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lary Rose는 자연 선택으로 엄마가 아기를 죽이는 것도 설명하고 보호하는 것도 설명한다는 점에 불만을 품고 있다. 모든 것을 설명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DalyWilson을 비판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John Horgan이 지적했듯이, 그들을 존경한다고 아주 공개적으로 밝힌 Steven PinkerWilson-Daly 테제에 남아 있는 약간의 그럴 듯함도 완전히 날려 버릴, 영아살해에 대한 자신의 적응론적 이론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먼저 존경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1997년에 『New York Times Magazine』에서 여러 인기 있는 지식인들에게 두 번 읽은 책을 알려달라고 하자 PinkerDalyWilson이 쓴 『살인(Homicide)』을 언급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 그는 『New York Times Magazine』에 기고한 글에서 여자가 자신이 낳은 신생아를 죽이는 문제에 대해 논의했는데 최소한의 자원밖에 없을 때에는 그런 행동이 적응적 반응일 수 있다는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통상적으로는 신생아에 대한 엄마의 보호를 이끌어내는 심리 모듈이지만 궁핍한 환경의 도전에 부닥쳤을 때에는 스위치가 꺼질 수도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 지점에서 진화론적 적응론의 추론은 말도 안 되는 모순적 명제로 이어진다: 살인과 보호가 모두 진화적 선택(evolutionary selection, 자연 선택)에 의해 설명된다. 이런 식으로 쓰인다면 선택은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But it is not necessary to criticise Daly and Wilson, for, as John Horgan points out, Steven Pinker as their very public admirer has, with his own adaptationist theorising on infanticide, entirely shredded any credibility the Wilson-Daly thesis had. First, his admiration. When a number of fashionable intellectuals were asked in 1997 by the New York Times Magazine to name a book they had read twice, Pinker named Daly and Wilson’s Homicide. However, he subsequently wrote a piece for the New York Times Magazine in which he discussed women killing their newborn babies and delivered himself of the view that such an act, where resources were minimal, could be an adaptationist response. He argued that the psychological module which normally produced protectiveness in mothers for their newborns might be switched off by the challenge of an impoverished environment. At this point evolutionary adaptationist reasoning becomes an absurd Catch-22 proposition: both killing and protecting are explained by evolutionary selection. Used like this selection explains everything and therefore nothing.

(Colonising the Social Sciences?, Hilary Rose, Alas, Poor Darwin: Arguments Against Evolutionary Psychology, Hilary Rose & Steven Rose 편집, 122~123)

 

 

 

어떤 물리학자가 쇠구슬이 떨어지는 것을 중력과 부력으로 설명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부력보다 중력이 크기 때문에 쇠구슬은 아래로 떨어진다. 그 물리학자는 헬륨을 채운 풍선이 위로 올라가는 것도 중력과 부력으로 설명한다. 중력보다 부력이 크기 때문에 위로 올라간다. 회오리바람이나 강력한 자기장과 같은 다른 요인이 있다면 이야기가 복잡해지지만 여기서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Rose가 그 물리학자를 본다면 중력과 부력이 떨어지는 것도 설명하고 올라가는 것도 설명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할 것 같다.

 

 

 

어떤 심리학자가 식욕 조절 기제에 대해 썰을 푸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식욕 조절 기제는 위의 상태에 대한 정보를 받아들인다. 위가 비어 있다면 배고픔을 느끼기 쉽고 그러면 먹으려는 충동이 생기는 경향이 있다. 위가 차 있으면 포만감을 느끼기 쉽고 그러면 먹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Rose는 식욕 조절 기제가 먹으려는 경향도 설명하고 먹지 않으려는 경향도 설명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할 것 같다.

 

 

 

어떤 사람이 TV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그에 따르면 TV 스위치를 켜면 TV가 켜진다고 한다. 그리고 TV 스위치를 끄면 TV가 꺼진다고 한다.

 

Rose는 스위치가 TV가 켜지는 것도 설명하고 꺼지는 것도 설명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Rose에 따르면 스위치는 TV가 켜지거나 꺼지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그 사람이 만들어낸 황당한 가설일 뿐이다.

 

 

 

때로는 친엄마가 신생아를 죽이기도 한다. 이것이 자원이 부족할 때 자식을 죽이도록 자연 선택에 의해 “설계”된 모종의 심리 기제 때문인지, 아니면 병리적 현상인지, 아니면 모종의 사회화 때문인지 가리기 위해서는 실증적 증거를 찾아 나서야 한다.

 

죽이는 것도 설명하고 보호하는 것도 설명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는 황당한 비판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