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에 대한 논쟁 때문에 요즘 아크로 분위가 매우 거룩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신의 섭리. 하나님의 뜻, 더 나가서 고난의 문제까지 토론을 하니 말이다. 

이쯤 되면 막가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주제로 하는 욥기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도 될 것 같다.

흔히 욥을 가리켜 고통을 참아내는 인물, 신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시련을 견디는 인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생구라다. 

나중에 욥이 보상을 받았다는 욥기 후반 부분은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서 후에 첨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정설이다.

욥기는 ‘인간이 당하는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고 고통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역사상 최초의 작품이다.

욥기는 기독교의 교리를 가지고는 해석될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에 보통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욥기를 가지고 설교를 하는 것은 말짱 헛소리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를 벋어난 지젝의 해석을 소개하고자 한다.


지젝에 의하면 신은 정의롭지도 불의하지도 않다. 다만 무능할 뿐이다.

신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현실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뭔가 조종을 행사하거나 하지 않는다

신은 인간의 언어나 관념과 의식으로 고정될 수도 없다. 마치 거대한 허공과 같은 존재이다.

지젝이 신의 무능함을 폭로함으로 들어내고자 하는 것은 종교의 이데올로기적인 기능이다.

현재의 고통에 신의 뜻이 있다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고통 받는 자들로 하여금 오히려 고통 속에서 행복을 찾고 내일의 천국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인내하도록 만드는 종교의 아편으로서의 기능을 부정하고자 것이다.

만약에 신이 무능하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폭로(?)되면 세상 모든 교회들은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보통 교회에서 신앙이라고 믿는 것은 그 정도까지는 가지 않고 그저 재미있게 종교놀음을 하는 것이다.

지젝의 요점은 기독교의 참된 핵심에 또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죽을 때, 그와 함께 죽은 것은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에서 어렴풋이 드러나는 은밀한 소망이다. 즉 나를 버린 아버지가 존재한다는 소망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에게는 나를 구원해 줄 아버지가 없다는 충격적인 깨달음만이 있다. 신은 텅 비어 있을 뿐 아무런 권능도 없다.

현재의 고통은 미래에 어떤 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구원은 없는 것일까? 무능한 신에게 구원을 기대하는 것은 바보스러울 뿐인가?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 인간은 신의 도움에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우리가 신을 도와야 한다.

우리는 현실에서 "하느님, 지금 어디 계세요? 왜 제 편을 들어주지 않으시고 침묵하십니까? “하고 부르짖고 싶을 때 도와 줄 수 있으면서도 안 도와주는 얄미운(?) 하느님보다는 오히려 도와 줄 수 없어서 가슴만 태우는 하느님을 이해해야만 한다.

지젝은 유대교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에 반해 기독교의 자세는 기다리던 메시아가 이미 강림했다는 자세, 즉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는 자세라고 한다.

메시아는 '사건'을 일으키고 물러나 무력한 관찰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 사건이 열어 놓은 공간에서 어떤 유의미한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것은 신의 몫이 아니라 인간의 몫이다.

지젝에 의하면 ‘이것이 우리가 신을 도와야 한다.’는 말의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신에게 조차 '전능하지 못함에도 전능해 보이도록' 위선을 요구하고 스스로 위로를 받는 위선에 빠져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