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발전 '기적'에 대한 외국과 비교 및 후임정권과의 비교

 

어떤 이들은 1960년 우리는 아프리카의 가나보다도 못 사는 세계 최저의 빈국이었는데 박정희 덕택에 잘 살게 되었다고 하지만 한국(조선)은 문명국가로서 500년을 지속하며 온갖 물질적 생산력을 축적한 나라였고 개성 상인으로 불리는 상업자본과 호남 평야를 바탕으로 한 농업 생산 기반과 대장장이, 도공과 같은 수공업 분야의 기술력 등으로 물질적 생산 기반을 이미 갖추고 있는 나라였음. 오랜 동안 독자적인 물적 생산 기반을 거의 갖추지 못하고 있고 문맹률로 고통받고있던 아프리카의 국가와는 질적으로 다른 나라임

 

60년대 경제발전은 세계사적으로 유례없었다?

일본은 1955년부터 15년간 연평균 15.1%라는 경이적인 경제성장률을 기록함으로서 당시 세계가 놀랐으며, 이후 세계경제대국 2위에 도약, 서구에서 일본을 벤치마킹하자는 열기가 일어난 일도 있었다. 그
럼에도 동경의 기적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음. 2000년 아시아 개발은행 자료에 의하면 1965년부터 1980년까지 동아시아 주요국의 연평균 GNP 증가율은 싱가포르가 10.1%로 가장 높았고 대만이 9.8%, 한국 9.5% 그리고 홍콩 8.6%의 순서로 되어 있다. 같은 기간 동안 위 국가들의 실질경제성장률은 일본 10.4%이고 싱가포르는 8.5%, 대만 7.5%, 한국 6.8%, 홍콩은 6.2%로 되어 있다.

  1997년 현재 말레이시아는 세계 17위의 수출대국으로 성장해 있었고, 우리나라와 같은 수출주도형 모델로 변신을 꾀해 1980년대 이후 연평균 8%이상의 성적을 20여 년 간 유지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우리나라의 고성장 모델과 말레이시아의 그것과는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박정희의 방식과 마하티르의 방식은 근본적으로 커다란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박정희가 차관과 차입을 통한 수출주도형 경제를 일으킨 반면, 말레이시아는 해외의 다국적 기업의 직접 투자를 유치해서 그 외국인 직접 투자를 통한 수출주도형 경제를 일으킨다. 우리의 차입 액수는 말레이시아의 그것보다 적게는 2.5배에서 많게는 3배까지 증가했다 여기에 더해서 총 채무에서 급하게 변통한 단기 채무(사실상 사채)의 비율이 말레이시아의 그것보다 훨씬 높았으며 이를 외환 보유고와 비교할 때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수준에 까지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또한 외국인 직접 투자액수에 있어서 한국은 말레이시아의 그것보다 훨씬 낮은 수준을 유지한다. 특히 1993년은 외국인 직접투자가 5억 8천 8만에 불과해서, 이미 50억 달러를 돌파한 말레이시아의 10분의1에 겨우 달하는 수준이다

 

한국으로 돌어와서 전두환.노태우 정권시기에도 10% 넘는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박정희 정권 때보다 1%이상 초과달성했다. 그럼 전두환과 노태우도 기적을 이룬 것인가? 김대중도《6.25 이후 최대국난》이라는 IMF를 극복하고 그 이듬해 10.9%, 그 다음해 8.8%, 2001년에는 전 세계적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성장을 한 몇몇 안 되는 국가군 속에 올려 놓았다. 그럼 이것은《3전4기의 기적》인가

 

-높은 인플레이션과 부동산 투기로인한 집값 상승

  ‘수출입국’이 노동자들의 저임금으로 가능했는데, 오히려 수출 증대가 노동자들에게는 또다시 ‘높은 물가’로 보복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63년 20%, 1964년 29%를 기록하는 등 60년대 동안 해마다 10% 이상 폭등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도 1974년 24%, 1975년 25%를 기록하는 등 1973년만 빼고 매년 10% 이상의 물가 상승을 기록했다. ‘독재’뿐 아니라 ‘성장’의 뒤편에서도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국민들의 삶이 팍팍해진 것이다.

   

-그외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 비리들 :

 

위에서 언급한 것들만 있으면 통큰 박정희가 너무 섭섭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는 다른 사건도 많이 벌려놓았다. 증권파동, 새나라자동차사건, 조선일보 워커힐사건, 슬롯머신사건, 삼분폭리사건, 이건희회장의 아버지되시는 이병철의 사카린밀수사건

 

-일본의회에서 폭로된 한국의 경제비리들 :

*한국 알루미늄회사의 경우, 박정권은 일본에서 현지가격으로 7백만 달러인 공장을 1천 3백만 달러에 사도록 허용. 여기서 차액인 6백만 달러는 정치자금으로 분배됨. 이 사건에 연루된 일본의 기업체들은 히다치, 도멘, 쇼와전기 등의 큰 기업체.

 

* 서울지하철 차량 매입사건. 일본 회사는 한국에 엔진 하나당 6,400엔에 판매. 그러나 그 엔진의 일본 현지 가격은 3천 엔. 차액은 정치자금으로 조성됨. 이때 한국정부는 186개의 엔진을 매입했으며, 이 사건에 연루된 일본 기업체들은 마루베니, 미쯔비시 상사, 이와이, 고큐 등.

 

* 대한항공 리베이트 사건. 일본 항공기 구매시 일정비율을 정치자금으로 제공키로 일본 우익인물들과 배후 약정

 

... -유가상승으로 기업도산 속출

 

1979년 OPEC의 2차 석유류 감산이 시작. 이른바 2차 오일쇼크다. 여기에 한국은 70년대 내내 추구하던 중화학 공업정책이 발목을 잡히면서 엄청난 공황 직면. 1 배럴에 36달러까지 유가가 치솟자, 일본 및 선진국의 유휴설비를 차관을 통해 들여왔던 한국 중화학 공업계는 파산직전의 상태. 이들 중화학 설비를 가동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유류소비가 불가피한데, 2차 오일쇼크로 도저히 채산성을 맞출 수가 없었음. 산업생산성은 급속히 추락했고 공장 가동율은 한 때 50%밑으로 추락. (IMF때도 50%에는 이르지 않았음). 성장율은 마이너스 5%를 기록.

 

이 때문에 수많은 기업이 일거에 도산. 살아남은 기업 역시 중화학 공업 육성을 위해 끌어들인 자금을 갚기 위해 필사적. 빚으로 빚을 갚는 악순환의 연속이었습니다. 외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당시 한국경제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증가. 1979년말 180억달러 였던 외채는 결국 1985년 500억달러 수준으로까지 급격히 증가. (이 당시 수출액이 300억달러 수준, 지금으로 치면 약 2000억달러 정도의 수준).

 

말이 좋아 중화학 공업 구조 조정이었지, 사실상 박정희가 계획한 모든 계획의 총체적 폐기가 불가피. 1982년부터1985년까지 한국은 중화학 공업 구조조정을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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