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대선의 승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정치 기획이 하나 있었다. 바로 대선을 앞두고 조선일보가 반짝 기획으로 진행한 ‘주폭 근절 캠페인’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기획의 성격과 목적, 달성한 효과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조선일보의 그 기획기사가 대선용으로 상당히 정밀하게 설계된 아이템이라고 봤다. 선거나 정치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그 기사는 독자들에게 ‘절대 진보좌파 세력에게 정권을 넘겨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했다고 본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간단하다. 법과 질서를 무시하는 행위, 실생활에서 서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대표적인 행태인 주폭들의 행위를 진보 좌파 등 야권세력이 오랫동안 해온 행태와 아주... 효과적으로 연결할 수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야권에게는 무척 억울한 얘기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일반 서민들에게 비친 야권의 이미지는 조선일보가 교묘하게 세팅한 주폭의 그것과 상당히 많이 겹쳤을 것이라고 본다.


대안도 없이 무조건 반대만 하고, 법질서보다는 그 반대편을 더 옹호하고, 범죄 피해자보다는 범죄자들의 권익을 더 감싸고 돌며, 우리 사회의 광범위한 다수의 권익보다는 상대적으로 소수들의 권익에만 더 민감한 감수성을 보인다. 이것이 진보좌파의 정체성이라고 했을 때 야권이 이를 쉽게 반박할 수 있을까? 이런 행태를 주폭의 깽판과 연결시키는 것은 조선일보 같은 이미지 메이킹 전문가들에게는 매우 쉬운 일이다.


진보 좌파의 이런 태도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나는 기본적으로 이것이 우리나라 근대화의 성격과 방향에 대한 오해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본다. 조선 후기 이후 우리 민족의 가장 핵심적인 고민이자 과제는 근대화의 이슈이며 이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현재진행형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근대화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그 핵심 원리로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그리고 국민과 국가의 관계를 합리적인 계약의 정신에 근거하여, 법률의 형식으로 정립시킨 법치주의의 정신을 빼놓을 수 없다. 이러한 법치주의가 확실한 사회적 약속으로 자리잡고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의식에 내면화될 때 그 사회에는 매우 중요한 자산이 쌓이게 된다. 그것은 바로 신뢰라는 자산이다.


한국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 그 중에서도 신뢰 자산이 무척 빈약한 나라이다. 우리나라의 근대화가 내적인 동력이 아니라 외부의 힘 즉 일제 식민지에 의해 본격화된 것도 여기에 영향을 주었고, 이후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 쿠데타와 헌정 중단 등도 다양한 사회관계에서 신뢰를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는 한국 사회의 특징을 ‘피난민 사회’라고 규정했다. 이웃이나 다른 집단들과 장기적인 신뢰에 기초한 관계를 형성하여 상호 윈윈하는 구조가 아니라 보따리 장사, 떴다방 방식의 사업/인간 관계가 만연한 현상을 지적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한국은 또 사기범의 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높은 편이라고 한다. IMF 당시에도 문제가 됐던, 우리나라 기업은 물론이고 정부의 통계조차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도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이런 것들이 전반적으로 한국 사회의 근간을 좀먹고 있는 신뢰의 위기, 신뢰 자산의 결핍 현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신뢰 자산의 부족은 사회적으로 어마어마한 비효율과 낭비, 갈등을 낳게 된다.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계층과 계층, 세대와 세대, 지역과 지역의 커뮤니케이션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현상도 여기에 기인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신뢰 자산이 점점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소멸되고 있다는 점이다.


신뢰 자산이 약화되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불신과 투쟁이 강화되는 사회에서 가장 불리해지는 집단은 사회적인 약자이다. 중상류층 이상 계급들은 풍부한 정보와 다양한 네트워크, 진입장벽으로 작용하는 전문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무질서 상태에서 별로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상태를 이용해 자산을 확대하고 정치 사회적 위상을 강화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라 우리 근현대사의 각종 헌정 중단 사태나 IMF 당시에 실제로 발생했던 현상이기도 하다.


중간층이 두터운 사회라면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신뢰 자산이 축적될 수 있다. 우리나라도 사실은 여러 가지 우여곡절과 악재 속에서도 그런 과정을 꾸준히 밟아왔다. 하지만 IMF 이후 중간층이 붕괴되면서 그러한 선순환 프로세스는 근본부터 무너졌다.


이런 현상을 더욱 부채질한 것이 우리나라 진보 좌파의 근대화에 대한 몰이해이다. 우리나라의 신뢰 자산 부족을 전적으로 좌파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좌파가 그런 현상을 부추기고 가속화시키는, 또는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행동을 거듭해온 것은 사실이다.


대표적인 것이 소유권에 대한 무시, 개인보다 집단의 가치에 대한 강조, 생산력의 발전과 자유무역 등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진보성에 대한 이해 부족 등이 그것이다.


사실 진보 좌파의 이념적 푯대 역할을 해왔던 마르크스주의도 이러한 가치를 중심으로 한 서구 근대화 이념의 뿌리 위에서 피어난 꽃이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진보 좌파들은 소련식 교과서에서 교조화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면서 그 사상의 성립 배경이 된 서양 근대화 이념의 배경을 건너뛰어 버렸다.


조선시대까지 제대로 된 계약과 상거래의 개념조차 희미했던 우리나라 역사에서 사유재산권의 배타적 인정이 얼마나 진보적인 성격을 갖는 것인지, 법치주의를 통한 질서와 안정이 기층 민중들에게 얼마나 절실한 과제인지에 대해서 이해가 없었다는 얘기이다.


우리나라 진보 좌파가 그동안 보여온 정치 행보를 보면 정치 사회적 혼란은 극대화하고, 사유재산의 경계는 최소화하고, 질서 유지의 버퍼라고 할 수 있는 다양한 권위는 결사적으로 무력화하는 것이 핵심 행동강령이었다고 할 수 있다. 좌파 정치세력 가운데 이런 행동강령을 공식화한 곳은 없지만, 성문법보다 더 광범위하고 뿌리 깊은 영향을 끼치는 관습법의 차원에서 이것은 좌파 전반의 가치관이었던 것 같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중상층 이상은 이런 무질서 속에서도 별 피해를 입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위상을 강화하는 기회로 활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하층 이하 기층 민중들은 이러한 무질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기층 민중들이 진보 좌파를 정치적으로 지지해줄 것으로 기대한다는 것은 얼마나 황당한 생각인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