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카르마님의 글 중 과학주의, 과학주의 비판을 읽다가 몇 가지 생각이 떠올라 그냥 적어 봅니다.
사실 스켑틱에서 환원주의 논쟁을 벌였을 때부터 떠 올렸던 생각인데 이 기회를 빌려서 좀 정리 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제 블로그에 올렸던 숭산대사의 일화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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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산대사>

그리고 그 글에 올렸던 제 리플 중 일부를 그대로 가져와 보겠습니다.

[계량화 할 수 있고 논리적인 해답이 있고 객관적인 측량이 가능한 언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또 그렇게 답할 수 없는 주관적인 이해가 존재하는 것이 삶입니다.

서구의 사상, 철학, 과학은 대체로 객관의 세계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대체로 동양의 철학, 종교는 주관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주관의 세계, 그러니까 계량화 하기 어렵고 객관화하기 어려운 심리적 세계 역시 우리 삶의 일부아닐까요?

우리는 종종 "꽉 막힌 사람" 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꽉막힌 사람이 자신의 업무,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제대로 기능합니다. 하지만 융통성이나 상대의 기분, 감정, 뉘앙스를 헤아려야 하는 상황에서 대단히 무능한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그 사람의 꽉막힘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 꽉막힘을 계량적으로, 수량적으로, 객관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존재 하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은 삶속에는 틀림없이 많이 존재합니다.]

사실 스켑렙에서 환원주의 논쟁을 벌이면서 느낀 감정은 일종의 답답합이었습니다. 주류과학계에서 환원주의가 비판받은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고 현재에도 아직 환원주의가 대세일 수는 없습니다. 다만 과학은 그 본질상 환원론적 방법론을 사용할 수 밖에 없고 그러한 환원론적 방법론은 대부분의 경우 대단히 유용합니다.

문제는 이 환원주의논쟁 자체가 일종의 인문학의 영역이라는 겁니다. 즉, 과학철학의 한 범주 내에서 일어난 토론이 환원주의 논쟁입니다. 당시 스켑틱에서 환원주의논쟁을 아는 사람도 이를 이해한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다니얼 데넷이나 스티븐 핑커가 몇 마디 올려 놓은 글을 가져오며 자신들의 입장은 "무식한 환원주의"가 아니라 도킨스가 주장하는 "단계적 환원주의"라고 이야기 했죠. 그러나 당시 환원주의를 옹호한 사람들은 정확하게 "무식한 환원주의greedy reductism"의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문제는 뭐가 무식한 환원주의고 뭐가 단계적 환원주의인지 그 경계를 전혀 이해 못했던 것 뿐입니다. 다만 막연하게 자신들은 과학적 객관성을 옹호하고, 도킨스도 그걸 옹호하니까 자신들도 도킨스와 같은 입장에 속해 있다고 생각했던 것 뿐입니다.

이 부분은 스켑틱에 올렸던 환원주의 논쟁의 마지막 글 부분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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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립 W. 앤더슨, 환원주의에 결정타를 날린 고체물리학자>

이덕하님의 주장을 대부분 인정하면서도 가끔 느껴지는 답답함 역시 이런 부분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덕하님은 아래 리플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죠. 과학적이지 않은 통찰은 가치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언어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언명들이 우리의 삶에 많은 도움을 주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의 대부분은 일종의 가치체계와 연결되어 있고 이러한 가치체계는 이덕하님의 용어를 빌리자면 '과학의 교권'의 영역 밖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숭산대사의 일화 역시 과학의 교권 내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장난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말장난이 지타에게는 많은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친구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들은 과학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을지 몰라도(혹은 검증불가능한 명제일지 몰라도) 그 친구에게는 힘이 되어 줄 것입니다.

이덕하님은 스스로 눈치채지 못할지 모르지만 어느 정도 환원주의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진화심리학? 전 이 '가설'이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진화심리학의 '해석'과 실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인문학은 과학적으로 증빙될 수 없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 그러나 인문학은 인문학 내부에서의 기본적인 법칙과 규칙이 있습니다. 이 규정과 규칙은 절대적으로 객관적이지 않지만 상대적으로 객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필립 앤더슨이 말한 것 처럼 각 층위의 학문이 가지는 규칙은 그 층위 내에서는 기본적으로 올바르게 작동하기 마련이며 그 아래 층위의 규칙이 상위의 규칙보다 더 근본적(fundamental)이라 말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문법을 봅시다. 문법은 물론 시대에 따라 변화하며 지역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법의 생성과정과 규칙은 그 나름의 규정성을 가집니다. 결코 생리학이나 분자생물학으로 문법의 변이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혹은 그 저변의 생리적 팩터를 전달하여 문법변이의 규칙성 연구에 더 깊은 이해를 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생리학이나 분자생물학이 언어학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사회과학이나 인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의 영역은 결코 과학처럼 절대적 객관성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영역 내부에는 그에 맞는 변이적(?)혹은 상대적  객관성과 규칙성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러한 규칙성과 객관성은 다소 확률적인 형태로 존재하게 됩니다. 이러한 규칙과 규정이 과학의 객관성과 다르다고 해서 그 부분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게으르거나" "머리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이덕하님은 화학의 수준, 물리학의 수준, 사회학의 수준, 심리학의 수준을 나누고 그 안에서 각각 연구활동하는 것에 이견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이면 안에는 사회학보다 심리학이 더 근본적이며 심리학보다는 생물학이, 생물학보다는 화학이, 화학보다는 물리학이 더 근본적이라는 '무의식적 전제'가 놓여 있다고 보입니다. 그리고 더 근본적인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이 더 객관적이며 더 머리가 뛰어나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몇몇 분들의 눈에는 이덕하님이 구체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큰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전제의 비합리성에 대한 비판욕구를 느끼는 것이 아닐까요?

