미덕과 탁월함으로 궁극적으로 공동체 전체에 유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단순하다. 한마디로 학창시절의 시험성적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학창시절의 시험성적이 좋은 사람이 지혜, 용기, 절제등의 미덕을 갖추고 있으며, 또 그럼으로써 이 사회의 지배계급이 될 수 있다고.

 

김상봉 교수는 한 가지 사례를 든다. 한 여학생이 서울소재 비인기 사립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학부시절에는 과외가 거의 없었고, 있다 하더라도 20만원정도 받았는데,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하자마자 과외가 밀려들고, 보수도 4배가 뛰었다. 과연 이 학생은 학부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하자마자 없던 지혜와 용기와 절제가 생겼는가.

 

혹자는 또 이렇게 반박할 수 있다. 서울대에 갔다는 이야기는 머리가 좋다는 이야기이며, 머리가 좋은 사람이 지배층에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에 이상봉 교수는 또 한가지 조사결과를 내 놓는다. 중앙부처 4급까지 공직자의 경우 18%에 불과한 서울대 출신의 비율이 3급이상 공직자의 경우에 29.9%로 뛰어오르고, 장.차관의 경우에는 다시 그 보다 2배이상 뛰어오른다. 이것은 권력핵심에 다가갈수록 서울대의 비율이 비약적으로 높아진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사실은 사법시험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법조계나, 혹은 100대기업이사의 비율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권력의 주변부보다 권력의 핵심부로 갈수록 서울대 비율이 증가한다는 것이 학벌의식의 더 심각한 폐해이며, 또한 머리 좋은 사람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일종의 사기임을 밝히는 실증이다. 과연 어느 누가 똑 같은 사법시험을 통과한 판.검사들 중에서 서울대 출신만이 법조계의 중추를 맡을 역량이 있다고 강변하겠는가? 이것은 분명 학벌의 배타성, 끼리끼리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왜 하필 학벌인가?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다. 권력을 배분하는 방법으로서 왜 하필 학벌인가? 전체 수험생의 0.5%정도밖에 되지 않는 서울대생만이 왜 권력을 잡아야 하는가? 시쳇말로 잘생긴 순서대로, 아니면 돈 많은 순서대로 할 수도 있지 않는가? 왜 학벌만이 지배의 정당성으로 이용되며, 대중은 그에 대해 이토록 무감각한가? 하지만 그 전에 학벌의 모태가 되는 가족주의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슬픈 현실 - 가족주의

개개의 존재들이 자유롭게 만나 공동체를 이루는 공동의 기억이 역사이며, 그 보편적 욕구가 이념이 된다. 개인이 이런 종류의 역사와 이념 속에서 타인과 만날 때, 개인이 자신의 주체성을 타자에게 잃지도 않고, 타자의 주체성을 침해하지도 않는 ‘주체’적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인간이 세상에서 처음 마주치는 공동체는 바로 ‘가족’이다. 하지만 가족이 최초로 향유하는 공동체이긴 하지만 자유로운 공동체도 아닐뿐더러 보편적 공동체도 아니다. 가족은 자연에 의해 필연적으로 강제된 만남이며, 공동체의 이념이라는 것이 없다. 즉 가족은 구성원의 생존과 복리만을 위한 집단인 것이다.

  

김상봉 교수는 이런 1차적이고 자연적 공동체인 가족에서 벗어나면 마주치는 2차적인 사회적 공동체를 ‘인륜적 공동체’라고 명명한다. 이 인륜공동체에서만 개인은 ‘주체’적으로 그 집단과 상호관계를 맺으면서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는 이런 인륜적 공동체가 없다. 오직 확대된 가족만이 있다. 극단적인 말처럼 들리지만 한국사회를 단적으로 가장 잘 표현한 말일 것이다.

