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는 천분이 지극히 빼어났고 지혜와 용기가 절륜했다. 또 충효와 큰 절조를 지녔으며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공부했으며 성리(性理)를 탐구해 깊은 학식을 쌓았다. 태조가 평소 신임하여59) 전쟁터로 나갈 때마다 반드시 그를 데리고 갔으며 여러 번 천거하여 함께 재상까지 올랐다.

당시 국가에 변고가 많아 중요한 기밀사항이 매우 많았는데, 정몽주는 의혹스러운 큰 사건을 처결하면서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모든 일을 조리 있고 합당하게 처리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몽주 [鄭夢周] (국역 고려사, 2006.11.20, 경인문화사)

 

공민왕 13년(1364)에는 우리 태조(이성계)를 따라 화주(和州 : 지금의 함경남도 금야군)에서 삼선(三善)·삼개(三介)를 격파했으며 이후 거듭 승진해 전농시승(典農寺丞)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몽주 [鄭夢周] (국역 고려사, 2006.11.20, 경인문화사)

 

우왕 6년(1380)에 우리 태조를 따라 운봉(雲峯 : 지금의 전라남도 남원군 운봉면)에서 왜구를 격퇴하고 돌아와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에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몽주 [鄭夢周] (국역 고려사, 2006.11.20, 경인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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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우리 태조(이성계)를 따라 공양왕을 옹립하기로 대책을 세워28)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동판도평의사사사(同判都評議使司事)·호조상서사사(戶曹尙瑞司事)·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 겸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영서운관사(領書雲觀事)가 되었다. 또 익양군(益陽郡) 충의군(忠義君)으로 봉해졌으며 순충논도좌명공신(純忠論道佐命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는데

[네이버 지식백과] 정몽주 [鄭夢周] (국역 고려사, 2006.11.20, 경인문화사)

 

 

정몽주는 조준(趙浚)·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 등이 우리 태조를 추대하려고 모의하는 것을 알고서 일찍부터 틈을 타 그 모의를 분쇄하려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몽주 [鄭夢周] (국역 고려사, 2006.11.20, 경인문화사)

 

서기 1391년 3월 -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낙마했다. 공양왕이 듣고 의원,약을 보냈다. 

서기 1391년 4월 - 정도전이 더 먼 지방으로 옮겨 유배되고 남은,윤소종,남재,조박,오사충도 관직 삭탈&유배되고, 조준도 먼 지방으로 유배된다.


 

 


태조가 황주(黃州 : 지금의 황해북도 황주군)까지 출영한 후 해주(海州 : 지금의 황해남도 해주시)로 사냥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몸을 크게 다쳤다. 

정몽주는 ... 조준·정도전·남은 및 평소 태조를 따르던 자 대여섯 명을 탄핵하여57) 처형시키... 려 했다.

태조가 귀경길에 벽란도(碧瀾渡 : 지금의 개성직할시 개풍군)58)에 이르러 묵으려 했는데, 태종(太宗 : 이방원)이 급히 달려가, “정몽주가 필시 우리 집안을 몰락시키려 할 것입니다.”라고 알렸지만 태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벽란도에 유숙해서는 안 된다고 말렸지만 태조가 말을 듣지 않다가 여러 번 강권하자 아픈 몸을 이끌고 가마에 탄 채 밤에 집으로 돌아왔다. 

정몽주는 ... 사흘이나 식음을 전폐했다. 

태종이 다시, “형세가 매우 위급하니 어찌해야 하겠습니까?”라고 의논했으나 

태조는 “죽고 사는 것은 운명에 달렸으니 다만 순순히 받아들여야 할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태종과 태조의 동생 이화(李和) 및 사위 이제(李濟) 등은 휘하의 책사들과,

 

“이씨가 왕실에 충성을 바친 것은 나라 사람들이 아는 바이다. 지금 정몽주에게 모함을 받아 악명을 뒤집어쓰게 되었으니 후세에 누가 이것을 변명하겠는가?”

라고 의논한 후 (이방원은) 정몽주를 제거하려고 모의했다. 

태조의 형 이원계(李元桂)의 사위인 변중량(卞仲良)이 그 모의를 정몽주에게 알리자 정몽주가 태조의 집을 찾아가 낌새를 살피려 했으나 태조는 평소처럼 그를 대했다. 태종이, 때를 놓칠 수 없다고 하며 정몽주가 돌아갈 때 조영규(趙英珪) 등 너덧 명을 보내어 길에서 그를 격살하게 하니 나이 쉰여섯이었다. 

태종이 사실을 알리자 태조가 진노하며 병든 몸을 일으키더니,

 

“너희들이 대신을 함부로 죽인 판에 나라 사람들이 어찌 내가 그 사실을 미리 알지 못했다고 하겠느냐? 우리 집안은 본래 충효로 소문이 났는데 너희들이 이런 식으로 불효를 저지르는구나!”

라고 꾸짖었다. 태종이,

 

“정몽주 등이 우리 집안을 몰락시키려 하는데 어찌 앉아서 당할 수야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효도이니 이제 휘하의 군사를 소집해 불시의 변란에 대비해야 합니다.”

라고 건의했다. 태조가 어쩔 수 없이 황희석(黃希碩)을 시켜 왕에게,

 

“정몽주 일당이 죄인을 비호하면서 은밀히 대간을 꾀어 충량한 신하들을 모함하다가 이제 죄를 자복하였습니다. 조준과 남은 등을 불러 대간과 함께 사실을 조사해 밝히게 하소서.”

라고 알렸다. 이에 따라 대간을 국문하여 유배보냈으며 아울러 잔당들도 유배보낸 후 정몽주의 머리를 큰 거리에 매달고 “허위를 꾸몄으며 대간을 꾀어 대신을 해치려 했고 나라를 어지럽혔다.”는 죄명을 써붙였다. 태조 휘하의 책사들도 상소해 그 가산을 몰수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몽주 [鄭夢周] (국역 고려사, 2006.11.20, 경인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