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드는 증후는 여러 가지인데 그 중 하나는 집중력의 저하가 아닌가 싶다. 특히 영화를 볼 때. 어릴 적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영화관(극장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에서 나오면 그 눈부심과 생경하게 느껴지는 현실로 인하여 2-3시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심하면 그날 저녁 늦게까지 영화 속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뒷마당에서 무술연습은 한다거나, 내가 모르는 어떤 악당이 나를 암살하러 올 거라는 공포심과 설렘(?)으로 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그 당시보다 훨씬 재미있다는 영화를 봐도 매 10분마다 딴 생각을 한다. “집에 담가 논 복분자,, 저걸 한 번 더 걸러야 할 건데..” “마늘 장아찌 숙성중인 간장물을 한번 끓여 넣어야 할 건데 별 문제 없을까”. 요런 걱정에 영화는 영화대로, 집안 걱정은 걱정대로, 병렬우주(parallel universe)가 영화관에서 생성된다. 정말 허접하기 이를 데 없는 C급 영화임에도 홀딱 빠져들던 그때, 그 청소년의 시절이 그립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을 딸-랑 3명이다. 촬영지는 아파트, 인근 산 근처, 낡은 수도원, 이렇게 딸랑 3군데이다. 나는 요런 식의 등장인물이 몇 안 되는 밀폐형 영화를 좋아한다. 그래서 감옥 영화나 탈옥.. 뭐 이런 쪽을 좋아하는데 재미있는 감옥 영화를 기억해보면 1,2개뿐이다. 주로 저예산 영화가 이 양식을 많이 차용한다. 준비할 것 없이 때문이다. 죄수 1-2명, 악독 간수 1명, 어리바리 간수 1명. 밀폐형 영화를 잘 만들기란 무척 어렵다. 이건 일단 스토리가 매우 조밀해야하고 다른 배우와의 협업이 어렵기 때문에 주인공들의 연기가 압도적이 되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거대한 스케일의 영화는 좋아하지 않는다. 일단 인간들이 많이 나오면 내가 그들의 관계를 잘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러시아산 대하소설, 또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가 쓴 소설, 오묘한 러시아 이름에, 친인척 정적과 숙적 동지, 그들끼리 얽히고 설킨 관계망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림을 그려가면서 읽어 본 적이 있다. 재미로서의 글읽기가 아니라 이런 무슨 과제물이나 다름 없었다. 하여, 나는 간결하고, 산뜻한 영화나 소설, 음악을 좋아한다.

 

이 영화는 두 악당이 부잣집 딸을 납치해서 돈을 요구하는 것이 큰 줄거리다. 아래 이미지에 있듯이. 그 아래 이미지, 벌거벗은 남자가 여자의 목을 발로 누르는 장면이 보여주듯이 반전도 꽤 있다. 이 영화에는 이성애, 동성애, 부성애, 가족애가 잘 버무려져 있고, 각각에서 배신도 있다. 연인끼리의 배신, 동성애인끼리의 배신, 가족끼리의 배신. 약간 블랙 코미디적 요소가 있어 더욱 재미있었다. 나는 지금도 펄프픽션 영화만 생각하면 웃음을 지어 보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매우 사실적이다. 현찰 앞에서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평범하고도 가장 기본적인 진실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현실은 반지의 제왕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생략한다.

 

이 영화의 핵심은 앨리스 크리드의 <실종>이다. 전체의 소재가 <납치>인데 왜 <실종>이라는 제목이 달려있는지는 결말부분에 나온다. 올해 들어 한번도 중간에 쉬지 않고 본 영화는 이 영화가 거의 처음이 아닌가 싶다. 여자배우의 연기가 아주 탁월했다고 한다. (편견을 갖지 않기 위하여 누군지 찾아보지는 않았다.) 보면서 깔깔거린 영화도 아니고 김기덕류의 심오한 현장지도가 있는 그런 영화는 아니다. 싸게 만들어, 볼 사람 보고 말 사람 말고, 하는 식의 박리다매형  B급 영화는 더더욱 아니다. 나름 감독과 배우 모두가 매우 열심히, 제한된 공간내에서 최대한으로 뽑아낸 진지하고도..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성실한 영화! 이것이 가장 적절한 레이블링이 아닐까 싶다. 반에서 1등은 못하고 5-6등 권에서 맴돌지만 반듯하고 성실하고 맡은 바 자기 일에 충실한 학생들, 그런 느낌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비오는 날 분식집에서 간단히 라면 한그릇을 먹는 생각이 났다. 후루룩 면과 국물을 같이 털어넣고, 단무지 몇 조각 먹고 나오면 개운하다. 이 영화는 라면을 국물까지 다 맛있게 먹고나서  우산을 다시 펴들고 비내리는 거리를 산뜻하게 나서는 그런 기분을 준다.  짜장면 짬뽕과 같이 입안에 남아 감도는 그 끈적함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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