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명량> 역시 이순신의 개인적인 고뇌와 죽음의 공포와의 대결 극복 그런 것이 영화적 전개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 전쟁을 좀 진지하게 다루는 한국 영화의 대부분이 그랬고 실제로 영화를 본 사람들의 평가에서도 그런 부분들이 눈에 띈다.


 

그런데,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들이 좀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책상머리에 앉아서 그냥 몽상하는 방식의 사유에서 나온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가장 탁월한 지적이 얼마 전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에서 나왔다고 본다. 이 양반에 대해서는 워낙 비판의 목소리가 높기는 하지만 그 발언 자체에 대해서는 충분히 참고할 가치가 있다.


 

그 자료를 찾지 못해서 정확한 워딩까지 소개할 수는 없지만 대충의 내용은 이랬다.


 

'일부 영화나 문학작품 등에서 전쟁 지휘관이 큰 전투를 앞두고 공포심과 고뇌에 사로잡혔다는 식의 묘사를 자주 하는데, 그거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다. 실제로 지휘관은 전투를 앞두고 너무나 이것저것 챙기고 확인하고 지시하고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아 그런 감상에 빠질 정서적 여유가 없다.'


 

내가 직접 전쟁을 경험해본 적은 없지만 백선엽 장군의 저 발언이 실제 전투나 전투요원들의 심리에 대해서 훨씬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과 전투는 사실 거창한 영웅적인 투쟁이나 극렬한 심리적인 연소가 아니라 아주 일상화된 노동의 연속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짐작한다.


 

영웅적인 투쟁이나 극렬한 심리적 연소도 물론 전투과정에서 나타나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예외적으로 나타나는 소수의 제한된 경험 아닐까?  만일 지휘관이나 병사들이 전투를 앞두고 공포심이나 고뇌에 사로잡힌다면 전쟁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죽음의 가능성이라는 것은 분명히 실재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영웅적인 용기가 아니라 극히 일상적인 노동의 과정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로마 군대는 사실 대부분의 시간을 기지 구축이나 도로 작업에 투여했다. 전투는 그러한 작업의 결과물로서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전투 자체가 아니라 바로 사전에 긴 시간을 투입한 노동의 결과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폴레옹이 자신의 병사들에게 가장 강조한 것이 '잘 걷는 군사'라는 점도 비슷한 얘기다. 나폴레옹이 소수의 병력을 집중해 언제나 상대적인 병력의 우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군사들의 기동력 크게 보면 일종의 노동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프랑스 외인부대에 복무했던 사람의 경험담을 읽은 적이 있었다. 외인부대이다 보니 부대원 중에 조폭 분위기를 풍기는 친구들이 꽤 많았는데 막상 전투에 들어가면 그런 친구들은 말 그대로 오줌을 지리는 수준으로 제대로 참호 밖으로 고개 내밀고 총 한번 제대로 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더라는 것이다.


 

오히려 평상시 샌님처럼 조용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총탄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활발하게 오가며 해야 할 일 제대로 하면서 전투를 수행하더라는 증언이다. 이 말이 맞다고 본다. 전투는 일상적인 노동의 한 과정이지, 격투기 선수로서 링 위에 서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용기의 개념이라는 것 자체도 사실 과장과 왜곡, 오해가 많다.


 

영화 <명량>에 대한 이런저런 감상 등을 보면서 떠오른 생각인데, 정리하다 보니 최근 문제가 된 군대 내 가혹행위로 생각이 이어진다. 이것은 내 구체적인 경험으로 얘기할 수 있다. 내 경험상 가장 힘든 부대는 업무나 훈련이 힘들거나 그런 부대가 아니라 군기가 빠진 부대였다. 아마 구타나 가혹행위도 군기가 강한 부대가 아니라 군기가 썩어빠진 부대일수록 심각할 것이다.


 

후임병 괴롭히고 선임병한테 엉겨붙는 무리들도 실은 조폭 분위기를 풍기는 놈들이다. 이런 놈들이 부대 내부에서 발휘하는 그런 폭력성과 투쟁성을 전투에 들어가서도 발휘할 것 같은가? 전혀 아니올씨다라는 얘기이다. 역설적인 얘기일지 모르지만 그래서 군부대 구타나 가혹행위 근절은 무슨 온정주의가 아니라 보다 엄정한 질서와 규율 간단히 말해서 군기의 정립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이걸 무조건 업무나 처벌 강화하라는 얘기로 받아들이시는 분은 없기를 바란다. 내 결론은 군대의 문제는 제대로 노동의 질서, 조직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에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얘기이다.


 

이게 안되면 아마 문제는 해결의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니라 점점 더 심각해지는 방향으로 악화될 것이라고 예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