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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겔루스 노부스(신천사 angelus novus, 1920), 파울 클레 (Paul Klee, 1879-1940)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린다?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림을 보는데 눈물이 핑 돈다?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을까? 원래 음악은 디오니소스적인 것. 인간의 원초적 감정에 직접적으로 호소를 하는 힘을 갖고 있다. 하지만 회화는 아폴론적인 것, 그리하여 예로부터 인간 정신의 합리적 부분과 관계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그림을 보며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은 웬 주책일까?

 

아, 그것은 클레의 그림을 말한다. 대단한 그림이 아니다. 그 안에서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가슴 뭉클한 드라마가 아니다. 그 안에는 이렇다 할 스토리, 그러니까 바라보는 이에게 감동을 줄 만한 이야기가 없다. 그렇다고 찬란한 색채와 형태의 유희로 관객을 압도해 버리는 현상학적 스펙터클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유치원에 다니는 꼬마가 공책에 아무렇게나 그린 듯한 우스꽝스런 천사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앙겔루스 노부스. 신천사(新天使).

 

왜 눈물이 나오는 걸까? 오랫동안 찾다가 드디어 발견했다는 기쁨에서? 하긴 그림의 소장지를 보니 예루살렘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 유럽에서 나온 클레의 화집에서 이 그림을 찾아 보기란 어려울 수밖에. 아무리 찾아 봐도 <저녁식사를 나르는 천사>는 있으나 <신천사>는 없었다. 그러니 우연히 그 그림을 찾았을 때 내 기쁨은 얼마나 컸겠는가? 그래서 나온 눈물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건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왜? 그 그림이 양식적으로 클레의 예술언어에서 현격히 벗어난 것도 아니잖은가? 화집에서 비슷한 그림들을 수없이 보면서 왜 하필 이 그림인가?

 

어쩌면 이는 순수한 미적 체험이 아닐 게다. 내가 그 그림을 보는 순간 흘린 눈물은 모든 현실적 고려에서 추상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무관심적 주목의 산물이 아니다. 어쩌면 이는 근대적 의미의 미적 체험이 아닐 게다. 외려 이 체험은 정치라는 혼합물이 섞인 불순한 체험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불온한 체험이다. 하지만 순수한 미적 체험이란 무엇일까? 왜 미적 체험은 항상 순수해야 하는가? 그것이야말로 근대 부르주아의 미학적 환상이 아닐까? 자기들의 삶의 산문성, 자기들이 만든 세계의 산문성, 그 무미건조한 삶의 한복판, 소위 사적 공간의 한 귀퉁이에 걸려 있는 한 조각의 운문성. 이 장식용 운문성을 위한 미적 이데올로기?

 

그럴지도 모른다. 가령 예술을 가상으로 규정함으로써 근대 미학은 예술과 현실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존재론적 벽을 쌓았다. 그후 삶과 예술은 미메시스를, 존재론적 닮기를 하는 걸 포기했다. 그리하여 예술은 현실과 관계없는 향유의 대상, 값싸게 팔리는 문화상품, 나아가 사회적 신분을 가리키는 기호로 전락하여 산문적이기 짝이 없는 부르주아적 삶을 치장하는 장신구가 되어 버렸다. 삶을 예술적으로 조직하기 위한 영감의 원천이 되는 대신, 예술은 부르주아적 삶과 부르주아적 세계의 비미학성을 감추는 포장지가 되어 버렸다. 삶은 예술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예술은 콘서트홀과 미술관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의 미적 체험 역시 대부분 부르주아적 성격을 벗지 못한다. 하지만 이 그림만은 다르다. 그것은 정말로 나를 감동시킨다. 그리고 그 감동은 한갓 인식론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내 존재에 마법을 거는 존재론적 사건이다. 왜 그럴까? 왜 이 한 장의 그림에서 나는 무정한 사물이 아닌, 말을 걸어 오는 인격을 느끼는 걸까? 천사의 눈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무언가 내게 할 말이 있다는 듯. 그리하여 천사의 눈과 나의 눈은 하나가 된다.

