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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어의 souvenir라는 말은 시에도 음악에도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souvenir를 제명으로
내세운 곡이 제법 많고 그 곡들 모두가 일정한 매력과 특징을 갖고 있기도 하다. 추억이
사람의 생각과 감각에 그만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파가니니의
,<베니스 카니발>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쇼팽의 <파가니니의 추억>은 얼마나 상큼한
보라색 물빛으로 번쩍이는가. 차이콥스키의 현악6중주곡 <플로랜스의 추억>, 비에냡스
키의 <모스크바의 추억>도 독특한 이국풍의 색채를 뽐내는 매력적인 곡들이다. 나도 이
souvenir라는 단어를 무척 좋아하는 편이다.
 

 Brahms의 네손을 위한 피아노 연탄곡 <러시아 추억(Souvenir de la Roussie)>은  LP
바람이 불기 시작한 몇해 전 음반점에서 우연히 음반을 얻었는데 잘 알려진 러시아의
듀오 로쯔데벤스키와 포스트니코바 부부의 연주였다. 러시아엔 이 곡 연주를 즐기는 또
한쌍, 타티아나와 레오니드가 있다. 역시 부부가 손을 맟춰야 이 연탄곡은 완벽 하머니
가 이뤄지는 모양이다.
 네 손을 위한 피아노 연탄곡-흘러간 시대의 유물 같은 느낌이 들고 현대에 자주 무대
에 등장하지도 않는다. 모차르트 곡이라 해도 이 형식은 왠지 싱겁고 연주자의 개성이
나 특징이 드러나지 않아 크게 흥미를 끌지 못한다.
 

 브람스의 출세작 <헝가리무곡>도 초기에는 연탄곡으로 출발했다. 그가 클라라 슈만과
1868~1880년 사이에 공식무대에서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아 이 곡을 연주했다는 기
록이 있다. 그 모습을 상상하면 브람스가 왜 연탄곡에 유독 열중했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브람스는 헝가리를 여행하고 <헝가리무곡>을 썼지만 러시아엔 가지 않았다. 사
실은 <러시아 추억>이란 제명도 후대 연주가들이 편의상 붙였을 가능성이 많다.
이 곡은 러시아 민요 외에 보헤미아 민요에서도 악상을 빌려오고 있기 때문에 제명
자체에 약간의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곡에 붙여진 소제목들이 재미있다. 5번-커다란 마을이 길게 누워있다. 4번-타이팅게일.
3번- 그대 아직 깨어나지 않은 어스름 새벽에. 2번-지류, 혹은 갈래길 등인데 자연풍
경과 그곳에서 피아나는 로맨틱한 심상을 그렸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음악 자체도
<헝가리무곡>이 그렇듯 빠른 리듬, 표정의 잦은 변화, 특유의 활기와 우수가 각 곡
마다 색채를 바꿔가며 잘 녹아들어 있다. 그리고 내가 듣기에는 러시아의 지방 풍광
을 어느 곡 보다 더 생생하게 묘사해내고 있는 것이다.
 

 2005년-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기후가 가장 좋다는 7월에서 9월 사이 나는 모스크
바 동남부 라잔 지방을 잠시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아까강이 그곳에 있고 솔제니친
의 중편소설 <마뜨료나네 집>의 무대도 그 지역이다. 고려인 작가 A의 멋진 다차도
그 지역 가브리노란 마을에 있는데 그 다차에서 일주일 가량 머물면서 그와 함께 숲
으로 가서 흰 버섯을 따기도 했다. 다차 앞에 있는 큰 호수 건너 마을에는 A의 친구
이자, 전형적 러시아 농부(農婦)인 니나네 집이 있는데 거기서 맛있는 삶은 계란을 실
컷 대접받은 기억도 있다. 전상자(戰傷者)인 남편을 일찍 보내고 홀로 땅을 일구며 살
아온 니나는 여러 가지로 솔제니친의 마뜨료나와 닮았었다.
 

 러시아 숲은 끝이 없다.(요즘은 벌목으로 많이 훼손되고 있다 한다.) 하늘도 끝이 없
다. 솥뚜겅처럼 하늘이 넓었다. 앞을 가로막은 산이 없는 것이다. <하늘은 정말 넓어
요.>라는 노래를 A가 흥얼거려 들려주었다. 나는 그곳에서 친구 하나를 사귀었다. 다
차 뒤뜰에 있는 한 그루 뿐인 러시아 민들레였다. 키가 허리에 닿을만큼 큰 파클론
아드반치쿠의 모습이 특이해서 눈길을 끌었다. 그 옆에 앉아 친구와 이런저런 대화
를 나누곤 했다. 그리고 재작년 7년만에 니나의 무덤을 찾아간 성묘 길에 다차에
다시 들렀는데 제일 먼저 뒤뜰의 친구에게 달려갔다. 그가 무사한지 궁금했던 것이
다. 민들레는 그사이 군락을 이룰만큼 크게 번성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소형 카메
라에 여러 장 담아왔다.
 

 포스트니코바와 로쯔데벤스키의 <러시아 추억> 연주는 과연 부부 연주답게 한치 빈
틈 없는 완벽호흡을 뽐낸다. 짙은 우수와 활력이 교차하는 곡의 진전에 따라 내 시야
에도 오래 전 라잔에서 보았던 끝없는 숲과 하늘, 평원 사이에 난 여러 갈래 길이 펼
쳐지고 그곳에서 만났던 여러 인물들의 갖가지 표정과 목소리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추상의 판타지인 브람스의 <러시아 추억>은 우랄합창단이 부르는 러시아 민속곡인
<레비니슈까>나 <카투사>같은 실체가 있는 노래 보다 도리어 더 사실적이며 포괄적
으로 러시아 풍경과 정취를 생생하게 환기시켜 준다. 브람스는 러시아에 여행한 적도
없는데 말이다. 이것이 뛰어난 예술작품, 기악곡의 매력이고 미덕일 것이다. <레비니
슈카>는 레비냐란 나무와 참나무가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그리워한다는 러시아민담
을 소재 삼은 노래이다. 레비냐 나무에는 빨간색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밤에 불빛이 비
추면 루비처럼 아름답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