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에 대해서 나는 결론을 내릴 자신이 없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살아온 내 경험과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는 성경 지식 등에 근거해서 이야기하자면 인간은 우주에 존재하는 피조물 가운데 가장 탁월한 소양을 갖고 태어난 존재라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양이 죄로 인해 심각하게 오염된 존재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모순된 특징이 결합된 존재, 이것이 인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정도는 사실 뻔한 얘기고, 누구나 아는 얘기라고 할 수 있지만 개인적인 견해로서 조금 더 덧붙일 말이 있다. 그것은 인간은 적어도 개인의 차원에서는 선이라는 것을 추구할 수도 있고, 행운에 힘입어 좋은 결과물을 얻을 수도 있지만 집단이라는 차원으로 가면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집단을 이루면 어떤 노력을 가울여도 그것은 사악한 성격을 갖게 된다고 본다. 이러한 현상은 집단의 규모가 커질수록 심각해지는 것 같다.


집단으로서의 결과물이 사악하다는 말이 그 사악한 집단이 꼭 사악한 결과물만을 낳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사악한 집단의 속성을 통해서도 선한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항상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고, 집단으로서 좋은 결과물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좀 극단적으로 말해서 집단의 차원에서 이뤄지는 모든 의사결정은 최선도 아니고 차선도 아니고 그저 차악을 선택하는 기술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것은 항상 일종의 교환(trade-off)이며,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방식의 숙명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은 국가나 조직 등 인간 집단이 추진하는 계획이나 그렇게 해서 얻는 결과라는 것이 항상 일시적이고 부분적이라는 것, 완전히 선한 결과물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으며 그것을 목표로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준다.


근대국가의 법률체계도 기본적으로 인간 집단에 대한 불신에 기초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삼권분립 즉 입법과 사법, 행정으로 권력을 분산해 어마어마한 비능률과 낭비를 낳으면서까지 서로 견제하게 한 시스템이다. 우리나라 진보들이 치명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 그리고 기층 민중의 불신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기층 민중들은 돈에 관한 한 자기 자신도 잘 믿지 않는다. 자기 이웃이나 외부 세력 등 집단화된 존재들은 더욱 믿지 않는다. 사람이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 돈이 거짓말하는 것이라는 시정의 관용적 표현은 민중들의 이런 경험이 녹아있는 일종의 경구이다. 그런데 진보 좌파들은 이런 민중들에게 돈 문제, 자원 배분의 문제를 놓고 “우리를 믿고 따라오면 지상천국을 만들어줄 것”이라고 약속한다. 게다가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집단화를 가장 우선시하고 강조한다.


미안하지만 민중들은 진보 좌파의 그런 장담을 믿지 않는다. 돈에 관한 한 자기 자신이나 이웃조차도 믿을 수 없는데 어떻게 풋내기 대학생 냄새가 풀풀 나는 진보 좌파들을 믿을 수 있나? 그냥 믿는 척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건 예의상 그러는 것이거나 또는 자기 자신도 그런 신념을 가지고 싶다는 염원의 표현이거나 좀더 극단적인 경우 그 진보 좌파를 이용할 필요성 때문에 그러는 경우이다.


민중들은 분명 현실 개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으며 개선 욕구도 강한 편이다. 하지만 그러한 필요성과 욕구에 부응하는 방식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의 그 불신, 절대적으로 합리적인 근거를 가진 그 불신에 기초해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불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철저하게 불신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기이다.


법치주의가 작용하는 근대국가에서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는 방안은 첫째, 국가 권력이 특정 집단이나 계급의 사적인 이익을 편향적으로 추구하는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국가 권력 자체가 거대한 이익 집단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 미립자화의 동력이다. 즉,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단위가 작아질수록 그 사회의 공정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개인의 차원을 벗어나 집단화된 인간 세상은 결코 선한 것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집단이 아닌, 각각 개인적인 이익만을 대변하고 추구할 때 즉 완전히 미립자화된 개인들로만 존재하게 될 때 그 사회는 가장 공정한 상태에 이른다고 보는 것이다.