 

왜 그럴까? 아마 벤야민 때문일 게다. 어디선가 이 그림을 보고 남긴 그의 글 속의 한 구절이 내 머리 속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 나는 벤야민의 글을 통해 그 그림을 보았다. 그래서 그림을 보며 눈물이 핑도는 해괴한 체험을 했던 것이리라. 아마도 야만의 힘에 쫓기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이 맑시스트 랍비의 삶과 작업의 비극성이 그림을 바라보는 내 눈앞에서 오버랩되었을 게다. 그렇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라는 글에 나오는 구절이다.

 

파울 클레의 그림이 있다. 앙겔루스 노부스라고 하는. 천사 하나가 그려져 있다. 마치 그의 시선이 응시하는 곳으로부터 떨어지려고 하는 듯한 모습으로. 그의 눈은 찢어졌고, 입은 벌어져 있으며, 그의 날개는 활짝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는 아마 이런 모습이리라. 그의 몸은 과거를 향하고 있다. 거기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우리 눈앞에 제 모습을 드러내고, 그 속에서 그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본다. 끊임없이 폐허 위에 폐허를 쌓아 가며 그 폐허들을 천사의 발 앞에 내던지며 펼쳐지는 파국을.

 

아마 그는 그 자리에 머물러 죽은 자를 깨우고, 패배한 자들을 한데 모으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한 줄기 난폭한 바람이 파라다이스로부터 불어와 그의 날개에 와 부딪치고, 이 바람이 너무나 강하여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가 없다. 이 난폭한 바람이 천사를 끊임없이 그가 등을 돌린 미래로 날려 보내고, 그 동안 그의 눈앞에서 폐허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만 간다. 우리가 진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 폭풍이리라.

- 진중권 <미학에세이, 앙겔루스 노부스> 중에서 -

 

 

 

 

 

솔직하다는 것, 자신에게 정직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인간은 어디까지 솔직해질 수 있을까. 한치의 빈틈도 없는 욕망덩어리가 인간이라고 한다면, 삶은 비극적일 수 밖에 없다. 욕망은 너무 많고, 너무 크고,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하지만 좌절하기에는 이르다. 우리에게는 숨겨둔 무기가 있다.

 

추와 추상이 조우하는 묘한 그림이 있다. 추상은 마음의 자연주의이다. 알타미라의 제단에서 뛰쳐나와 고딕의 분열을 거쳐, 이제 녹슨 철탑의 거리에서 부활했다. 이 그림은 추하다. 에코가 말했듯이 추는 불완전하고 잡종인것을 포함한다. 불완전한것은 슬픔을 낳고, 잡종은 연민을 낳는다. 내 속에 들어앉아 밤낮으로 허덕이게 하는 욕망은 추하지만 익숙하다. 메두사가 자신을 응시하는 것처럼.

 

눈 내리는 워싱턴 브리지를 건너 센트럴 파크. 눈은 내리고 공원은 반듯했다. 미노스의 미궁을 나와 골고다 언덕에서 희생당한 제물. 짐승의 머리와 천사의 날개를 가진 미노타우로스가 이 녹슨 거리에 되살아났다.  날개 꺾인 천사의 껍질속엔 욕망하는 인간이 있다. 비상하지도 착륙하지도 못하는 신천사는 이렇게 퍼덕거림으로만 존재한다. 이윤림은 노래한다. "눈밭에 맨발로 서서 <아베 베룸>을 들으면 탄생의 상처가 없는 날개가, 잊었던 듯 펼쳐지지 않을까" 하지만 그 날개는 펼쳐지지 못할 것이다. 욕망이란 탄생의 상처이고 근대적 우울이며, 과산화수소수처럼 아픈 구원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