인간의 본성과 심리에 대한 통찰은 과학의 교권이므로 종교적이거나 정신분석학적 통찰은 가치가 없다?

과학적 통찰과 비과학적 통찰의 범위를 어떻게 나누어야 정확한 것일까요? 밑에서 어느님이 말하셨듯이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결코 과학적인 통찰이 아닙니다. 그리고 현재의 원자론과도 완전히 다른 이론입니다. 실증적이고 체계적인 것이 아니라 당시 수준에서 관찰 가능한 자료를 '합리적으로' 연관시켜 내놓은 통찰입니다. 이 통찰은 가치가 없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이 계속해서 불길한 생각이 떠올라 괴롭습니다. 그래서 그 생각을 안하려고 노력하지만 그 생각을 안하려는 노력 자체가 그 생각을 더 떠오르게 만듭니다. 누군가 말해 줍니다. 그 생각을 잡고 있는 것은 너 자신이야. 그러면서 조주선사의 일화를 들려 줍니다. 그 사람은 그 일화를 듣고 자신의 마음의 긴장을 푸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불길한 생각이 들 때마다 그 생각을 물리치려고 하지 않고 놓아두고 차분하게 관찰하다 보니 어느새 그 생각이 사라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불교의 통찰은 과학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죠. 하지만 가치가 없는 것일까요?

현대의 과학은 어떨까요?

먼 미래의 새로운 과학적 통찰이 축적될 경우 현재의 과학은 일종의 불확실한 관찰, 혹은 당시까지의 자료를 토대로 추론한 관점의 집합일 수 있습니다.

양자역학은 동시대에서도 각기 다르게 받아들이는 과학적 틀이 됩니다. 각자 자신이 속한 과학의 영역에 따라 양자역학의 '혁명'을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현재, 국내 유수대학의 한 물리학교수가 코펜하겐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직접 목격한 바가 있습니다. 즉, 현재의 과학적 통찰이 동시대에서 마저 각각 자신이 전공한 분야, 자신이 종사한 분야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듯이 이 미래의 입장에서는 그저 당시의 과학적 통찰일 뿐일 수 있다는 겁니다.

인간현상이라는 것은 무척 복잡합니다. 그리고 인간현상은 객관성과 주관성이 혼재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 그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위치에 있습니다. 자신과 관찰대상이 같은 층위에 속하기 때문이죠. 따라서 인간심리나 본성에 대한 통찰은 과학의 패러다임 밖에도 존재할 수 있으며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혹은 현재까지의 과학이 다 포섭할 수 없는 영역이 여전히 존재하며 그 부분도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정도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이 가치를 '효용'이라고 보아도 좋겠군요.

마지막으로 정신분석에 대한 제 생각을 말해보겠습니다.
                                                                                      대상관계이론을 주류로 끌어올린 오토 컨버그

                                                       <대상관계이론을 주류로 편입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오토 컨버그>

제 지도교수님은 대상관계이론 전공자이셨으며 한국에 대상관계이론을 거의 처음으로 전파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대상관계이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으셨고 약물치료에 대한 약간의 비판적, 부정적 입장을 견지하셨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공부하셨기 때무에 기본적으로 통합주의적 접근을 주장하셨습니다. 즉, 효과 있다면 정신분석이든, 대상관계이론이든, 행동주의치료든, 인본주의 접근이든 그 무엇이든 활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셨죠.

그리고 전 정신분석이 일정정도 효과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신분석이론은 상당히 그럴듯한 자기 완결체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자기 완결성은 환자에게 자신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는 생각을 심어주고 그 생각 자체가 안정감을 줄 수 있습니다. 플라시보효과 아니냐고요? 조금 다르지 않을까요? 환자의 심리내부에 어떤 이론적 틀을 제공하고 그 이론적 틀을 제공받지 않은 사람보다 더 효과성을 드러낸다면 그걸 단순히 플라시보라고 볼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이론의 틀이 정량화 하고 과학적으로 검증 가능한 분야는 절대로 아니라는 겁니다. 게다가 프로이트 이론의 상당 부분은 프로이트의 후계자들-자아심리학, 대상관계이론-에 의해 비판 수정되었고, 그 적자라고 자임하는 라깡에 의하여 상당히 보완되었습니다. 결코 프로이트의 정통 정신분석이 주류과학에서 검증될 수 있는 성질의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이 관점에서 프로이트 이론은 하나의 썰이라는 것에 전 이견이 없습니다. 프로이트 자신도 정신분석이 심리학이라기 보다는 메타심리학이라고 주장했었죠. 물론 프로이트의 주장은 무의식의 분석은 심리학을 넘어서는 기저의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주장을 펼쳤겠지만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결국 '알 수 없는 그 넘의 것'에 대한 주장으로 읽힙니다.

따라서 전 프로이트의 저작들이 현대 인간심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통찰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전혀 이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당시에도 가치가 있었지만 현대에도 여전히 가치 있음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학적인 진실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저나 이덕하님이나 minue622님이나 별로 큰 차이를 가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