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명사는 그냥 하나밖에 없는 것을 지칭하는 역할만을 한다. 그것이 그 고유명사를 구성하는 낱말들의 의미에 합당한가 하는 것은 누구도 따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이름이 'Nothing' 이라고 해서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거나 '그 누군가는 "Nothing"과 버금갈 정도로 시시하고 하찮은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말과 사물의 차이를 몰랐던 저 태고적 원시시대 인간의 심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한동안 '욱일기'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사용되었던 국기를 계속 '욱일기'라고 부르는 것은 일본이 그 이름의 뜻에 합당한 나라라고 생각한다거나 그 이름의 뜻에 합당한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함축하지 않는다. '욱일기'는 그냥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특정시대의 특정 국기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이다. 

더 나아가 '욱일기'는 '욱일기'라 불리는 대상, 그리고 그 욱일기가 상징적으로 대표했던 국가체제에 대해 기술적 적합성을 갖는다. 국기의 모양새에 일치하는 형용어일뿐 아니라 그 국가 체제가 추구했던 목표와도 일치한다. 그 목표가 그릇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어쨌든 그 목표를 상징적으로 지칭하는 역할을 해야 더 고유명사다운 것이고 더 고유명사다운 고유명사여야만이 정확한 지칭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군국주의/제국주의 일본을 평가하는 얘기를 하거나 글을 쓴다고 할때 '욱일기'라는 명칭은 그 얘기나 글의 취지에 훨씬 적합하다. 그 군국주의/제국주의의 그 군국주의성/제국주의성을 상징적으로 정확히 나타내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은 욱일기를 치켜세우고 전쟁을 일으키고 수행했기 때문에 욱일기는 전범기이이도 하다. 그러나 '전범기'는 '욱일기'라 불렸던 국기의 상징적 의미를 충분히 담지 못한다. 일본 군국주의/제국주의 국가는 단순히 나쁜 전쟁을 일으키고 수행한 것만이 아니다. 나쁜 전쟁은 전혀 군국주의적/제국주의적이지 않는 나라들도 일으키고 수행한다. 또 전쟁은 여러가지 이데올로기적 대의명분을 등에 엎고 있다. 전쟁을 일으키고 수행했던 당시 일본 국가체제의 특정성/고유성, 그 전쟁이 동원했던 이데올로기적 대의명분의 특정성/고유성을 바로 가리키는데는 단순히 '전범기'라는 명칭은 그리 적합하지 않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전범기'는 제한된 차원에서조차도 고유명사로 부적합하다. 전쟁을 일으키고 수행한 것은 전범으로 처벌받은 몇명의 일본인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리 평범한 다수는 거의 강제되었다 하더라도 많은 일본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군국주의적/제국주의적 국가체제이다. 욱일기는 전범들의 깃발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아울러 전범들도 대표했던 바로 그 체제의 깃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