87년 체제의 등장으로 인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군사독재와 그 이후 우리나라를 분할 점령하고 있는 각종 이익집단들이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60년대 이후 박정희를 정점으로 한 군사독재 체재는 군부 엘리트들을 중심으로 재계와 테크노크라트들이 연합하여 비교적 단일화된 이해관계를 구현하고 있었다. 이들 집단과 집단 사이에도 이해관계에 따른 갈등과 대립이 없지 않았지만, 그것은 큰 흐름에서 봤을 때 무시해도 될만한 수준이었다.


10.26과 80년 서울의 봄은 이들 집단들의 이해관계가 더 이상 일시적인 땜질이 불가능할 정도로 금이 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공동 이해관계를 구현하고 있던 기득권 내부의 균열이 체제 붕괴와 전환의 직접적인 계기였던 것이다. 전두환의 신군부가 폭력과 유혈사태를 통해 집권했던 것은 급진적인 변화와 혼란으로 인해 기득권 집단 내부의 교통정리가 어려워지고 결국 기득권 세력 전체의 몰락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이들 진영 내부의 합의에 따른 결과라고 이해해야 한다.


전두환 정권은 가장 폭압적인 형식으로 집권했으면서도 집권 기간에 본격적인 개방의 질서를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린 그 균열의 힘이 계속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권 세력의 대표성은 전두환 등 군부 엘리트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점차 테크노크라트와 재벌, 언론사 등의 비중이 커지기 시작하고, 이들 사이에서 이해 관계의 균열이 일상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1987년 6.29는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권력 내부에서 군부 엘리트의 역할이 사실상 끝나고 그 공백을 채울 전문가 집단들이 등장하게 된다. 엘리트 관료와 검찰 권력, 언론, 법조계 및 다양한 전문가 집단이 권력을 분할한 것이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전문가 집단들이 기득권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각 집단 사이의 상대적인 갈등도 점차 커지게 되며 나아가 국가 공동체 전체의 이익보다는 자기 집단 내부의 이익을 우선시하게 된다.


군부독재에서 보다 미분화되고 소형화된 이익집단들로 주도권이 넘어간 것은 그 자체로 진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진보성은 보다 미분화된, 독립된 개인들로 구성된 공동체로 가는 과도기의 상태로 이해해야 한다. 게다가 미분화된 전문가 집단들로 구성된 공동체는 서로간의 이해 충돌과 견제 및 절충/타협으로 인해 공동체가 근본적인 변화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 이 공동체는 현상 유지 외에 변화가 거의 불가능한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 전문가 집단이 군사독재 대신 기득권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주요 기구로 자리 잡으면서 기득권 집단의 이익은 더욱 배타화되고 집중화·독점화되는 성향도 나타난다. 우리나라 기득권 집단의 모집단인 영남 출신들이 전문가 집단 내부를 사실상 점령하고 독점하면서 기득권의 편중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진입장벽이 더욱 높아지고 두터워진 현상이 이를 잘 보여준다.


전문가 집단들로 구성된 기득권 시스템이 매우 강고한 현상유지적 특성을 가진다는 것은 최근의 선거 결과들이 잘 보여주고 있다. 야권은 몇 번에 걸친 선거 결과를 놓고 그것을 진보개혁 진영의 일상화된 패배라는 의미로 받아들이지만 사실 그보다 더욱 깊은 근저에서 심각하게 검토해야 할 의미가 있다.


그것은 현재의 정치 구도가 51 대 49의 구도로 고착되어 어느 누구도 상대방을 압도하여 대폭적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의미이다. 누가 51을 차지하느냐를 놓고 자리바꿈이 있을 뿐, 60 대 40 등으로의 구조 변환 및 사회 시스템 자체의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이것은 여당도 영남, 야당도 영남이 장악하고 그러한 구조를 유지 재생산하는 강력한 무기로 전문가 집단이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