 

 

유교와 가족주의

그럼 왜 가족주의인가? 김상봉 교수는 역사에서부터 그 뿌리를 찾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정치학에서 가족과 국가를 명확하게 구별하고 있다. 하지만 유교적인 전통에서는 국가를 다스리는 것이 곧 가정을 다스리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조선 사대부가 국가 역시 확장된 가족이라는 개념을 세워, 고려시대 귀족주의의 폐쇄적 족벌지배를 타파하고 가족적인 위계로 사회통합을 꾀했다는 점은 그 당시로 봐서는 진보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유교적인 가족 이데올로기는 두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는 개인은 가족 내에서 자립적인 주체가 아니라 가부장이 영위하는 삶의 한 계기로서만 존재하며, 둘째는 이른바 큰 가족인 국가와 작은 가족인 혈연가족의 이익이 충돌할 때, 작은 가족의 이익이 더 우선시된다는 것이다. 즉 공과 사가 섞여버린다는 것이다.

 

 

문중과 과거제도

조선시대의 관리채용은 과거제도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성호 이익이나 다산 정약용은 당시의 과거제도를 말하면서 “과거제도가 생기면서 선비들은 헛된 문장에만 힘쓰고 실효를 내는 자가 없다. 우리나라의 천 가지 병통과 백가지 폐단이 모두 여기에서 연유한다”라고 탄식했다.

 

그 당시 과거제도라는 것은 공직에 진출하기 위한 주요 관문이었으며, 공직진출은 권력과 금력, 사회적인 명예를 한꺼번에 얻는 길이었다. 이처럼 전통사회에서 학문과 배움이 곧 권력의 수단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각 가족공동체 즉 문중은 과거시험에 가문의 사활을 걸었다. 그 결과 왕도정치의 이상은 허울뿐이고, 오직 가문의 영광을 위해 니전투구하는 씨족문중들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권력의 집중속성을 보여주듯, 몇몇 벌열가문 즉 명문가문에서 과거를 통한 모든 공직을 독점해갔다. 마치 오늘날의 서울대의 역할을 한 것이다.

 

 

제2의 가족, 학벌

조선시대가 외세에 의해 막을 내리면서 이른바 확대가족인 문중이라는 세력도 종말을 맞았다. 하지만 식민지와 6.25는 문중을 해체했지만 개인을 자립적 주체로 만들지 못했다. 이전에 개인은 어떤 문중에 귀속함으로써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상을 획득했다. 하지만 문중이라는 것이 해체되고 생겨난 핵가족은 예전의 위상과 권력을 지켜주기에는 너무도 소규모로 분해되었다. 따라서 개인을 사회에 매개시키는 통로인 문중이 없어지면서 문중적 개인이 소멸되고, 근대적인 의미의 주체적인 개인도 그 생성을 위한 사회적인 토대와 연원이 너무 얕았다.

 

돌이켜보면 식민지시대의 수탈구조와 6.25전쟁의 참화 그리고 그 이후 독재정부를 통틀어 국가가 진정한 의미에서 민중을 위해 존재한 적이 없었다. 이런 역사적 체험은 개인으로 하여금 국가의 보편적 이익을 냉소하고 오직 자신의 소가족적인 이익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가족과 씨족의 울타리를 넘어 개방된 2차 사회집단 즉 ‘인륜적 공동체’로 나아가기보다 거꾸로 모든 사회적 관계를 가족관계로 변화시키는 경향성을 갖게 되었다.

 

정상적인 사회발전의 흐름이라면 가족에서 인륜적 공동체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이런 정상적인 흐름과 완전히 반대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어쨌든 우리사회는 여건상 아직도 개인이 사회와 매개되기 위한 인륜적 공동체가 필요했고, 그 매개 역할을 해왔던 문중을 대신할만한 것을 찾아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학벌이다. 학벌은 불변성과 폐쇄성 그리고 계급적 동질성 때문에 전통적인 문중의 대체물로 충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래로부터 내려온 학문과 배움의 전통을 잇는다는 점에서 문중에 속하지 못하는 하층 민초들에게도 거부감이 없었다.

 

학벌은 계급도 신분도 아니다. 타고날 때부터 정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분이 아니고, 계급이면 변동이 가능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사업에 실패한 CEO가 어묵을 팔면 그의 계급은 자본가계급에서 노동자계급으로 바뀐다. 하지만 한번 학벌은 영원한 학벌이며, 한번 해병대는 영원한 해병대다. 그런 의미에서 학벌은 한마디로 괴물적이다.

 

모두에서 지적한 학벌의 폐해를 다시 한 번 짚어보자. 한 개인이 ‘주체’가 되기 위해선 자신안에 있는 불변하는 자아와 역사적인 자아의 반성적인 소통이 필요하다. 한 인륜적 공동체가 ‘주체’가 되기 위해선 구성원인 개인과 인륜적 공동체의 반성적인 소통이 필요하다. 그리고 국가 공동체가 ‘주체’가 되기 위해선 구성원인 인륜적 공동체와 국가와의 반성적인 소통이 필요하다.

 

하지만 일종의 인륜적 공동체인 학벌이라는 괴물적인 공동체에서는 그 구성원의 주체성을 말살시켜버리고, 또 자신이 그 구성원인 국가라는 전체사회와의 소통도 역시 불가능하다. 쉽게 말하면 개인과 국가사이에 끼여 동맥경화증을 일으키게 하는 주범이다. 그리고 정말 심각한 문제는 이 학벌이라는 공동체가 우리사회의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집단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가족 - 삼성

기업의 목적은 이익이다. 가족의 목적은 가족 구성원의 생존과 복리다. 기업의 목적이 사원의 생존과 복리가 될 수 없듯이, 가족의 목적이 이익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몇 년 전 TV전파를 타던 이 광고카피는 그 자체로 거의 호러였지만, 그 누구도 그게 호러인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더 호러였다.

 

북한은 지금 3대 세습중이다. 삼성도 역시 3대 세습중이다. 조용기 목사도 역시 세습중이다. 사학재단도 세습중이다. 공무원들도 특채로 세습중이다. 이젠 세습이 아니라 네습, 다섯습까지 갈 모양이다.

 

모교(母校)라는 말은 한국에서 유일하다. 이 말뜻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같은 학교 출신들은 다 형제자매라는 이야기인데 어쩌면 비유적으로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결코 비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실제 형제자매보다 더 한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 친해서 나쁠 건 없다. 하지만 타집단에 대해서 배타적이고 소통에 있어 동맥경화라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우리사회는 유교적 가족주의와 근대사의 비극이 합쳐져서 지금 다 자라고도 알에서 깨어 나오지 못하는 기형아가 되고 있다. 그 비좁은 알껍질 속에서 모든 요소들은 뒤섞여버리고 상호침투해서 프란시스 베이컨의 불명료적 회화가 되어버린다. 비단 학벌집단뿐만 아니다. 사회의 모든 공동체들, 예를 들면 기업, 정당, 시민단체, 하다못해 무슨 ~빠나 동호회같은 조직수준이 낮은곳까지 배타성과 의사소통의 동맥경화를 경험하고 있다. 

 

 

영혼없는 인간

다시 모두에서 언급한 이상봉 교수의 말을 빌어온다. “개인의 주체성이란 타인과의 관계, 즉 어떤 집단을 통해서만 발현된다. 하지만 자신의 주체성을 스스로 포기하고 양도한다면 한 개인은 아무런 실재적 내용도 갖지 못하는 추상적인 존재가 될 뿐이다.” 학벌의식은 그런 경향성의 현저한 발현중의 하나이고, 정치 종교 경제 각 부문에서 나타나는 ~빠 열풍과 광신, 배타의 한 특수한 모델일뿐이다.

   

데카르트의 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는 명제의 이는 이렇게 될 것이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고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